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병원 밖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리뷰 총점9.7 리뷰 22건 | 판매지수 1,248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4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436g | 140*200*17mm
ISBN13 9791160404708
ISBN10 1160404704

이 상품의 태그

세이노의 가르침

세이노의 가르침

6,480 (10%)

'세이노의 가르침' 상세페이지 이동

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

12,600 (10%)

'불편한 편의점' 상세페이지 이동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3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3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15,480 (10%)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3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상세페이지 이동

불편한 편의점 2

불편한 편의점 2

12,600 (10%)

'불편한 편의점 2' 상세페이지 이동

도파민네이션

도파민네이션

16,200 (10%)

'도파민네이션' 상세페이지 이동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15,300 (10%)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세페이지 이동

타이탄의 도구들 (블랙 에디션)

타이탄의 도구들 (블랙 에디션)

16,200 (10%)

'타이탄의 도구들 (블랙 에디션)' 상세페이지 이동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15,300 (10%)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상세페이지 이동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10,350 (10%)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상세페이지 이동

역행자

역행자

15,750 (10%)

'역행자' 상세페이지 이동

K 배터리 레볼루션

K 배터리 레볼루션

17,100 (10%)

'K 배터리 레볼루션' 상세페이지 이동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10,350 (10%)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상세페이지 이동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

16,200 (10%)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 상세페이지 이동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14,400 (10%)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상세페이지 이동

레버리지

레버리지

16,200 (10%)

'레버리지' 상세페이지 이동

백만장자 메신저

백만장자 메신저

16,200 (10%)

'백만장자 메신저' 상세페이지 이동

우리, 편하게 말해요

우리, 편하게 말해요

15,300 (10%)

'우리, 편하게 말해요' 상세페이지 이동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14,400 (10%)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상세페이지 이동

세상에서 가장 쉬운 본질육아

세상에서 가장 쉬운 본질육아

16,920 (10%)

'세상에서 가장 쉬운 본질육아 ' 상세페이지 이동

부자의 그릇

부자의 그릇

13,500 (10%)

'부자의 그릇' 상세페이지 이동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프롤로그

1. 찾아가야 보이는 세계
6분의 오디션
추억은 방울방울
멀미
매운 냄새
가까이 오래
가난하지 않다
서로 다른 시계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
대체 불가능한 사람
태장동 할머니(1)-내가 만난 숲
태장동 할머니(2)-거미줄
태장동 할머니(3)-구름의 발자국
숯이 놓인 방
두 가지 마술
말없이 하는 말
따듯한 통증
어둠 속에 있어야 보이는 것들
탁류 속 행복
날개를 감추다
빛나는 여백

2. 어른거리는 얼굴들
민 할아버지의 수난극
쓰잘데기없는 의사
코끼리는 움직일 수 있다
할아버지의 산나물
기적
산소통 없이
주스 한 잔
반성문
후배가 찾아왔다
사라진 구멍가게
메아리
병 주고 약 주는
질문합시다
요양원 풍경
마음의 속도
나를 잡은 항생제
월식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사람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10분
내 몸이 아플 때

3. 우리를 마중하는 세계
무통 사회
운이 좋다면 노인이 된다
간병을 거부할 자유
지역의사가 보는 ‘지역의사제’
싸움 이후의 시간
의사들의 힘이 나오는 곳
두 종류의 전문가
미세먼지 수치가 말하지 않는 것
황소개구리
혈당 54
오솔길에 대한 예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내릴 수 없다면
작은 공간의 행운
뚜껑 열리는 소리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면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600회가 넘게 어르신들의 집 문지방을 넘나들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목 디스크로 팔이 저린 김 할머니의 침실에서 너무 낮은 베개를 보았을 때, 허리 디스크로 다리를 들 수조차 없던 박 할아버지가 앉은뱅이 밥상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식사하는 걸 보았을 때, 무릎 관절염으로 오전에 통증주사를 맞고 온 송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방에 걸레질하는 걸 보았을 때 어르신들에게는 ‘집이 곧 병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p.13

처음 시내 인근 지역으로 왕진을 갔을 때는 그래도 집의 형태를 갖고 사는 분들을 만났다. 방으로 들어가는 번듯한 문도 있고 창문도 있고 간소하지만 부엌도 있는 그런 집.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방과 방의 경계선이 점점 사라졌다. 여기가 안방인지 부엌인지 거실인지 알 수 없었다. 먹다 남은 찬거리와 음식들이 펼쳐놓은 이부자리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집과 집 아닌 것의 경계선도 점점 사라졌다. 멀리서 보면 집인데 가까이서 보니 움막이었던 곳도 있었고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분들도 만났다. 컨테이너 옆에 간이 천막을 쳐놓고 부엌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이 되면 땡볕에 데워질 컨테이너 안이 벌써부터 걱정스러웠다. 그러다 마지막엔 제발 컨테이너라도 하나 장만하시라고 권유해드리고 싶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닐 포대 더미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곳이었다.
--- p.52~53

