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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ku Onda,おんだ りく,恩田 陸,熊谷 奈苗(くまがい なな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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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죽는다.”
소리 내어 말해본다. “외로워서 그랬을까.” “어차피 죽을 때는 혼자야.” H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게. 죽을 때는 혼자지.” 그 두 사람이 죽어서 이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랑? 우정? 신뢰? 체념?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었을까? ------------------------------------------------------------------------- 그 둘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대학 시절 친구로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어쩌다 그 기사에 시선이 닿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오히려 기사가 내 눈에 확 들어온 느낌이랄까. 충격이 컸다는 사실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 그러므로 이번 작품은 최초의 모델 소설로, 실제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인물을 두고 ‘모델’이라고 하자니, 좀 이상하기도 하다. -------------------------------------------------------------------------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두 사람이 ‘일상’을 끊어내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근본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봤다. 금지된 사랑. 질병. 경제 사정. 그 어떤 것도 내게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 그러나 콘서트장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흰 깃털이 쏟아져 내려 객석을 다 메워버렸기 때문이다. 깃털로 가득한 객석에 수많이 사람이 빼곡히 앉아 있고, 무대에서는 두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들이 환호에 화답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깃털이 끊이지 않고 얼굴에 떨어져서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 절망. 사람은 어떨 때 절망에 빠질까? 깊은 절망은 아니더라도 얕은 절망은 때를 가리지 않고 겪는다. 이사 왔을 때부터 늘 가던 슈퍼가 없어졌다. 단골 책방이 없어졌다. 이러한 일은 하찮게 보여도 일상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야금야금 일상을 갉아먹으면서 절망을 불러온다. --- 본문 중에서 |
“가족도, 친척도 아니다. 젊음의 방황과는 이미 작별한 중년의 여자들이다.
그런데 두 여자는 함께 살기로 한다. 그리고 어느 날 함께 죽기로 한다. 둘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진다. 마치 햇빛 찬란한 봄날의 산책처럼.” 모든 것은 어느 지방 신문의 아주 짤막한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별로 사람들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만 같은 삼면의 토막 기사. “중년의 두 여자가 함께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도 금세 잊어버릴 하찮은 신문 기사. 자살의 동기도, 아니 그들의 이름조차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가 그토록 무거운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그리고 이후 20년이 넘도록 왜 하나의 가시처럼 줄곧 내 마음속에 걸려 있는 걸까? 마치 누군가는 반드시 해명해야 할 거대한 의문부호인 것처럼. 마치 언젠가는 꼭 이룩해야 할 일생일대의 미션인 것처럼. 하지만 지금, 전업 작가가 된 ‘나’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의식의 밑바닥에 놓여 있던 그 가시를 빼내고자 한다. 이십 년도 더 된 이 체증은 그만 내려가야 하니까. 그 두 여자의 일상을 다시 찾아보기로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한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녀들의 묘한 삶을 연극으로 혹은 영화로 옮기고도 싶다. 가장 어울릴 배우를 찾기 위해 오디션을 진행하는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여러 겹의 리앨리티가 교차하는 독특한 서사, 잊을 수 없는 여운! 인간의 원초적 상실감, 그리고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그리움! 그러나 《잿빛 극장》은 그저 신문 기사 속 두 여자에 관한 단선적인 ‘스토리텔링’에 그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 개의 시점, 그리고 서로 다른 세 개의 차원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내면과 우리의 일상을 다시 반추하게 된다. 가볍게 스쳐 가듯이, 그러나 뜻밖에도 강렬한 감동을 남기며, 무심하게 나아가는 이야기. 그러는 가운데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간의 심리가 세밀하고도 집요하게 파헤쳐지면서, 실재와 허구의 경계마저 아스라해진다. 소설의 제목처럼 ‘잿빛’인 어떤 지점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 잿빛 극장은 결국 우리 인간의 일상인가? 어떻게 해야만 그 잿빛에 색을,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것은 누가 할 수 있는 일일까? 《잿빛 극장》은 온다 리쿠의 소설이건만, 조금도 그녀의 작품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소설과는 전혀 결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 능청스럽고도 매력적인 작품은 독자에게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며, 예전과는 사뭇 다른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독자들은 불현듯 깨달을 것이다, 지금까지 온다 리쿠의 조곤조곤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일상의 놀라운 의미를 반추했음을.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얼마나 희미할 수 있는지,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음을. “나는 그 두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확실히 그 두 사람을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