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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7
어느 젊은 여자 77 로즈 씨 이야기 87 그날 밤 117 옮긴이의 말 143 |
Irene Nemiro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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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프 부인이 공부방에 들어서면서 문을 하도 세게 닫는 바람에 샹들리에 유리 장식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맑고 가벼운 방울 소리를 냈다.
--- 본문 속에서 가끔씩 죽이고 싶을 정도로,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혹은 발을 구르며 ‘아유, 정말 짜증 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앙투아네트는 어른들이 미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를 무서워했다. 앙투아네트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꼭 껴안으며 쓰다듬어준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그때 일을 까맣게 잊었다. 대신 그녀의 머리 위로 날아드는 화난 목소리의 파편들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 p.11 앙투아네트가 이 땅에서 자기 몫의 행복을 누린다고 해서 엄마에게 해가 될 게 뭐가 있는가? 오! 세상에, 한 번만, 딱 한 번만, 진짜 젊은 아가씨처럼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남자의 품에 안겨 춤을 춰봤으면. 그녀는 절망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장전된 권총의 방아쇠를 가슴에 대고 당기듯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물었다. “딱 십오 분만, 안 돼요, 엄마?” --- p.28 아무도, 세상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못 보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그들은, 감히 그녀를 키운다고, 그녀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그 모든 천박하고 무식한 졸부들은 그녀가 자기들보다 천 배나 더 똑똑하고 재치 넘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 저녁 내내 그녀는 그들을 얼마나 비웃었는지! 그래도 그들은 당연히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울거나 웃어도 그들은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았다. 열네 살 어린 아이, 어린 여자아이, 그것은 그들에게 개처럼 무시해도 되는 하찮은 어떤 것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녀를 억지로 재우고, 벌주고, 욕하는 것일까? ‘아! 저 사람들, 모조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 p.31 언젠가는 자기 몫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멀었다.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그때까지는 굴욕적이고 답답한 생활과 레슨, 엄격한 규율을 소리나 빽빽 질러대는 엄마…. --- p.33 ‘더러운 이기주의자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은 건 바로 나야. 나, 나라고! 난 젊잖아. 저들은 내 몫을 훔치고 있어. 지상에서 내가 누릴 몫의 행복을 훔치고 있다고. 아! 기적이 일어나서 내가 그 무도회에 참가할 수 있다면! 그래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눈부신 여자가 되어 모두를 발아래 거느릴 수 있다면!’ --- p.34 삶은 온통 어긋나 있었다. --- p.54 “엄마라는 그 여자, 나한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지. 난 겁 안 나, 난 상관없어!” (…) “그러면 죽어버릴 거야. 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난 미리 복수를 했을 뿐이야….” --- p.58 눈물이 흘러 분으로 범벅이 된 엄마의 얼굴을, 일그러지고 벌겋고 주름이 진 데다, 어린애 같으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가엾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엄마가 불쌍하지 않았다. 경멸에 찬 무관심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 p.72 바로 그 순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한 사람은 올라갔고, 또 한 사람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그렇게 ‘삶의 길 위에서’ 엇갈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p.74 그는 (로즈 씨는) 삶을 미리 계산하고, 재보고,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우연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늘 쉽지 않다는 건 그도 인정했지만, 나름대로 집요하게 불운을 피해 다녔다. --- p.90 그는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하려 했으며, 논리적이고 신중하게 행동해왔다. 그런데 이성과 신중함이 그 힘을, 예전의 효력을 점점 잃어갔다. --- p.99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버리고 온 것에 관한 생각은 점점 줄어들었다. 모든 걸 잃었다하더라도 어쩌겠는가! 아직 목숨은 남아 있었다. 그는 목숨만은 구할 생각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미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리 쪼그라든다. --- p.103 살아 있는 소년과 죽은 여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젊음이 로즈 씨의 내면에 일깨워놓은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p.112 “삶이 끔찍한 거지. 너희는 삶에서 동떨어져 있어. 너희가 옳아. 삶은 여자를 아프게 하고, 망가뜨리고, 더럽히고, 상처 입게 해. 여자에겐 사랑 외에는 삶이 없다고 말하는 건 남자들이야. 그런데 혼자 사는 너희는 행복하잖니? 날 봐. 나도 이제 너희처럼 혼자야.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해서 찾은 고독이 아니라, 굴욕적이고 쓰디쓴 나쁜 고독이야. 버림받고 배신당해 얻은 고독이지. 난 직업도 없어. 가슴을 채우고 정신을 달래줄 게 아무것도 없어. 자식? 그건 날 계속 후회하게 하는 살아 있는 기억이야. 너희는, 너희는 행복하잖아.” --- p.125~126 삶이란 게 참 묘해! 우리 각자에게 어떤 순간이 찾아오고, 어떤 일이 일어나서 우리의 운명을 이런저런 방향으로 틀어놓았다는 생각을 너희도 가끔 하니? --- p.128 엄마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랑은 떠나갔다. 마개를 열어놓은 향수병에서 향기가 날아가듯, 사랑은 그녀의 가슴에서 달아났다. --- p.139 아! 내 가엾은 마르셀…, 뭘 원하니? 그게 바로 삶이야. 날것 그대로의 삶은 그런 거야. --- p.139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 p.141 |
우크라이나 출신 프랑스어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첫 번째.