최 실장이 우스갯소리로 그랬다. ‘빈곤층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병원 직원들이 빈곤층’이라고. 백만 원 월급으로 네 식구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부터 파산 신청을 한 사람까지. 하지만 그 말을 하고 있는 최 실장도 병원에서 겨우 교통비나 타 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누군가 귀띔해줬다. (…) 돈 없는 환자에 돈 없는 병원.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는 내게 물었다. 만약 중환자실 입원 기간이 길어져서 입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감당할 수 있는가.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술을 못할 것 같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릴 용기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p.69

진료실에서 나는 환자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질환과 마주한다. 질환이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게 질문하고 청진하고 촉진하며 그것의 정체를 밝히는 데만 집중한다. 정체를 밝히는 데 성공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간혹 실패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실패에서 ‘사람’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궁금해할 여력도 없다. 진료실이라는 창백한 멸균 공간에 환자가 들어올 때 그는 자신의 맥락을 모두 버리고 들어온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곳에서 살고 무엇을 하는지와 같은 삶의 맥락은 진료실에 들어온 순간 모두 사라진다.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 p.88~89

촘촘히 싸놓은 신문지를 열어보니 산나물이었다. “양이 얼마 안 돼서 병원 직원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할 수가 없어갖고 병원에 못 들어가고 원장님을 밖에서 기다린 거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밖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셨다 한다. “이 귀한 걸 왜 저에게….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 거듭 인사하고 헤어져 주차장에 세워둔 내 차에 타려는데 멀찍이서 할아버지가 낡은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내가 가는 걸 지켜보고 계셨다. 너무 오래돼서 제대로 갈 수나 있을까 싶은 녹슨 자전거는 엔진을 장착한 상태라 그나마 가동이 가능한 듯 보였다. 갑자기 내 차가 낯설어졌다.
--- p.130~131

할아버지가 진료실을 나가면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내 가슴이 여자처럼 나와서 대학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다시 들어오시게 해서 확인해보니 여성형유방(gynecomastia)이었다. 이미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치료제(타목시펜)도 처방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남자의 가슴이 여성처럼 나오는 경우,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는 약물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전의 약들을 그대로 복용하고 있었다. 복용하는 약을 모두 가져오도록 했다. 여성형유방을 유발하는 약품 목록과 일일이 대조해보면서 원인이 될 만한 약들을 빼고 대체약을 처방했다. 시간을 보니 20분이 넘게 걸렸다. (…) 아마도 할아버지를 위한 20분 진료가 허락되지 않았을 대학병원은 약 부작용을 약으로 치료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실력 없는 의사보다도 시간 없는 의사가 더 많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처럼 시간이 많은 의사도 필요하다.
--- p.162~163

가래가 차서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의 가래 흡인을 부탁해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던 간호사. 생명징후가 흔들리고 산소포화도가 9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던 당직 의사. 호흡이 불규칙했던 아버지에게 다가가 청진을 해보거나 맥을 짚어주었더라면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의사에게 돌봄을 받고 있다 느끼고 가셨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런 의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야 장의사처럼 나타나서 사망 선고를 하고 가버렸다는 전공의. 그는 결국 그런 수련 과정을 통해 무엇을 체득하게 될까.
--- p.181

‘3, ·8, ·12, ·4, 9’ ‘5, ·11, ·4, ·9, 2’. 달력의 큼지막한 날짜 앞에는 알 수 없는 숫자가 깨알처럼 쓰여 있었다. 30년 넘게 당뇨를 앓아오신 김 할아버지는 콩팥 기능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하지 마비 상태였다.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 혼자 할아버지 병 수발을 몇 년째 해오고 계셨다. 임대아파트에 두 분만 덩그러니 살고 계셨다. “할머니, 달력의 저 숫자가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 그린비아 드신 시간이요.” 그린비아는 밥을 넘기지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캔으로 된 유동식이다. “그럼 숫자 앞의 점은 뭐예요?” “그때 혈당 쟀다는 표시요.”
--- p.205

