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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15
지하에서|29 프로이트의 그늘 아래에서, 파트 1|43 프로이트의 그늘 아래에서, 파트 2|67 카바피의 침대|88 제발트, 허비된 삶들|105 슬론의 가스등|122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 시간: 모드 혹은 규방의 철학|134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 시간: 클레르 혹은 안시호수의 소소한 소란|169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 시간: 클로에 혹은 오후의 불안|197 햇빛 비추는 밤의 배회|216 스크린의 다른 어딘가|242 스완의 키스|251 가단조의 베토벤 수플레|272 거의 다 오다|282 코로의 빌다브레|289 페르난두 페소아에 대한 미완의 생각|293 감사의 글|306 |
Andre Aci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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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생각나고 또 생각나는 네 문장이 있다. 몇 년 전 내가 쓴 문장인데 지금도 내가 그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마음 한편에서는 그 네 문장을 철두철미하게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렇게 하려다 말로는 전달될 수 없는 의미를 완전히 꺾어 버릴까 봐 두렵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가 더 깊이 숨어들 여지를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거의 이런 느낌이다. 그 네 문장이 작가인 나조차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를 바라지 않는 듯한 느낌이랄까. 내가 말을 부여했으나 그 의미는 내 것이 아닌 셈이다.
--- p.16 예술은 삶이 아니라 형태를 추구한다. 삶 자체는, 그와 더불어 이 세상 역시 사물, 그것도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사물의 문제다. 반면 예술은 혼돈으로 설계와 논리를 착상하는 것이다. 예술은 형태를 통해, 단순히 형태를 통해 지금까지 보이지 않은 것이자 앎이나 이 세상이나 경험이 아닌 형태만이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예술은 경험을 포착해 그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형태 자체로 경험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며, 형태가 경험이 되면 더욱 좋은 시도가 된다. 예술은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노동이다. --- p.34 나는 언제나 딱히 그곳에 없는 것을 찾는다. 그곳에 있다고들 말하는 것에 등을 돌리면 그 외의 더 많은 걸 찾기 때문이다. 그중 상당수는 처음엔 비실재적인 것 같지만 일단 말을 가져다 붙이며 탐색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나면 결국은 더 실재적인 것이 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 오래전에 허물어진 건축물, 가 본 적 없는 여행지, 계속해서 우리를 이끌어 준 삶과 아직 오지 않은 삶을 살펴보노라면, 어느 순간 갑자기 알아채는 일이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더라도 뭔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 뭔가가 더 명확해진다. 내가 아직은 딱히 존재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찾는 이유는,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뭔가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장을 끝맺지 않으려는 이유와 똑같다. 내가 모호함을 탐구하는 이유는 모호함 속에서 사물들의 성운,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들이나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빛을 내뿜는 것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속에서 내 시간의 오점을 발견한다.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일어나진 않았으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비실재적인 것은 아니며 여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되 이번 생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봐 초조한 그런 삶을. --- p.40 알렉산드리아는 내가 만들어 낸 게 아니었다. 그러니 다시는 그곳을 못 본다는 이유만으로 알렉산드리아가 죽어 우리 지구에서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그곳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내가 이르게 된 생각과 달리 나는 알렉산드리아를 싫어하지 않았고, 알렉산드리아는 추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그곳 사람들과 대상들, 내가 여전히 갈망하는 곳들, 한입이라도 맛보기 위해서라면 뭐든 달라는 대로 기꺼이 다 내줄 마음까지 드는 음식과 바다, 언제나 보이던 그 바다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단지 내가 그곳에 없었을 뿐. 하지만 나는 그 알렉산드리아가 똑같은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의 알렉산드리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 pp.92~93 카바피에게 현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카바피가 예지력이 뛰어나 미래의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자신이 과거를 떠올릴 줄 미리 예견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글에 간간이 현세의 시간대에 맞서는 어조가 끼어들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의 시에서 실제로 머무는 현실 시간대는 말 그대로 회상, 지난 상상을 돌아보는 상상, 회상 사이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역류가 일어나는 것이다. 카바피의 세계에서 직관은 직관에 반하는 것이며, 충동은 고민거리일 뿐이고, 의식은 너무 빈틈없어서 사랑의 행위에는 언제나 불안과 상실 같은 것이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상황에 대한 이해도 언제나, 정말 언제나 일시적이고 반사실적이다. 사랑꾼 카바피는 이 시를 향수에 잠긴 사람으로서 써 내려간 게 아니라, 그의 숱한 시에서 그러듯 이미 향수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그로써 늘 향수에 대해 예행연습을 하며 향수를 막아 내는 사람으로서 쓰고 있는 것이다. --- p.102 예술은 우리가 시간과 싸우는 방법이다. 우리는 둘 다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 두 순간 사이를 파고들어 시간을 내려다보고, 떨쳐 버리고, 초월하고, 필요하면 왜곡하기도 하는 또 다른 순간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 보들레르는 시 〈백조〉에서 카루젤다리를 건너며 자신이 사는 도시를 응시하다 큰 슬픔 속에서 “aris change(파리가 변하고 있다)!”와 “Le vieux aris n’est lus(옛 파리는 더 이상 없다)”를 깨닫는다. 파리는 자신의 흩어진 유물과 파편과 영속적인 흙먼지를 통해 그리스인들이 트로이를 약탈하고 잿더미로 만든 뒤에 남겨 놓은 것들을 보들레르에게 상기시킨다. 시인은 여전히 자신의 고향이지만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 뭔가로 돌아가길 끝없이 동경하는 도시에서 이제 시간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중략) 사실 모든 파리 사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현재 파리는 한때 보들레르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슬퍼한 옛 파리를 밀어낸 바로 그 파리다. --- p.128 세상은 우연의 일치로 가득하다. 