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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춘당 귀녀회
뱅가니갱 : 자주색 여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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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 세트장 풍경 속에서 눈을 떴다.
“정신이 드느냐?” 양반집 마님 분장을 한 중년 여성이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얘, 광년아, 괜찮냐고 묻고 있다. 아이고, 광년아…….” 누구지? 유명 배우는 아닌 것 같았다.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로 세트장에 들어왔는데, 대본도 없는 데다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다. 나는 몸을 일으킨 뒤 곁눈질로 주위에 카메라가 있는지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마님 역 배우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제 이름이 광년입니까?” 마님이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미친년이라고 욕을 한 것이야. 넋 나간 며느리에게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한다니, 말년에 이 무슨 전생의 업과를 치르는지 모르겠구나.” “아하…….” (…) “어, 어머님? 제 이름이 무엇인가요? 광년이라는 별명 말고…….” “이름까지 잊다니, 네가 죽을 날이 가까운 모양이다. 아가, 네 이름은 ‘며느리’다.” --- pp.8-10, 「옥춘당 귀녀회」 중에서 갑작스러운 일들에 휘말렸다. 복귀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내가 모 영화에 캐스팅됐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아역 출신 배우의 과감하고 도전적인 베드신이라며 찍지도 않은 영화가 연일 화제를 일으키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대책 없이 구역질이 치밀었다. 딥페이크 영상이었다. 조작 의도가 뻔한데 왜 화제가 될까. 세간의 화제란 건 어떤 힘이 만들어 내기에 누군가에겐 이토록 속수무책인 걸까.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동료가 몰래 나를 촬영한 사진이 신문기사로 공개되었다. 자기들과는 무관하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내 일에 흥미를 가졌다. 사람들은 아역 출신 배우가 성인이 되자마자 베드신을 찍는 것이 과감한 도전인지 결단인지, 혹은 퇴폐적인 추락인지 논했다. 그렇게 상세하게 언급할 바엔 이 일로 누가 돈을 버는지나 논해 줬으면 했지만 그건 과한 기대였다. ---pp.63-64, 「옥춘당 귀녀회」 중에서 둔탁한 타격 소리가 허공에 강하게 울렸다.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고빈드라의 손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고빈드라의 왼손 위로 은은하게 내려온 달빛을 흡수한 듯,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약지의 금색 반지가 원을 그리며 궤적을 멈췄다. (…) 얼마 후 샨티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가서 힘겹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두 시간 정도의 자유가 샨티에게 주어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샨티는 피식 웃었다. 고작 두 시간. 그것도 흠씬 두들겨 맞고 겨우 받아 낸 자유라니, 이런 게 폭력의 대가라니. 하지만 이제 무뎌진 지 오래였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언제 처음 했는지도 기 억나지 않을 정도니까. “원래 이 마을 사람들, 이 마을 여자들은 늘 그렇게 살아왔다. 너만 힘든 게 아니야. 유난 떨지 마라.” --- pp.138-140 「뱅가니갱 : 자주색 여자들」 중에서 고빈드라가 연설을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고빈드라 너머 다르마 세나 당의 상징이 그려진 커다란 가림막을 향해 있었다. 기이한 모양으로 꿀렁거리는 그 천막의 윗부분에, 길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톡 튀어나와 있었다. “저거, 칼 아니야?” 누군가 먼 곳에서 외쳤다. 그렇다, 그건 분명 칼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번쩍대는 긴 칼이 주황색 천의 한가운데를 찢으며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즈즈즈즉 하는 기괴한 소음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귓가에 꽂혔다. 주황색 천이 두 동강 난 자리 사이로 강렬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제야 연단에 서 있던 고빈드라가 뒤를 돌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고빈드라와 그 옆에 앉아 있던 고위급 인사들은 장막 틈새로 쏟아진 빛 때문에 일제히 미간을 찌푸렸다. 가까스로 눈을 뜬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건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펄럭대는 자줏빛 사리, 아니 햇볕을 받아 더없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듯한 자주색 사리 자락을 흩날리며 칼과 도끼, 그리고 커다란 막대기를 든 여자들이었다. --- pp.133-134 「뱅가니갱 : 자주색 여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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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춘당 귀녀회」