병원 진료가 예약된 날은 아침 일찍 콜밴을 부르고 요양보호사가 오면 나갈 준비를 한다. 요양보호사는 할머니를 업어 콜밴에 옮겨 태운다. 할머니의 뼈는 귀한 도자기나 다름없다. 옮기다가 조금이라도 부딪히면 바로 골절된다. 오죽하면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싶어도 뼈가 부러질까 봐 못 한다고 요양보호사가 얘기할까. 대학병원에 도착하면 이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휠체어로 옮겨 탄다. 순환기내과에 갔다가 3분 진료, 내분비내과에 가서 또 한참을 기다려 3분, 다시 정형외과에 가서 또 3분, 그렇게 몇 분짜리 진료를 보기 위해 하루를 다 쓴다.
--- p. 218~219

대학병원에 인턴 수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파국적 상황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도 의대생들이 잘 알고 있다. 의대생들이 승리를 자신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 의료가 공공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의사들의 힘은 의료의 공공성에서 온다. 아무나 의사가 될 수 없어서 의사가 힘이 있는 게 아니다. 모두가 의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정부가 의사들에게 군 입대를 공중보건의로 대체할 수 있게 허용한 것도, 의대생들이 의사고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공공의료에서 일할 단 한 명의 의사가 아쉽기 때문이다.
--- p.228

나는 ‘의사 놈들’이 될 수도 있고 ‘의사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 아무런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에 갇혀서 오직 자신의 욕망, 자신의 고민만 들여다보는 사람. 그것이 내가 있었던 의사들의 세계다. 진료실은 의사를 자폐적 세계에 가둔다. 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둔감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다. 왕진을 갈수록 의사들의 진료실을 혁파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진료실이란 공간은 단순히 환자를 증상의 덩어리로 보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 하여금 환자들의 삶에 눈을 감게 만드는 눈가리개 역할도 한다.
--- p.283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좁은 길과 높은 언덕 넘어
질병 아닌 ‘사람’을 만나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환자와 의사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낀다.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 안에 들어서면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금방 얘기를 끝내고 나가줘야 할 것 같다. 의사는 좀처럼 환자의 얼굴을 보고 말하지 않는다. 환자보다 모니터의 차트와 사진을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짧은 진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왕진을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환자는 ‘한 사람’으로 자신의 삶 속에 앉아 있다.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 하나만 눈에 들어와도 그는 이미 특정 질환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의사에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과잉 진료나 3분 진료가 불가능하다. 왕진이 환자의 입장에서도 물론 필요하지만 의사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왕진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 진료실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절대 같은 의사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90쪽)
이 책의 1부 ‘찾아가야 보이는 세계’는 그 왕진이라는 경험이 알려준 ‘진료실 너머’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는 여든의 노인이 고작 ‘멀미’ 때문에 몇 년째 병원을 못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말로만 들었을 때는 의아했지만, 높은 고개를 넘어 실타래처럼 꾸불꾸불한 길을 지나다 속이 울렁거려 차를 잠시 세우고 나서야 저자는 노인을 이해하게 된다. 당뇨에 중풍, 치매까지 동반된 남편에게 아침저녁으로 인슐린 주사를 놔줘야 하는 아내는 눈이 침침해 주사기의 단위를 읽을 수 없고, 결국 저자는 이 노부부의 이웃에 사는 다른 당뇨 환자에게 할아버지의 주사를 부탁하고 나온다. 굳어진 무릎 관절 탓에 몇 년간 바깥 구경 한 번을 못한 할머니의 골방엔 지린내를 없앤다고 자식들이 갖다 놓은 숯이 덩그러니 있다. 이러한 삶의 맥락 속에 놓여 있는 환자를 의사가 그저 모니터 안의 차트가 말해주는 ‘질환’으로 치환하기는 어렵다.

“마을 주민들 간의 관계가 어떤지는 통증 주사를 놓아보면 대번에 안다. 통증 주사를 맞고 있던 신 할머니가 그런다. ‘여기 옆집 송 씨도 허리가 아파서 애를 쓰잖아. 허리 아프다면서 일을 할 건 다 해.’ 거기를 가보란 얘기다. 송 할머니 집에 가면 또 그런다. ‘이 위에 윤 씨 있잖아. 그이가 그렇게 무릎이 아픈가벼.’ (…) 서로가 서로를 돌봐준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_42쪽

