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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누항(陋巷)의 시
12. 화조(火鳥) 13. 고요한 바람 14. 이지러진 곡선(曲線) 15. 급선회(急旋回) 16. 요녀(妖女)의 탄생(誕生) |
李炳注, 호: 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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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형산은 한참동안 말을 끊고 있더니 “전호 군 미안하네. 자네 소원이란 걸 못 들어줘서” 하고 전호에게 대한 말을 했다.
“전호 군은 세상일에 담을 쌓아 버린 사람 같아서 그것이 불만이다. 너무나 지나치게 세속의 일에 덤비는 꼴도 보기 싫지만 젊은 사람이 은사 노릇을 하는 것도 보기에 흉하다. 세상 일이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바로 그 세상을 바꿔 볼 생각은 안 하고 미리 피해 버리는 것은 비겁하지 않을까. 성격의 탓도 있겠지만 그래선 못써. 얌전하기만 하다고 좋은 교사가 되는 건 아냐. 세상을 등진 자세가 교사로서의 자세가 될 까닭도 없구, 덕이 많고 지식이 풍부한 인격으로서의 교사가 아닐 바에야 실수를 할망정 박력이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할 게 아닌가. 싸울 줄도 알고 버틸 줄도 알아야 해. 쟁취(爭取)하는 정열도 있어야 허구.” 형산은 전호가 따라 주는 찻물을 맛있게 마시곤 말을 이었다. “나는 내 70평생을 요즘 세심하게 점검해 봤다. 자랑할 게 하나도 없더구나.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별로 없더라. 그런데 단 한 가지 후회되는 게 있어. 그건 실수를 겁내고 해야 할 행동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생엔 따지고 보면 성공도 실패도 없는 것이다. 일을 했나 안 했나가 있을 뿐이다. 사업의 성공이 결코 인생으로서의 성공이 아니고 그 실패가 인생으로서의 실패도 아니다. 이승만 씨와 김구 씨를 비교해 보면 이승만 씨는 정치엔 성공했지만 인생으로선 실패하고 김구 씨는 정치엔 실패했지만 인생으로선 이승만 씨에 비하면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니 이승만 씨의 실패나 김구 씨의 실패가 모두 아쉬운 것이었구나. 실패도 없이 성공도 없이 그저 무사주의로 살아온 사람들에 비하면 훌륭하지 않은가. 뭔가를 이룩하려고 몸부림치는 일, 결과보다도 그게 소중하니까.” 형산의 얼굴에 피로의 빛이 돋았다. --- pp.158~159 그러는 가운데 윤숙은 누구의 아인지 모르는 아이를 뱄다. 임신을 피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달 월경이 없어도 별반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의사에게 갔더니 임신이란 것이었다. ‘어찌된 실수일까’ 하고 수술을 하려고 했지만 벌써 4개월이 된다면서 의사는 수술이 위험하다고 일렀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아이를 낳는 것이 나을 것이란 의견도 덧붙였다 윤숙은 망설인 끝에 아이를 낳기로 했다. 그런 까닭으로 만삭의 몸을 남에게 보이기가 싫어서 할아버지의 일주기(一週忌)가 돌아왔는데도 할아버지의 혼백을 모신 절에 가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기일(忌日)이 지난 이튿날 전호와 성애의 연명으로 편지가 왔다. 형산의 일주기에 참석하지 않은 윤숙에게 무슨 사고가 있지 않나 하고 보낸 문안 편지였다. 윤숙은 전호와 성애의 이름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뭔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과 결별했다는 의식이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인생이 아니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자기가 택한 길을 끝끝내 걸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씁쓸하게 웃으며 저금통장에 불어나는 돈의 액수를 뇌리에 그렸다. --- p.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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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의 첨탑’이 지닌 읽는 재미를 맛보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대목은 그렇게 창작된 대중적 성향의 소설들이 놀라울 정도로 ‘소설 읽는 재미’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이병주 장편소설 『허상과 장미』는 ‘역사성과 대중성의 조화로운 만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병주의 소설이 대중적 흥미 유발만을 과녁으로 하지 않고, 거기에 그의 특장이라 할 역사성을 결부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 모든 허구적 이야기의 조합과 심금을 울리는 소설적 교훈을 함께 공여하는 터이기에, 우리가 여기에 ‘대중성의 첨탑(尖塔)’이란 수식어를 헌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될 소지를 더 많이 안고 있다. 그런 만큼 당대독자에의 수용은 좋은 작품에 대한 판정에 있어 하나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이병주를 ‘한국의 발자크’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용서가 답이다 “자공(子貢)이가 공자를 보고 종평생(終平生) 지켜야 할 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거든. 그랬더니 공자가 기서호(其恕乎)라고 했지. 기서호란 용서하라는 뜻 아니겠나. 나는 이 말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네.” 소설의 결미에 이르러 전호와 최성애는 구원(久遠)을 바라보는 사랑의 결실을 얻는다. 그러나 윤숙은 전혀 다른, 새 길을 간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과 결별했다고 느끼면서 ‘저금통장에 늘어나는 돈의 액수’에서 위안을 얻는다. 사용가치 중심의 시대가 교환가치 위주의 시대로 변환해가는 그 길목에 윤숙이 서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모든 소설적 이야기와 인생 행로의 드라마들을 두고 작가가 궁극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원론적 개념은, 고색창연한 공자의 옛말 곧 논어의 한 구절이다. 기서호(其恕乎), 용서가 그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용서하지 않고, 용서받지 않고 배겨 낼 도리가 있겠나’라는 것이 형산의 말이다. 이 복잡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은 의외로 단순할지 모른다. 바로 용서다. 왜 지금 여기서 다시 이병주인가 “백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작가가 있다. 이를 일러 불세출의 작가라 한다. 나림 이병주 선생은 감히 그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 불러도 좋을 만한 면모를 갖추었다.” 2021년은 나림 이병주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뜻 깊은 해를 맞아 이병주기념사업회에서는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선집을 발간하기로 했다. 이 선집은 모두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단편 선집 『삐에로와 국화』 한 권에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단편), 「삐에로와 국화」(단편), 「8월의 사상」(단편), 「서울은 천국」(중편), 「백로선생」(중편), 「화산의 월, 역성의 풍」(중편) 등 6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고 장편소설이 『허상과 장미』(1·2, 2권), 『여로의 끝』, 『낙엽』,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무지개 사냥』(1·2, 2권), 『미완의 극』(1·2, 2권) 등 6편 9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에세이집으로 『자아와 세계의 만남』, 『산을 생각한다』 등 2권이 있다. 『허상(虛像)과 장미』는 인생이 어떻게 한 순간의 허상과 같으며 그 종막에 바치는 장미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역사에 대한 ‘균형감각’과 ‘소설 읽는 재미’를 모두 놓치지 않는 이 소설은 이병주라는 대가의 풍모를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