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단편소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로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 우수상을, 같은 해 장편소설 『시프트』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장편소설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스노볼 드라이브』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입속 지느러미』 『적산가옥의 유령』, 연작 소설 『꿰맨 눈의 마을』, 단편소설 『만조를 기다리며』 『토마토로 만들어줘』, 짧은 소설 『초승달 엔딩 클럽』 등을 썼다. 2025년도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1위 하였다.
소설을 쓸 때면 아주 질은 흙으로 집을 짓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튼튼한 집을 바라는 마음이 커질수록 손안의 재료는 더욱 물렁해집니다.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새 나가는 이 고운 물질을 어떻게 다뤄야 하나. 일단 쌓자. 그렇게 쌓고 쌓은 후에는 얼마나 굳히고 다듬어야 할지 까마득해지고, 가끔은 나 혼자 별 의미 없는 걸 만들겠다고 용을 쓰는 건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제가 무언가 만드는 행위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동력이 된다면, 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연료가 필요하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그럴 때마다 떠올리는 몇몇 장면과 얼굴들이 있습니다. 거창한 이유나 욕심에서 벗어나 단지 ‘좋음’의 힘을 복원시켜주는 순간들이요. 이번 여름도 그런 귀한 기억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은 소감문에 감사하다는 말만 천 번을 적고 싶었어요. 맨 마지막 감사합니다 옆에는 ‘x1000’이라고 적고요. 그래도 부족하기만 하네요. 이만큼 유치하고 단순한 제가 입체감을 가질 수 있는 건, 오로지 읽어주시는 여러분 덕분입니다. 천 번을 적지는 못하겠지만, 감사합니다. 무더위 속 무한함을 담아. - 2025 젊은작가상 수상소감
한 권의 책으로 이토록 깊고 섬뜩한 공간감을 체험할 수 있다니. 《2120》은 백룸 호러의 정수다. 매 순간 주어지는 선택지를 따라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앞에서 뒤로 향하는 선형적인 독서에서 벗어나 뒤틀린 시공간을 이리저리 헤매는 기분이 든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안이 피어오르지만 탈출구를 찾을 때까지 멈출 수 없다. 혼란은 인물이 아닌 나의 것이 되고, 시종일관 원색의 색감과 간결한 선으로만 표현된 일러스트가 기괴함을 더한다. 이 미궁을 걷는 내내 심장이 조여오는 감각이 함께할 것이다. 진실과 해방은 오로지 탈출구에 있다. 책을 덮으면 끝난다고, 정말 그럴까? 당신의 의식 일부는 어쩌면 그곳의 지하실에 남아 끝없이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늘 누군가 자신을 맞아주고, 라디오 음악 소리가 들리던, 생기 넘치던 시절이. 집에 돌아와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는 게 이리도 두렵지 않은 일이었다니. 죽어가는 눈을 보지 않는 게, 살아 있는 눈을 보는 게 이렇게 심장 뛰는 일이 었다니. 그것이 비록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P.37 중에서
정현은 교묘하게 날 평가했다. 주로 좋은 말을 먼저 건네며 이전의 차림들을 깎아내리는 식이었는데, 당장 코앞에서 칭찬하는 이를 두고 화를 내기도 뭐한 일이었다. 기분이 좋은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전에 입었던 옷들을 다시 입어 보며 어느 부분이 어떻게 별로였는지, 나의 몸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했다. 그러다 보면 이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입던 옷이 나의 단점만 부각하는 우스꽝스러운 옷처럼 느껴지곤 했다.
전공은 조소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손에 줄 수 있는 날카로운 도구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 도구들의 뾰족한 끝을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가를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한 치의 흠집도 없이 놓인 푸딩이나, 고운 두부를 마구 뭉개고 싶어지는 충동과 닮았다. 가끔은 그것으로 내 턱 끝에서 쇄골까지를 주욱 갈라 버리고 싶기도 했다.
이상하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같은 건 아주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지금 숨을 쉬고 있느냐, 그뿐이며 아무도 숨을 뱉어내는 인간의 속을 세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궁금해하지 않는 인간의 삶은 지루하다. 그 와중에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기는 했다. 카메라 속 사진들. 매끄러운 네모 속에 그저 그렇게 나열된 장면들. 나는 변할 일 없는 그 안쪽 세상을 때때로 그리워하고, 또 궁금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