‘의사 놈들’과 ‘의사 선생님’ 사이
어른거리는 얼굴들


저자가 의사 생활 내내 왕진만 했던 것은 아니다. 2부 ‘어른거리는 얼굴들’에서는 평범한 봉직의로 일하는 동안 마주쳤던 사람들, 고민했던 문제들, ‘의사 놈들’과 ‘의사 선생님’ 사이의 후회와 반성이 때론 격렬하게, 때론 담담하게 그려진다. “2분마다 환자가 들어오는 곳에서 정성 어린 진료를 하려면 인공지능 수준의 판단력과 부처님 수준의 마인드 컨트롤이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118쪽)고 저자는 말한다. 좋은 의사가 되려는 마음과 달리 한국 사회의 의료 현실은 그를 차갑게 시험한다. 진료실 밖에 환자들이 밀려 있을 때면 당장 앞에 있는 환자를 빨리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며 그는 괴로워한다. ‘의사로서 정말 이게 바닥일까.’ 하지만 그에겐 ‘어른거리는 얼굴들’이 있었다.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은 봄 산에 올라가 직접 딴 나물을 건네주는 할아버지의 딱딱한 손, 새벽부터 개천 주차장 구석에서 야채를 팔다 병원 문 열자마자 약을 타러 와서는 얼른 가봐야 한다고 재촉하는 할머니의 빠듯한 하루, 오르막길에서 당신 몸보다 더 큰 리어카를 두고 어찌할지 몰라 하는 노인들이 병원까지 걸어왔을 시간…. 저마다 고단한 삶을 살아내려 애쓰며 아픈 몸을 다독이는 이웃들의 풍경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게 만든다.
처음 의사 생활을 시작한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의 이야기도 나온다. 동문 모임에 가서 의료생협에서 일한다고 하면 “그게 뭔데요?”라는 시큰둥한 반응들이지만, 동일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들이 받는 것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으로 일한다고 말하는 순간 분위기는 반전된다. 차로 한 시간 넘는 거리를 일부러 찾아와 통증 치료를 받는 노부부가 복숭아를 보내줬다는 이야기에는 무반응이었던 이들이 갑자기 저자를 존경하는 듯 바라보는 것이다. 돈이 지배하는 병원이 싫어서 시작하게 된 일에 대한 가치도 돈으로 저울질되는 아이러니.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뜻’ 이전에 물질로 교환되기 어려운 행복으로 지탱된다는 걸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그리고 3년 후 원주의료생협은 전국에서 동일 질환으로 처방하는 약의 개수가 가장 적은 상위 5퍼센트 병원에 든다. ‘어른거리는 얼굴들’을 보지 못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역할인 것은 분명하다. 열은 떨어져야 하고 기침은 줄어야 하고 산소 수치는 정상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료실 안에서 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환자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듯 진료실 안에서 나 또한 의사로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픈 사람과, 그 아픈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또 한 사람이 진료실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질환에 대한 치료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때론 그 상호작용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환자에게 더 큰 의미가 되고 그럼으로써 의사 본인도 큰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한다.”_180쪽

세상의 중심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 고통, 보이지 않는 세계 쪽으로 움직여온 저자의 삶은 ‘공고한 엘리트?기득권 계층’이라는 의사에 대한 세간의 관념을 깨뜨린다. “환자들은 진료실을 나가도 환자로서의 삶이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의사의 역할은 진료실을 나가는 순간 끝나는 걸까.”(284쪽) 지금 여기의 공동체에 던지는 저자의 근본적인 질문은 3부 ‘우리를 마중하는 세계’에서 더 명료해진다. 사회적 고통에 대한 태도는 그 사회 자체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그는 말한다. 아픈 사람이 움직일 때 통증이 일어나는 부위에 온 신경을 집중하듯이 사회가 변화의 방향을 정할 때는 그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논쟁의 중심이 됐던 의사 파업과 의대생들의 고시 거부, 지역의사제 공론화 등을 바라보며 저자는 ‘밥그릇 싸움’ 이후의 시간에 대해 묻는다. 국가와 의료의 본질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의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힘이 시민들의 건강에 고스란히 연결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를 던진다.

“공공의료의 결여가 누군가에게는 추상적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고통이다. (…) 지난 수년 동안 할머니의 집을 방문한 사람은 최근의 나를 제외하면 딱 두 사람뿐이었다. 요양보호사와 이상한 사람(병원 브로커로 의심되는 그는 원하지도 않는 한의원 진료를 보게 해서 할머니를 화나게 만들었다). 행정 계획을 세우는 이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와서 현장을 보는 일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골집에 갇혀 누워 있는 분들의 목소리는 결코 복지 공무원의 책상머리까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_219~220쪽

