당신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은밀한 마음속에서 당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그대로 진실이 된다고 믿는 것, 이것이 천재(genius)의 행동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숨은 확신을 밖으로 드러내면 보편적 의미를 획득한다. 가장 깊숙한 것은 적절한 때가 되면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번째 생각은 최후 심판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러한 마음의 목소리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친숙하다. 모세, 플라톤, 밀턴이 남긴 가장 뛰어난 공로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책과 전통을 무시했고, 남들의 말을 모방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는 데 있다. (…)
부러움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방은 자살행위다. 배우는 과정에서 이런 확신이 드는 순간이 온다. 또한, 좋든 나쁘든 자신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제 운명의 몫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을 맞이한다. 이 세상은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경작지를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갈지 않으면, 단 한 알의 옥수수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 내부에 깃든 힘은 본래 새롭다. 그 새로움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하는데, 직접 뭔가를 해보아야만 비로소 자기 능력을 알게 된다.
--- p.15, 「자기 신뢰」 중에서
장미에게는 시간이 없다. 단지 장미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매 순간 완벽하다. 잎눈이 트기 전에 그 온 생명이 약동한다. 꽃이 활짝 피었다고 해서 그 활동이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잎 없는 뿌리 상태라고 해서 활동이 더 적어지는 것도 아니다. 장미의 자연(본성)은 충족되어 있고, 동시에 모든 순간마다 자연을 충족시킨다.
이에 비해 인간은 뒤로 미루거나 기억한다. 그는 현재에 살지 않는다. 뒤로 눈을 돌려 과거를 한탄하거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풍요로움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발끝으로 서서 미래를 내다보려 한다. 장미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자연(본성)과 함께 현재에 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행복하거나 강인해질 수 없다.
--- p.38~39, 「자기 신뢰」 중에서
힘(권력)은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아는 사람, 자기 밖이나 다른 곳에서 선을 찾는 자는 허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지체 없이 자기 생각으로 돌아가서 즉각 자신을 바로잡고 우뚝 서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기의 사지(四肢)를 마음대로 부리고 기적을 일으킨다. 두 발로 서는 사람이 물구나무로 서 있는 사람보다 더 강하다.
--- p.61~62, 「자기 신뢰」 중에서
나는 본능적이고 영웅적인 종족이란 운명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운명과 공모한다. 사건의 진행에 만족하는 듯 체념한다. 그러나 허약하고 게으른 자가 이런 교리를 준수할 때는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들어낸다. 허약하고 사악한 자들은 운명에 모든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운명이 아닌 다른 길을 보는 게 인간에게는 더 유익할 때가 있다. 그게 더 실용적이다. 운명을 활용하는 사람은 객관적 사실들에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고 명령한다. 신탁은 말한다. “자연을 응시하지 마라. 그녀의 이름은 치명적이니까.” 이런 한계들을 너무 깊게 생각하면 인간은 왜소해진다. 자신의 운명, 태어날 때의 별을 지나치게 많이 말하는 사람들은 낮고 위험한 단계에 있는 것이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악을 스스로 불러오는 꼴이 된다.
운명을 이런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운명을 올바르게 활용하려면 우리 행동을 자연의 고상함 쪽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자연은 그 자체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거칠고 무적이다. 인간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의 가슴에서 공허한 자만심을 제거하고, 자연과 같은 수준으로 매너와 행동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권을 보여야 한다. 목적의식을 중력의 당김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권력, 설득, 뇌물도 자기 목적을 포기하게 할 수 없다. 인간은 강, 참나무, 산 같은 존재에 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흐름, 그런 쑥쑥 뻗어감, 그런 우뚝함을 갖추어야 한다. (…)
운명의 힘이 압도적이고 인간 또한 운명의 한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운명을 운명으로 맞설 수 있다. 우주가 이런 야만적인 사건을 일으켰더라도, 우리의 원자도 그에 못지않게 야만적으로 저항한다. 체내에 공기 저항이 없다면 우리는 대기압에 압사당했을 것이다. 얇은 유리로 만든 관은 그 안에 바닷물이 있으면 바다의 충격을 견딜 수 있다. 충격이 전능하다면 저항도 전능하다.
그렇지만 운명을 운명으로 막는 일은 단지 공격을 피하는 수비적인 자세일 뿐이다. 그것 외에 고상한 창조적인 힘들도 있다. 생각의 계시는 인간을 예속에서 해방해 자유 쪽으로 데려간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합당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번 태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다시 태어난다. 연속해서 아주 중요한 체험을 하면서 새것은 옛것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일곱 하늘 혹은 아홉 하늘 신화가 생겨났다. 생애 최고의 날, 인생이라는 축제에서 가장 위대한 날은 우리의 내적인 눈이 뜨여 사물의 단일성(單一性)과 법칙의 편재성(遍在性)을 보는 날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저마다 있어야 하고 또 반드시 존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최선임을 아는 것이다.
--- p.87~90, 「운명」 중에서
바라는 것이 별로 없고 자기 필요는 자기가 알아서 충족하게 하는 것처럼 우아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사납게 움켜쥐려고 하지 않고 대신에 남에게 뭔가를 남겨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아한 일이 아닐까요? 남에게서 거창하게 대접받는 것보다는 자기 필요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더 우아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또 소수의 사람에게는 이것이 우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속하는 우아함입니다. (…)
사람은 개혁가가 되기 위하여 또 인간이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다시 만들려고 태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거짓말을 내다버리는 사람, 진리와 선을 회복시키는 사람,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저 위대한 자연을 모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연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 속에서 잠자는 것이 아니라, 매시간 자신을 새롭게 수리하면서 우리에게 매일 아침 새날을 제공하고, 그 신선한 맥동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줍니다. (…)
개혁의 노력에서 스프링의 역할과 기준 역할을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 내부에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확신에서 그런 힘이 나옵니다. 얼마나 가치 있는가에 따라 그 힘이 생기고, 모든 구체적 개혁안은 결국 그런 가치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가장 높은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떤 사람이 땅 부자라고 해서 내 앞에서 부자 행세를 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런 느낌을 안겨주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부가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위로든 자부심이든 그 어떤 것으로도 나는 매수되지 않습니다. 비록 나는 땡전 한 푼 없고 당신에게서 빵을 받아먹을지라도, 당신은 내 옆에 서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어떤 여성이나 아이가 경건한 감정을 찾아내거나 나보다 더 정의로운 생활방식을 알고 있다면, 존경과 복종으로써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 생활방식이 통째로 바뀔지라도 말입니다.
--- p.136~139, 「개혁하는 인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