프랑스 중고등학교 필독서 『무도회』, 국내 최초 번역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의 첫 번째 책, 『무도회Le bal』에는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작가가 남긴 수십여 편의 단편 중 엄선한 네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모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오래 살았다. 그녀의 작품들 역시 프랑스어로 쓰여 프랑스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십대 후반에 소설 쓰기를 시작한 이후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운명을 알면서도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이렌 네미롭스키는 소설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끊임없이 환기한다. 「무도회」는 작가가 1929년 『다비드 골더David Golder』로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화려하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바로 전에 피에르 네르세이(Pierre Nercey)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이 작품은 데뷔작의 엄청난 성공 직후 작가의 두 번째 소설로 정식으로 출간되어, 영화와 연극으로도 재창작되었다. 평단은 이렌 네미롭스키를 당대 최고의 여성 작가인 콜레트에 비교하며, 젊은 신예작가의 탄생을 반겼다. 이렌 네미롭스키는 모파상을 연상하게 하는 수십여 편의 아주 짧은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다른 젊은 여자」는 그러한 소설 읽기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렌 네미롭스키 단편선 『무도회』에는 또한 전쟁이 빚은 삶의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그려낸 「로즈 씨 이야기」, 그리고 작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그날 밤」이 수록되었다. 1940년 이후 유대인 색출 탓에 네미롭스키는 실명으로 글을 발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고, 경제적으로도 곤궁해졌다. 그럼에도 이렌 네미롭스키는 집필을 계속해, 자신의 딸 드니즈의 이름을 바탕으로 드니즈 멜랑드(Denise Merande - 멜랑드merande는 프랑스어로 ‘우여곡절’을 의미하는 단어 meandre를 떠올리게 한다)라는 가명을 만들어 단편을 발표하고, 대하소설 『스윗 프랑세즈Suite francaise』를 쓰기 시작했다. 네미롭스키는 1942년 7월 13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이틀 후 「그날 밤」이 수록된 문학잡지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이렌 네미롭스키는 아우슈비츠에서 티푸스로 숨을 거두며 짧고도 강렬한 삶을 마쳤다. 부재하는 아버지와 사랑 없는 어머니, 그리고 글을 쓰는 이렌 네미롭스키 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해서 부를 축적한 아버지는 딸에게 관대했지만 늘 바빴고, 어머니는 딸에게 냉담한 채 삶을 즐기는데 몰두했다. 냉정한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귀족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졸부 아버지에 대한 환멸감은 이렌 네미롭스키의 작품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무도회」의 캉프 부부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부모를 떠올리게 한다. 이렌 네미롭스키는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18년 파리에 정착해서 소르본에서 공부를 하며 열여덟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피에르 네르세이라는 필명으로 짧은 소설들을 발표했고, 「무도회」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이다. 작가는 스물여섯에 데뷔작으로 알려진 『다비드 골더』를 쓰고 남편의 성인 엡스타인(Epstein)이라고만 적어 출판사에 투고했다. 단번에 이 소설에 매료된 그라세 출판사의 대표는 이 미지의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신문에 광고까지 내서 작가를 찾아냈다. 그리고 『다비드 골더』가 데뷔작이었음에도 평단과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후 이렌 네미롭스키는 1930년대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며 왕성하게 소설을 써나간다. 최초로 사후에 르노도 상을 수상한 작가 아우슈비츠에 끌려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렌 네미롭스키는 다섯 권으로 기획한 『스윗 프랑세즈』를 끝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작가는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원고가 든 가방을 출판사에 맡겼고, 출판사에서는 작가의 두 딸에게 가방을 전달했다. 어린 두 딸은 전쟁 동안 힘겹게 숨어 지내면서도 엄마의 가방을 끝까지 지켰다. 가방 속 노트에는 엄마의 일기가 적혀있을 것이라 믿었던 딸들은 그 가방을 열기가 두려워했다. 마침내 가방이 열리고 네미롭스키의 딸이 어머니의 노트를 펼쳐 『스윗 프랑세즈』를 읽게 된 것은 작가가 사망하고 62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출간된 『스윗 프랑세즈』는 2004년 르노도 상을 수상했다. 이는 르노도 상 제정 이후 처음으로 망자의 작품에 수여된 상이었다. 번뜩이는 역설과 아이러니 표제작인 「무도회」는 어수선한 상황 덕에 졸부가 된 부르주아의 모습을 풍자하며 잔인한 유머의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허영에 사로잡힌 엄마와 딸의 갈등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모녀의 이야기이다. 이렌 네미롭스키는 1930년대 상당한 인기를 누렸지만, 2차 대전 이후로는 거의 잊혀진 작가가 되었다. 그 후 1980년대에 「무도회」를 시작으로, 작가의 소설이 조금씩 재출간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작가 사후 62년이 지나 빛을 보게 된 『스윗 프랑세즈』의 출간으로 이렌 네미롭스키의 다른 작품들이 전폭적으로 재조명되었다. 특히 「무도회」는 새롭게 연극과 오페라로 상연되었으며, 프랑스 중고등학교의 필독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백여 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이렌 네미롭스키의 소설들이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어긋나고 교차하는 생의 순간들을 번뜩이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했으나 얻지 못하고, 잃은 줄 알았으나 새로운 것을 얻기도 하고, 어떤 것은 영영 어긋나기도 하는 알 수 없는 인생의 사건들을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묘사로 풀어낸다. |
누군가의 욕망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연민하기는 어렵다. 연민은 그 욕망의 못남, 혹은 찌질함이 내 것이기도 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아주 쉽게 회피의 언어로 욕망을 비난할 때, 이렌 네미롭스키는 직설의 언어로 욕망을 연민한다. 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가식과 허세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엄마이거나 이웃이거나 혹은 그 자신인, 이들에 대한 비아냥이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안쓰러움이기도 하다. 세상도 삶도 믿지 않는 자가 쓴, 그리하여 세상도 삶도 이해하게 하는 역설이 네 편의 소설에 담겨 있다. -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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