한 사람의 건강을 넘어 한 사회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아 나서는 저자의 일상은 시민사회 곳곳으로 넓어지는 동시에 ‘가장 아픈 곳’으로 수렴되기를 반복한다. 생활방사능 문제로 시청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골프장 반대 농성을 위해 도청 앞에서 밤새 천막을 지킨다. 아파트 동대표에 홀로 입후보해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최저임금 문제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의사의 길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는 막다른 골목에 낙심하다 이웃의 손길 하나에 다시 일어서고, 또다시 한계를 실감하는 순간 슬픔에 잠기다가도 ‘마음이 있으면 길은 보인다’고 믿으며 왕진가방을 챙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웅크린 아픔이 있듯 보이지 않는 마을에 이런 의사가 있다. 사랑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는 것들이 떠나간 듯한 시대,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는 사랑과 인간을 믿는 한 의사가 ‘평범한 이웃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다.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하루에도 몇백 명이 오가는 진료실에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좁은 공간에만 앉아 있는 내가 당신들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생각. 주 증상과 내원 경위를 적고 문진과 신체 검진을 마치면 첫 번째 진단명이 나온다. 의심되는 질환과 검사를 안내하고 투약을 지시하면 내 일의 대부분은 끝난다. 내가 물어야 하는 것은 그 서류 안에만 있다. 그 사람이 누구의 가족이고 최근 어떤 일을 겪었으며 어떤 감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저자는 끝내 진료실 바깥으로 떠난 의사다. 자신이 당면하는 환자들을 직시하기 위해서. 왜 어떤 사람은 한 뼘의 병원 문턱조차 넘을 수가 없는가. 왜 진료실로 찾아온 사람들은 충분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가. 바깥세상에서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는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여정을 자처했다. 그리고 끝내 그가 만난 환자들은 증상으로 치환되는 서류가 아니라 진짜 고통받는 ‘인간’이다. 아픈 사람, 더 약한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만 한 평 반 진료실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가 좁은 길과 높은 언덕을 넘어 마주하는 문장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나는 조금의 참회도 반성도 없이 매일 가운을 입었다.
그가 찍은 마침표에서 그가 도달한 후회와 진실에 조금이나마 동참할 수 있다. 그렇게 진짜 삶의 체험기를 엿보다 보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쓴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참회록이다. 나는 읽는 내내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작가)

회원리뷰 (22건) 리뷰 총점9.7

혜택 및 유의사항?
세상의 중심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w******s | 2023.04.24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나는 마을에 가방 들고 아픈 사람들 집을 방문하는 왕진의사가 있으면 너무 좋겠어. 그러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놓일까?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닐 것 같고” 미국에 사는 언니와 통화하면서 내가 했던 말이다. 17살 차이가 나는, 함께 나이 들어가는 언니와 통화를 하다보면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수다를 떨게 된다.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사람들과 삶을 나;
리뷰제목

나는 마을에 가방 들고 아픈 사람들 집을 방문하는 왕진의사가 있으면 너무 좋겠어. 그러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놓일까?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닐 것 같고

미국에 사는 언니와 통화하면서 내가 했던 말이다. 17살 차이가 나는, 함께 나이 들어가는 언니와 통화를 하다보면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수다를 떨게 된다.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사람들과 삶을 나누다가 떠날 것인가에 대해.

내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엔 발전이라는 막강한 힘에 부서져버린 과거의 것들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청진기가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마을을 돌던 왕진의사라는 존재 역시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얼마 전 책을 통해 현실의 왕진 의사를 만났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의 저자 양창모 씨이다.

일반적으로 병원은 짧은 진료시간과 과잉처방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는다. 그야말로 의료산업이다. 그에 반해 그는 최소한의 처방과 최대한의 상담을 진료 원칙으로 삼고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처음 만나는 환자들에 대한 반가움이 줄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침 그 때, 수몰된 농촌 지역에 왕진하는 일을 제안 받고 왕진의사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꼬불거리는 산길을 차로 한 시간 걸려서 가고, 할머니가 내주신 식혜를 마시는 쓸데없는 과정을 거치며 그는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이 환자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던 것은 너무 손쉽게 만났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속도가 돈이 되는 진료실 안에서는 가급적 빨리 간단하게 만나야 하는데, 바로 그 효율성이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음을.

하반신 마비인 사람과 두 다리 멀쩡한 사람이 만나야 한다면, 누가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 그는 묻는다. 답이 너무나 명확한 질문인 것 같은데, 현실은 그 답과 정반대이다. ‘6시 내고향만 봐도 의사의 한 마디 말과 처방약을 위해 아픈 허리와 다리를 이끌고, 하루에 몇 번 없는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할머니들을 매일 보게 된다.

