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이 책의 처음에 적힌 필립 라킨의 시 한 줄을 끝으로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여기 실린 세 편의 소설을 끝으로 우리의 일상은 계속된다. 그래 한쪽. 눈을 뜨면 옷장만큼이나, 언제나, 굳건히, 눈앞에, 서, 있는, 그것. 소설을 빌리자면 크게 그것은 흙과 불과 물일 것이고, 작게 그것은 남자와 여자와 인간의 외로움, 실망일 것이다. “분필과 치즈만큼이나 전혀 딴판”인 한쪽의 이야기. 한쪽이 사라져야 한쪽이 살아나는 이야기. 이거 너무 단순한 구조 아닌가 해도 클레어 키건의 터치는 그 컬러를 흑과 백이 아닌 회(灰)와 회로 붓칠하는 데 능숙함이 있고, 이거 너무 자명한 사실 아닌가 해도 키건의 필치는 그 사유를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게 하는 데 탁월함이 있다. 작가는 말한다. “수신자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똑같은 산더미 같은 편지를 쓰는 일”이 삶이라고. 지루한가. 따분한가. 하여 온통 잿빛인가. 그럼에도 저기 매일같이 출퇴근하는 사람이 있고 글쓰기의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고 밥과 빨래를 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극히 평범한 그들이 더없이 성실한 이유는 “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아는 사연일 터다. 그냥 너무 현실적이라고? “우리 둘 다 앞으로 젊어질 것”은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