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들은 오히려 입 밖에 냄으로써 스스로 그것을 진심으로 믿게 되어버리기도 한다.그전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던 것들이 오히려 발화를 통해 명백해져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나의 명백한 진심인 것도 아니다.-책임의 범위는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했던 말이 기어코 나에게로 되돌아오고야 말았다.-속상하고 화도 나지만 노인네들 앞에서는 입을 다물게 되기 마련이었다. 사는 방식이 그거 하나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이니까.어지간한 일은 참고 견뎠고 애써 모른 척했다.하지만 마음속에서 완전히 잊히진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한편에 켜켜이 쌓인 부정적인 감정이 일하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선뜻 다정해지는 것이 어려웠고 가볍게 웃어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돌보는 할머니들을 사랑한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그 이유는……그러지 않으면 이 일을 지속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희지야, 자꾸 반복해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건 네 업무 역량에 하자가 있는 거야."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하자'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원한다면 내 업무 프로세스를 교정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건 진심어린 호의였다. 무사히 사회에 적응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탄 친구의 피드백.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사회 속에 무사히 편입되지 못한 채 그 주변을 겉도는 사람이라는 걸 아주 잘 인식하게 되었다.-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한 기분, 모멸감 같은 것들은 도대체 어떤 회로를 거쳐야 다스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모든 일에 진심을 다했지만 그럼으로써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은 도무지 몰랐던 것 같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취약한 부분을 너무도 쉽게 들키고야 말았다.누구도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도록 나를 지키는 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나는 그저 내가 가진 최소한의 것들만을 지키고 싶었는데. 영주와 함께하는 자취방에서의 생활과 내 작고 높은 자부심 같은 것들. 그렇게 생각하며 샐러드 그릇을 설거지하다가…… 문득 내가 지키고자 했던 그 최소한의 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할머니, 전화번호 아직 못 외웠죠?""그렇지.?""내일 또 외우는 거예요.""그래, 알았다.""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그렇게 말하고 할머니가 별다른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나름대로 할머니와 나 사이에 어떤 의의를 두고 싶었다. 함께 할 일을 만들면 결국은 같이 무언가를 하게 된다는 그 단순한 흐름이 우리 사이에 지속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문득 할머니의 휴대폰에 내 이름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했다.전화번호부 앱에 들어가보니 '희지'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마치 백지처럼.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담백한 나의 이름, 희지. 나는 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즐거운 일들이 아주 많이 떠올랐다.예소연 <아무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