왕진의사로 살기 이전 그는 의료생협에서도 일을 했다. 의료생협은 지역 주민들 스스로 건강을 지키기 위해 만든 비영리기관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보통의 의사들에 비해 훨씬 적은 월급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생협 설립의 목적이 있기에 3분 진료, 과잉처방과 같은 고질적인 문제들은 최대한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제주에서도 앞으로 이와 비슷한 조직이 만들어질 움직임이 있는 것 같은데, 응원을 보내고 싶다.

저자가 일했던 의료생협에서도 보통 병원에선 보기 힘든 이야기와 관계와 마음들이 있었다. 손가락 관절염 증세인 듯한 할머니가 찬물로 계속 손빨래를 하시는 것을 알고, 생협 게시판에 중고 세탁기 구하는 글을 올려서 할머니에게 드리는 의사, 월세 5만원 방에 사시는 70대 할머니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함께 나선 생협 구성원들. 저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해도 이 세상에 대한 그분의 마지막 기억이 쓸쓸하지는 않게 해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한 분은 병원 밖에서 퇴근 시간이 되도록 1시간을 기다리다 신문으로 싼 산나물을 저자에게 쥐어주셨다. 낡은 자전거를 끌고 가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자는 이렇게 어렵게 나물 캐서 번 돈으로 우리 병원에 다니고 계셨구나’, ‘그 돈으로 나는 자동차를 샀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약의 오남용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위협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약 복용에 대해서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1년에 한두 번 건강상담을 위해 오시는 할아버지가 지나는 말로 가슴이 여자처럼 나와서 대학병원에 다녀왔고, 약도 처방받았다고 하셨다. 이런 증상의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가 약물이어서, 복용약 모두를 갖고 오시게 했다. 원인이 될 만한 약들을 빼고 대체약을 처방했고 여성형 유방 치료제도 복용하지 않게 했는데, 석 달 후 오셔서 다 좋아졌다고 하셨다.

이렇게 복용약 모두를 살펴보고 처방을 내리는 데 20분 넘는 시간이 걸렸다. 20분 진료가 불가능한 대학병원은 약 부작용을 약으로 치료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실력 없는 의사보다 시간 없는 의사가 더 많은 세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보다 약을 훨씬 덜 쓰는 미국도 전체 입원 환자 중 3.4%가 약 부작용으로 입원을 한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약물의 효과가 서로 엉키는 것인데, 한국 노인 중 열에 아홉은 절대 함께 복용해서는 안 되는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대책은 평소 복용하는 약의 처방전을 찍어두고, 다른 병원에 갔을 경우 이 처방전을 의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의사가 집까지 찾아오는 황송한 상황을 바라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더라도, 애써 찾아간 병원의 풍경이 이럴 수 있다면 참 따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어졌던 환자들의 삶에 한 발 더 다가가고자 저자가 택한 꼬불꼬불 왕진 길에는 당연히도 더 깊은 삶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슬프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던 장면을 옮겨본다. 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깊은 골짜기의 할머니 댁에서 나눈 대화이다.

할머니, 옆집에 사시는 분 있어요?”

, 애가 하나 살아.”

이야, 이 산골에도 애가 있어요? 몇 살인데요?”

, 아마 일흔 정도 됐을 걸?” 할머니의 연세는 아흔 셋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시골들은 나이 들어가고 있다.

왕진을 가는 시간 대부분은 슬픈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라고 그는 말한다. 축축하게 다 떨어져가는 벽지, 솜덩어리를 대충 싸놓은 베개, 수신 불량 티비,... 표정도 생기도 없던 얼굴이 자신들을 보자 1~2초만에 밝아지는,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의 기적을 종종 만난다. 두 분 다 아픈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를 챙기는 80대 노부부의 모습에선 따뜻한 통증을 느낀다.

마을의 이웃 관계가 살아있는 곳에서는 통증 주사를 맞으면서 옆집 이웃도 허리가 너무 아파서 큰일이라는 얘기를 왕진 의사에게 전한다. 한 번 돌아봐달라는 이야기다. 어느 마을은 연극인 공동체가 폐교에서 살아가면서 매주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공연을 한다. 그곳 할머니들은 무척 생기 있고 빛난다.

마을이 살아있으면,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그만큼 살만해진다. 그러나, 그동안 서로가 서로를 돌보던 마을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듯 어르신 한 분을 건강하게 지키는 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읽는 동안 따뜻했고 아팠고 슬펐고 부러웠다. 저자는 세상의 중심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생각이 있었기에 왕진의사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겠지 싶다. 지금은 시범사업으로 왕진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하는데, 전국의 마을 곳곳에서 왕진가방을 든 의사가 고통 받는 사람을 찾아가는 날을 기대해본다.

