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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시작 1 이창 2 찬과 란 3 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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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는 불길해.”
란은 중얼거리며 폐건물의 녹슨 철문을 밀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차가운 공기와 비릿한 물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제야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했다. 문 뒤에 펼쳐진 피바다와 자신이 안고 있는 피범벅의 아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아이의 무게와 온기는 현실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 p.11 사흘 뒤, 인적 없는 해변의 폐건물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신고자는 어른들 몰래 데이트를 하려던 고교생 커플이었다. 변사체는 피 웅덩이 한가운데 반쯤 잠겨 있었다. 얼굴 한쪽은 괴사되었고 전신에 크고 작은 타박상이 가득했다.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한 상태였다. 옆에는 날이 고르지 않은 식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 p.13 “소름 끼치는 게 뭔 줄 아나?” 노인의 허연 수염에서 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뚝뚝 떨어졌다. “교주 아들을 죽인 놈, 그놈이 잡힌 지 얼마 안 돼서 병으로 죽었어.” “병?” “그래! 병 걸린 자식새끼 때문에 신자가 되긴 했어도 오장육부는 멀쩡한 사내였거든. 그런데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대. 그것도 심근경색이나 뇌출혈 같은 급성질환이 아니라 주로 애들이 걸리는 희귀병이었어.” ‘방화 살인범이 갑자기 희귀병으로 죽었다고?’ --- p.28 어두운 거리에 발을 내딛자 심야의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이 도시의 공기에는 항상 바다의 기운이 스며 있다. 그 일상에 밴 비릿함이 좋기도 싫기도 했다. 란은 종종 생각했다. 아주 끈적하고 비린 것이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심지어 생생히 느껴지지만 손에 쥘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면? 아마 순응하는 수밖에 없을 테다. 이 밤의 축축함처럼. --- p.34 찬은 누워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이내 자신의 다리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스륵 빠져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형상이었다. 그것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묶여 있는 아이에게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찬의 콧잔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 p.121 란이 크게 심호흡했다. 능력을 쓸 때마다 긴장이 늘 따라왔다. 종종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아 당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지만 예외는 없었다. 곧 익숙하지만 불쾌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양팔은 신체와 신체를 연결하는 터널이 되었다. 채린의 병은 박용석과 달리 표면적으로는 형태가 없었다. 채린에게서 젤리 같은 모양을 한 기분 나쁜 덩어리가 뭉텅 빠져나왔다. 오래전, 찬이 신도들의 병이 각각 어떤 형상을 띄었는지 말해준 적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양과 색은 다들 제각각이며 그림자 같을 때도, 연기나 진흙 덩어리처럼 보일 때도 있다고 했다. --- p.235 |
“그 애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끈적하고 비릿한, 몸에 달라붙어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저주이자 기적에 관한 이야기 인적 드문 해변의 폐건물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피 웅덩이 한가운데 반쯤 잠겨 있던 변사체는 얼굴 한쪽이 괴사된 채로 전신에 멍이 가득했다. 단서는 날이 고르지 않은 식칼 한 자루뿐. 사건을 담당한 형사 이창은 한 사람이 흘렸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혈액의 양과 갑자기 발병한 것으로 보이는 말기 피부암 등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음을 느낀다. 현장에서 발견한 증거를 토대로 사건을 조사하던 이창은 이번 살인과 자신이 오랜 시간 추적해 온 과거의 어떤 사건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실마리로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청년 ‘란’의 존재가 드러난다. 쫓고 쫓기는 사투 끝에 란과 마주한 이창은 고통을 옮기는 그의 특별한 능력을 목격하게 되는데. 자신의 능력이 기적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다며 절규하던 란은 기묘한 살인사건 뒤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 온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 천천히, 그러나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한다. 강렬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조예은 월드’의 시작!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등을 통해 고어하지만 희망찬, 귀엽지만 잔혹한, 무섭지만 애틋한, 섬뜩하지만 경쾌한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히 구축해 나가는 작가 조예은.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수상작인 『시프트』는 ‘조예은 월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장편소설이자 강렬한 상상력의 출발점이다. 작가는 2017년에 출간한 첫 장편작의 문장과 표현을 새로 다듬으며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의 작업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괴롭다는 걸 실감’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작품을 다시 마주하며 ‘신기하게도 그 고통의 감각에서 묘한 위로를 얻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작가의 장편 데뷔작 『시프트』에는 다양한 변주를 즐기는 ‘조예은이라는 세계’가 탄생하기 직전의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새로운 상상력을 마주할 수 있다. 또한 끈적한 젤리의 촉감,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움직임, 초자연적 현상, 불길한 분위기와 현실적인 묘사 등 조예은 월드의 시작점이 곳곳에 녹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