가상현실을 부수고 나온 NPC 여자들의 통쾌한 반란 소속사 사장을 폭행했다는 모함을 받아 징역형을 선고받은 한물간 아역 출신 배우 나(오엘)는 ‘과거 재현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 사회봉사 시간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디션을 보게 된다. 나는 오디션 자리에서 조선 시대극의 ‘광녀’ 역할로 캐스팅되고, 이번에야말로 눈에 띄어 주목받겠다고 다짐하며 재기를 꿈꾼다. 나는 낯선 사극 드라마 세트장에서 눈을 뜨게 되고, 대본 없이 즉시 촬영 현장에 투입된다. 극 중 시어머니는 나를 가묘로 불러내어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고 뒤따라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시취가 진동하는 가묘에 갇힌 나는 곧이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남편인 기주관 집 장손이 사실은 여자를 참혹하게 살해한 연쇄살인마였다는 것. 기주관 내외가 아들의 오랜 범죄와 증거를 모두 은폐한 뒤 열녀문을 세우기 위해 ‘광녀’를 데려와 영혼결혼식을 시켰다는 것. 진실을 알게 된 나는 가묘를 탈출하여 기주관 집 장손에게 피해 입은 홍매와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여자들은 서로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옥춘당 귀녀회’를 결성해 마을의 문제적 남자들을 응징한다. 옥춘당 여자들의 소문이 널리 퍼지고,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의해 붙잡힌 나는 또다시 나를 죽이려는 시어머니 앞에 서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눈을 뜬 나는 참여한 ‘과거 재현 드라마’가 사실은 ‘교정 교육 드라마 타이즈 센터’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넘쳐나는 구금자들을 가상현실 속에 머물게 하며 그들의 행동을 촬영해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개했던 것. 프로그램 속 여자들이 AI 학습 데이터에 의해 임의로 생성된 NPC였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옥춘당 여자들을 만나기 위해 시스템에 우회 접속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옆 서버이자 또 다른 저항지인 「뱅가니갱 : 자주색 여자들」의 세계와 교차하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거대한 서사로 뻗어나간다. 「뱅가니갱 : 자주색 여자들」 한여름 햇볕보다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여자들의 행진 1960년대, 인도 라타스탄 잘왈리 마을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개표가 사흘째 이어지고, ‘아르준 고빈드라’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광장은 광적인 환호로 뒤덮인다. 압도적인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한 고빈드라는 결과를 예견한 듯 미소를 지으면서도, 패배한 경쟁자에게 여유롭게 악수를 청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인 쇼맨십을 선보인다. ‘신이 내린 지도자’라고 불리며 청렴하고 신앙심 깊은 모범적인 남성으로 추앙받지만, 실상은 지역 유착을 통한 탈세와 사티를 강요하며 여성들의 죽음을 담보 삼아 권력을 공고히 쌓아 올린 이중적인 인물 고빈드라. 그의 본성은 오로지 집 안에서만 드러난다. 그는 아내 ‘샨티’를 향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절망에 잠긴 샨티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자주색 사리를 입은 의문의 여자 ‘데비’가 나타나 샨티를 구해 낸다. 데비는 남편의 잔인한 폭력에 시달리다 죽을 고비를 넘겼던 자신의 과거를 샨티에게 고백하고, 마을 남자들이 퍼뜨린 ‘뱅가니갱’ 자주색 사리를 입은 여자들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그들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만들어 낸 공포의 산물임을 알린다. 샨티는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데비의 손을 잡으며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인 ‘샨티(평화)’를 되찾겠다고 결심한다. 남편의 폭력에 순응하며 죽음을 택하려던 ‘피해자’에서 벗어나, 평화를 되찾기 위해 몽둥이를 드는 투쟁의 주체로 변화하는 것이다. 고빈드라의 당선 축하연이 성대하게 열리고 로티와 커리, 달과 굴랍자문 같은 음식들이 수북하게 쌓여 잘왈리 사람들 모두 축제에 동화된다. 연단에 오른 고빈드라가 첫마디를 꺼내는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그 너머 당의 상징이 그려진 커다란 가림막으로 향한다. 눈이 부시도록 번쩍대는 긴 칼이 천 한가운데를 찢어 두 동강 내고, 그 사이로 자줏빛 사리 자락을 흩날리며 칼과 도끼, 막대기를 든 여자들이 고빈드라를 향해 달려간다. 억압에 맞선 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퍼플 드림』 이렇듯 「옥춘당 귀녀회」와 「뱅가니갱 : 자주색 여자들」을 하나로 엮은 『퍼플 드림』은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여성들의 연대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그려 냈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퍼플(자주색)’은 여성 운동에서 존엄과 정의을 상징하며, 억눌렸던 여자들이 꿈꾸는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옥춘당 귀녀회」는 SF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존재를 입체적으로 구현해 낸 작품이다. 작가는 시대극 설정을 통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끈질기게 재현되는 악습과 차별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특히 시스템이 설계한 시나리오 속에서 소모되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여성들이 스스로 이름을 짓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기획된 운명에 거칠게 저항하는 모습은 독자에게 통쾌한 전율을 선사한다. 「뱅가니갱 : 자주색 여자들」은 실제 인도에 존재하는 여성 자경단 ‘굴라비갱’을 모티프로 삼아 폭력과 부조리한 악습에 맞서 스스로 몽둥이를 들고 맞서는 여성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그려 낸 작품이다. 구원을 기다리는 대신 여성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스스로를 구해 내는 ‘자기 해방’의 서사를 보여 준다.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된 인도 라자스탄 현지에서 소설을 집필했으며 촘촘하게 설계된 세계관과 디테일한 묘사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 시대도 문화도 다른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줄기로 이어진다. 작가는 ‘과거 여성들의 삶, 투쟁의 역사는 동일하다’고, ‘우리는 과거 여성들의 삶을 딛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 먼저 싸워 온 여성들의 꿈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되었듯, 『퍼플 드림』은 억압의 시대를 건너온 이름 없는 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