댓글 0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누구의 희생도 담보하지 않는 의료시스템을 만들어 나가자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p*****s | 2021.06.29 | 추천2 | 댓글0 리뷰제목
  각종 건강염려증, 건강정보, 건강식품, 신비한 완치체험 등등을 믿지 않는 지라 ‘아프면 의료면허가 있는 의사가 진료하고 치료하는 병원에 간다’는 질환에 관한 나의 유일한 상식이고 태도이고 해법이다. 판데믹 시절 백신 개발에 대한 어려움과 과정이 자세히 보도되는 미디어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제야 온갖 의학 미신들이 사멸하고 의학과학적;
리뷰제목

 

각종 건강염려증, 건강정보, 건강식품, 신비한 완치체험 등등을 믿지 않는 지라 ‘아프면 의료면허가 있는 의사가 진료하고 치료하는 병원에 간다’는 질환에 관한 나의 유일한 상식이고 태도이고 해법이다. 판데믹 시절 백신 개발에 대한 어려움과 과정이 자세히 보도되는 미디어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제야 온갖 의학 미신들이 사멸하고 의학과학적 사고방식이 득세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이 기대대로 잘 구현된 사례가 드물다는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 상황이 어떤지는 다들 아시니까 구구절절 보고는 넘어간다.

 

그러니 내가 보는 세상은 의학과학을 신뢰하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나 일부러 한 짓은 아니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염두에 두지 못한 세상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우고 배운다. ‘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상식을 따를 수 없는 이들. 병원에 도착하지 못하는 아픔. 통증보다 더 어렵고 힘든 병원 가는 여정. 열 장도 못 읽고 일단 조금 울었다. 반성과 감동과 안타까움과 속상함과 무심함과 안도와 기타 등등이 섞인 눈물이 났다.

 

“목 디스크로 팔이 저린 김 할머니의 침실에서 너무 낮은 베개를 보았을 때, 허리 디스크로 다리를 들 수조차 없던 박 할아버지가 앉은뱅이 밥상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식사하는 걸 보았을 때, 무릎 관절염으로 오전에 통증주사를 맞고 온 송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방에 걸레질하는 걸 보았을 때.”

 

아주 오래전 진폐증으로 병원을 오는 광부들을 치료해주던 의사가 똑같은 병이 재발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환자들을 돌려보내면서 약을 처방해주기만 하는 자신에 대해, 의료방식의 한계에 대해 무척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일도 떠올랐다. 한 개인이 괴로워하는 것 말고 뭘 더할 수 없게 두는 사회가 함께 원망스러웠다.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방과 방의 경계선이 점점 사라졌다. 여기가 안방인지 부엌인지 거실인지 알 수 없었다. 먹다 남은 찬거리와 음식들이 펼쳐놓은 이부자리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집과 집 아닌 것의 경계선도 점점 사라졌다. 멀리서 보면 집인데 가까이서 보니 움막이었던 곳도 있었고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분들도 만났다.”

 

“돈 없는 환자에 돈 없는 병원.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는 내게 물었다. 만약 중환자실 입원 기간이 길어져서 입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감당할 수 있는가.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술을 못할 것 같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릴 용기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600회가 넘는 왕진을 통해 한국에서 남의 집을 가장 많이 드나든 의사 중 하나’가 된 저자가 왕진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찰을 이렇게 56편의 글로 만들어 주었다. 의사가 아픈 사람 만난 이야기일 뿐인데 56번 울컥한다.

 

“진료실에서 나는 환자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질환과 마주한다. (...) 정체를 밝히는 데 성공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간혹 실패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실패에서 ‘사람’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궁금해할 여력도 없다. 진료실이라는 창백한 멸균 공간에 환자가 들어올 때 그는 자신의 맥락을 모두 버리고 들어온다. (...)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아마도 할아버지를 위한 20분 진료가 허락되지 않았을 대학병원은 약 부작용을 약으로 치료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실력 없는 의사보다도 시간 없는 의사가 더 많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처럼 시간이 많은 의사도 필요하다.”

 

여력이 없다는 글이 핵심이다. 진료대기표를 볼 때마다 절감하는 문제이다. 보호자로 진료실 문 밖에 앉아 나는 진료실 안의 풍경에 난감한 기분이 들 때도 여러 번이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진료 시간에 대기명수를 보면 일인당 배정된 시간 계산이 되기 때문이다. 꼼짝 못하고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여타의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의사들의 근무환경은 모두의 처지를 안타깝고 불편하게 한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야 장의사처럼 나타나서 사망 선고를 하고 가버렸다는 전공의. 그는 결국 그런 수련 과정을 통해 무엇을 체득하게 될까.”

