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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부부로 살면서 독립운동을 ‘살린’ 여성들을 생각하며
머리글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쓴 부부독립운동가 1장 독립운동을 ‘살린’ 독립운동가 부부 1. 독립운동 ‘살림’에 일생을 헌신한 이은숙과 이회영 2. 미주 독립운동의 대부모 이혜련과 안창호 3. 비타협적 독립운동가의 ‘상징’ 신채호와 그의 든든한 지원자 박자혜 4. 독립운동가 가문의 가교가 된 김락과 이중업 2장 임시정부에 참여한 부부독립운동가 1. 중국관내 여성운동의 대모 김순애와 외교관 독립운동가 김규식 부부 2. 임시정부 27년을 함께 한 정정화·김의한 부부 3. 임정에서 만나 함께 활동한 연미당·엄항섭 부부 4. 육아일기를 쓰며 임정의 선전활동에 앞장선 최선화·양우조 부부 3장 의열 활동에 나선 부부독립운동가 1.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끈 박차정·김원봉 부부 2. 조선의용대원 이화림·이집중 부부 3. 광복군 제3지대를 이끈 오광심·김학규 부부 4. 광복군이 인연이 된 민영주·김준엽 부부 4장 사회주의 독립운동 노선을 걸은 부부독립운동가 1. 함께 또 따로 열정을 다한 허정숙·임원근 부부 2. 불꽃 같은 투쟁에 요절한 박원희·김사국 부부 3. 민족통일전선을 꿈꾸며 활동한 김원경·최창식 부부 맺음말 여성독립운동 다시 보기 부록 서훈 받은 부부독립운동가 명단 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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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의 전처 아들로 장자인 이규학(1896~1973)도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함으로써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처 조계진이 이회영의 며느리로 시모 이은숙 귀국 후엔 시부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을 돌보며 뒷바라지하는 ‘살림’의 책임을 맡은 것도 여성의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 p.41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원의 일원으로 중일전쟁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하여 약품과 붕대를 모았다. 1938년 3월 10일 도산의 순국(殉國)이 전해졌으나,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항일전에 참여하였다. 여자애국단에서는 중국 난민구제를 위해 구제금으로 78달러를 거두어 송미령(宋美齡)에게 보냈으며, 또 송미령의 요청으로 1939년 12월 76달러를 송금하였다. --- p.61 정정화는 자신의 삶에서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남편 김의한과 시아버지 김가진과 같은 항일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자신의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겸손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 p.146 연미당은 첫딸을 낳은 뒤 1930년 8월 16일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여자청년동맹이 조직되었을 때 연미당이 참여하면서,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1932년에는 22세 나이로 한인여자청년동맹 5명의 임시위원 중 한 사람이 되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한국독립당과 임정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한 것이다. --- p.151 박차정은 대원들을 매우 친절하게 대하였으며 솔선수범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부녀복무단은 전선의 의용대원들을 방문하여 물품과 가족들의 소식을 전하여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또한 전단, 표어 팜프렛 등을 살포하는 선무활동도 도맡았다. --- p.203 극한의 상황을 견디면서 이화림과 여성대원들은 태항산에 많은 돌미나리를 캐서 김치를 담그거나 볶아 먹었다. 소금도 귀해 ‘쿠얜’이란 돌을 미나리김치에 넣으니 그 맛이 마치 짜장 김치인 듯하였다. 그 외 미나리 말린 것과 겨를 섞어 만든 떡, 도토리가루, 도토리묵 등을 식용가능한 모든 것을 먹거리로 삼았다. 잠자리는 강남짚을 깔고 자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 p.225 글재주가 있었던 임원근은 이후에도 신문, 잡지 등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문필활동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그러나 실제 허정숙은 이후에도 송봉우뿐 아니라 최창익 등 계속 남성과 동거, 또는 혼인하여 자녀도 출산하곤 하였으나 남편에게 조금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갔다. 어쩌면 강한 의지와 용기로 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이 아니었나 싶다. --- p.279 김원경은 1940년 상해 거류 조선인회(朝鮮人會)와 조선총독부 상해사무소가 공동 주최하고 상해 일본대사관 중지(中支)경무부의 후원을 받은 「재상해조선부인시찰단」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잡지사와의 대담에서 김원경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이런 선택에 아쉬움이 남는다. --- p.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