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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기다리는 맛 도시인의 수프 아직 수프를 먹지 못했는데 내가 선택한 식탁 오늘도 낯선 세계를 여행한다 오늘 기분은 미네스트로네 달아도 너무 달다 인생은 고통이니까 수프나 끓여야지 매일 혼밥하는 사람의 점심 마감 전야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에 대해 대도시의 요리법 레시피 유목민의 실험기 다운그레이드의 대가와 업그레이드를 위한 레시피 비법 소스를 찾아서 이름을 부른다는 건 수프를 나누면 반이 된다 시작, 중년 대비 프로젝트 수프로 일시정지 방구석 1열이라는 안온함 점심의 불안도 저녁에는 잊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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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틴다는 말에도 싫증이 날 것 같은 날이면 야채 수프를 끓인다. 감칠맛과 풍미를 느끼려면 채수를 우려내야 해서 성미 급한 나와는 상극인 수프다. (…) 수프를 끓이며 내 몸과 마음의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도록 조정한다. 기다림에 익숙해지도록 몸과 마음을 길들이는 수련과도 같다. 불 앞에서 조금씩 으스러지는 재료를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휘저으면 정체 모를 불안도 뒤편으로 밀려난다.
--- p.20 식사를 요란하게 준비하다 보면 여덟 시 반에서 아홉 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집스럽게 단호박을 찌고 으깼다. 단단하고 옹골찬 원형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커스터드 크림처럼 변할 때까지. 부드러운 단호박 수프를 한 스푼 떠서 입으로 밀어 넣으면 저지할 새도 없이 목구멍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달콤한 수프를 음미하다 보면 내가 나를 돌보는 법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 시절 나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에서 저녁 한 끼는 원하는 요리를 챙겨 먹어야만 내가 거주하는 공간을 좋아할 수 있었다. --- p.26 이제 내 아픔은 내가 챙긴다. 채소를 가득 썰어 넣은 묽은 수프를 한 냄비 끓이면서 종종 생각한다. 엄마가 아플 때는 어떤 음식으로, 어떻게 아픔을 대비했을지. 고통이 지나간 후에 먹기 위한 죽 한 그릇, 수프 한 그릇을 엄마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끓였을까. 요란한 통증으로 속 시끄러운 밤을 홀로 보내는 날이면, 동거인이 셋이나 있는 집에서 나 홀로 아픔을 달랬을 엄마의 밤을 떠올린다. 엄마는 쌀을 불렸을까, 아니면 분말 수프 봉지를 뜯었을까. 아니면 죽도 수프도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고통을 어루만졌을까. --- p.92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음식이니 딱 한 번만 속은 셈 치고 먹어 보자 하고 수프를 떠먹은 그 순간,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의 한 대목을 낭독하는 연기자처럼 선명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사양≫은 식당에서 수프를 한 숟가락 뜬 어머니가 “희미한 비명을 지르셨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희미한 비명’이라는 표현을 몸으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 그날 식사에서 메인 디시는 수프였다. 이 맛있는 걸 왜 여태 몰랐지? 야채 수프 맛있다고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다는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 p.180 오늘의 메뉴는 쪼그라들기 시작한 시금치와 감자 한 알, 자투리로 남은 양파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음식, 감자 시금치 수프 당첨이다. 상태가 미심쩍은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를 없애는 데엔 수프가 제격이다. 시금치를 넣어 수프를 끓이겠다고 하니 “시금치를 넣은 수프라고요?”라며 동거인이 호기심을 보였다. 사실은 처음 해 보는 요리지만 자신 있는 척, 많이 해 본 요리인 척 당당하게 주방으로 걸어갔다. 수프는 실패가 없지. “오, 맛있다!” 반응이 좋으면 칭찬을 받은 학생처럼 기쁘다.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수프가 늘어날 때마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생활력을 장착한 어른이 된 기분이다. --- p.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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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날에는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수프’ 좋아하세요? 여러분에게 빨간 날은 어떤 의미인가요? 카멜북스는 빨간 날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날’로 해석하고, 빨간 날 즐기고 싶은 취미와 취향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을 시리즈로 엮어 보기로 했습니다. 분야에 상관없이 ‘나의 세계를 채우는 어떤 것’에 대해 즐겁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빨간 날의 다섯 번째 주제는 ‘수프’입니다. “인내 끝에 얻게 될 수프 한 그릇은 달다”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한 그릇의 세계 수프는 기다리는 능력이 필요한 음식입니다. 3분 요리라는 간편한 선택지가 있지만, 밍밍하면서도 인공적인 맛의 국물을 목구멍에 넘기고 있자면 신선한 재료로 공들여 끓인 수프가 생각나곤 하지요.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와 우유, 버터 한 조각만 가지고도 고급스러운 맛을 내는 수프 한 그릇이 완성되지만, 단단한 채소가 냄비 속에서 차츰 뭉개져 마침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기다리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잘 끓인 수프의 깊은 맛을 알기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수니까요. ‘인생은 버티는 것’이라는 말은 수프 끓이는 일에도 적용됩니다. 번거로운 조리 과정을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온전히 나를 위한 한 그릇’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으로 수프 끓이는 법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책장을 넘기면 1인 가구의 세대주로서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음식이 왜 하필 수프였는지, 수련하듯 수프를 끓이며 어떤 마음이 자라났는지, 자신 있게 대접할 수 있는 수프가 하나씩 늘어나는 동안 삶의 그릇을 무엇으로 채워 갔는지, 그야말로 30대 프리랜서 여성의 도시 생존기라 할 만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수프를 끓일 때마다 바닥 난 인내심이 한 칸씩 차오른다” 성미 급한 소설가의 뭉근한 심신 단련 에세이 『수프 좋아하세요?』는 소설집 『피구왕 서영』으로 데뷔작부터 주목받은 황유미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입니다. 작품에서조차 ‘황급히’란 단어를 자주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급한 성격의 덕을 보는 시기가 끝났음을 깨달으며 수프 끓이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수프를 끓여 먹으며 영위하는 일상은 “몸과 마음의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속도”를 조금씩 늦춰 주었고, ‘버티는 자가 승리한다’는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전작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다양한 삶의 모양을 보여 주었던 작가는, 자신이 그 세대로 불리는 현실 속에서 또래의 창작자들과 건강하게 뿌리 내리고 함께 뻗어 나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들과 함께 먹을 수프를 끓이면서 말이죠. 매일 혼자 먹을 수프를 끓이던 그는 동료 작가와 주거 공간을 공유하면서부터 자꾸만 집에 손님을 초대하며 본격적으로 수프를 나눠 먹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끓여야 하는 수프의 양이 늘어날수록 기쁨도 배가되었습니다. 냉장고 속 재료로 만든 새로운 수프를 척척 내놓으며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생활력을 장착한 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기도 하면서요. 바삐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뭉근히 수프를 끓이는 일은 그리 대단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대단하지 않더라도 각자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 있어요. 유일하게 느슨해질 수 있는 공간에서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며 나를 먹여 살리는 일, “인생은 고통이니까 수프나 끓여야지” 말하며 스스로 달래는 일이 어쩌면 매일을 버티며 끝내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