 

가족 친지 중 의료인이 세 명이다. 심장 외과와 응급 의학 분야이니 소위 상대적으로 편할 수도 있다는 분야도 아니다. 보고 들은 일들로 짐작하건대 20살이 되자마자 의학서적을 독파하는 방식으로 학습하고 전문의가 될 때까지 테스트를 치러야하는, 소위 교양과정조차 허락하지 않는 교육시스템은 옳지 않다. 30살이 훌쩍 넘어 어느 날 ‘직업 이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휴가는 어떻게 보내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상담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생각해보라는 말 이외에 해줄 말이 없어 몹시 난감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무런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에 갇혀서 오직 자신의 욕망, 자신의 고민만 들여다보는 사람. 그것이 내가 있었던 의사들의 세계다. 진료실은 의사를 자폐적 세계에 가둔다. 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둔감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다. (...) 진료실이란 공간은 단순히 환자를 증상의 덩어리로 보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 하여금 환자들의 삶에 눈을 감게 만드는 눈가리개 역할도 한다.”

 

현직 의사로서 저자가 제안하는 두 가지 해법을 소개한다. 첫째, ‘의사들의 왕진 제도화.’ 왕진 수가를 현실화하고왕진 주체를 공공의료 영역으로 바꾼다방문진료 전담 센터를 만들고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둘째, ‘고령층의 정치세력화.’ 일상적인 요구를 정치화할 수 있는 어르신 정당이 절실하다.

 

“대학병원에 인턴 수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파국적 상황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도 의대생들이 잘 알고 있다. 의대생들이 승리를 자신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 의료가 공공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 모두가 의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정부가 의사들에게 군 입대를 공중보건의로 대체할 수 있게 허용한 것도, 의대생들이 의사고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공공의료에서 일할 단 한 명의 의사가 아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당하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온갖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가족 간병과 관련된 제안을 소개한다. 가족의 간병을 묵인하고 방치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비겁하고 비열한 사회이다. 부정적 결과로 발생한 사건을 두고 가족애니 효도니 그 따위 수준의 망발은 부디 누구라도 삼가길 바란다.

 

가족들에게 간병하지 않을 자유를 주지 못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사회다.

우리에겐 가족을 간병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그 권리를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가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

내가 그를 간병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그를 간병해줘야 한다.

만약 내가 간병을 선택한다면

사회가 치러야 할 공동체의 비용을 아무런 조건이나 장벽 없이 나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래야만 선택할 수 있다.

간병 받는 사람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인이나 가족의 '간병하지 않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간병을 거부할 자유는 간병할 자유, 간병 받을 자유와 같은 말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치료받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삶, 이 중요한 공간과 시스템에 대한 치열하고 심도 있고 실용적이고 선한 의도를 가진, 무엇보다 ‘누구의 희생도 담보하지 않는’ 방식의 논의와 대안과 정책을 기대한다.

 

“나는 무관하다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 나는 늘 믿어왔다. 한 사람의 이웃이 국가보다 중요하다고. 그렇다면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이웃이 되면 안 되는가. 그런 질문들이 길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며 나는 다시 왕진가방을 챙긴다.”

 

 

 

 

댓글 0 2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2
구매 괜찮습니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줄* | 2021.05.25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지인의 추천으로 구매하게 된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당연히 병원에 가야한다고 알고 간다. 그게 상식이다. 그러나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는 것이 아파서 병원에서 진찰 받는 것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 교통상의 여건이든 경제적이든 소외된 이들이다... 56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낫게하는 비법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
리뷰제목

지인의 추천으로 구매하게 된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당연히 병원에 가야한다고 알고 간다.

그게 상식이다.

그러나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는 것이 아파서 병원에서 진찰 받는 것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

교통상의 여건이든 경제적이든 소외된 이들이다...

56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낫게하는 비법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통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전공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600회가 넘는 왕진을 통해

한국에서 남의 집을 가장 많이 드나든 의사 중 하나가 된 저자는

치열한 성찰과 따뜻한 시선으로 써 내려간 56편의 글을 통해 말한다.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질병’이지만 왕진에서 마주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댓글 0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한줄평 (5건) 한줄평 총점 10.0

혜택 및 유의사항 ?
평점5점
환자의 생활모습까지 보고 처방하는 진짜 의사!
이 한줄평이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s****a | 2022.01.26
평점5점
약이나 주사를 잘 쓰는 의사와 병을 잘 고치는 의사는 결코 같지 않다.
이 한줄평이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2* | 2021.05.02
구매 평점5점
잘 읽었습니다.
1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1
YES마니아 : 플래티넘 줄* | 2021.05.01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12,6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