우연한 만남, 우연한 발견, 우연한 통찰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연이다. 하지만 로메르의 작품은 우연에 대한 알고리즘이 있다. 적어도 그런 알고리즘을 찾고 있으며, 우연한 일에 대한 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영화 밖에서도, 심지어 영화 안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영화 자체가 논리다. 형태가 곧 알고리즘이다. 예술이 그러하듯 형태도 삶이 관건인 경우가 드물거나 딱히 삶이 관건이 아니다. 형태는 설계를 찾는 것인 동시에 발견하는 것이다. --- p.151 밖으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날 밤 그 도시의 모습은 위어나 호퍼의 뉴욕과 달랐다. 맨해튼에 보정의 손길을 가해 자신만의 도시로 만들어 낸 또 다른 화가들의 뉴욕과도 달랐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윽한 멋, 건물에 입힌 예술의 코팅, 층이 없다면 그 도시는 베풀어 줄 아름다움도, 다정함도, 사랑이나 우정도 없다는 것을. 나에게 아무것도 발산하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이 도시는 나의 도시가 아니었고, 결코 나의 도시가 되지도 않을 거라고. 그 도시의 사람들은 나의 사람들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내 그러리라고. 그 사람들의 언어는 나의 언어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내 그러리라고. --- p.165 우리의 내면이 말이 안 되는 것들, 다시 말해 역설과 모순과 변덕과 충동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삶의 외면적 사건들 역시 말이 안 되는 것들, 다시 말해 우연, 행운, 우연의 일치에 따른다. 하지만 감정의 변덕에 어떤 묘한 이치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황당해 보이는 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행운에 의한 일들은 목적 없이 일어나지 않으며, 잠재의식적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의지의 어딘가에서는 우리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다는 표식이다. --- p.186 내가 로메르의 이단아적 통찰과 반사실적 세계관을 좋아했다면 그 이유는 다른 모든 사람이 말하는 실재적이고 사실적인 세계에 그도 나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가 아는 세계의 좋은 것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세계에서 떠내려온 유목(流木)으로 내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 p.196 지하인(도스토옙스키가 쓴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 p.옮긴이)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호감이 가지 않는 인간이다. 아무래도 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예전과 같을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떤 도시도 상처 없는 도시가 없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잠재 의식을 몰래 엿보면 그 아프고 멍들고 상처 입고 자기혐오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잠재 의식이, 더는 시가전차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수많은 거리와 길 사이를 여전히 헤쳐 지나가는 폐기된 시가전차 선로처럼 우리 앞에 드러난다. 그 선로는 지하로 가라앉길 거부한 채 여전히 당신을 빤히 응시한다. 완전히 묻혀 버린 후에도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아주 많은 것이 그러듯. 소멸하는 것은 없다. --- pp.223~224 프루스트식 글쓰기에는 세상과 현재 양면에서 훼방받는 감성이 반영된다. 프루스트의 글에서는 현재 시제만 아니면 돼, 라고 말한다. 프루스트식 화자는 프루스트식 연인처럼 결심이 행위, 행동, 확실성, 결정을 유발하여 그로써 자신의 안전하고 사적인 지식애적 고치에서, 즉 글쓰기와 사색이 삶의 지위와 약속을 획득했고 다른 삶의 지위들에 필적하는 보상과 만족을 부여해 줄 수도 있는 그 안식처에서 억지로 나오게 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진실과 결심을 회피한다. 이처럼 글로 쓰인 삶에 삶의 지위를, 문학적 시간에 현실적 시간의 지위를 부여하는 방식이야말로 프루스트식 탐색이 영속성을 이어 가는 이유다. --- p.270 모든 예술가는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을 보려고 공을 들인다. 그 이상을 보고 싶어 하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고 형태를 통해 앎이나 경험이 아닌 형태만이 발견해 낼 수 있는 것들을 불러내고 싶어 한다. 예술은 그저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미지의 가능성에 매달리는 걸 사랑하는 일이다. 예술은 경험을 포착해 형태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형태 자체가 경험을 발견하게 하고 형태가 경험이 되게 하려는 시도다. --- p.280 지금 나는 열네 살의 나 자신을 보고 있다. 나는 햇살을 받으며 서 있다. 우리 가족의 삶에 곧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점은 감지했으나 그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다. 나는 어디에 있게 될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앞으로 어떤 고난이 펼쳐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사진 속의 소년이 부럽다. 소년은 어리고 그 앞길엔 숱한 발견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몸에 대한 발견과 기쁨이, 아직 아무것도 모를 그 쾌감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슬픔과 패배도 소년을 기다리고, 여기에 더해 지루함의 늪도 기다린다. 소년은 그 늪가에 차츰 익숙해지고 심지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일 때 그곳에서 위안을 찾기도 한다. 정말로 그랬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소년은 언젠가 자신이 이 사진을 찍은 시절을 되돌아보고 싶어 하리라는 걸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딱히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를 의식(儀式)을 이미 예행연습 중이었는지도. --- pp.297~298 파울 첼란의 “언제나와 결코(zwischen Immer und Nie)”의 사이, 떠남과 머무름의 사이,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 사이, 프루스트의 보이지 않는 것과 중복되어 보이는 것(voir double dans le tems) 사이에서 그의 공간은 언제까지나 비현실적 영역일 것이다. 일어났을 수도 있었으나 일어난 적 없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비실재적이지 않으며 여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을까 봐 초조하고 때때로 일어나지 않거나 아직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하는. --- p.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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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년에게 묻고 싶다. 우리 둘 중 누가 진짜이고 누가 진짜가 아닌지.
하지만 나는 소년의 대답을 알고 있다. 우리 둘 다 진짜가 아니니까. ─본문 중에서 종종 어린 시절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을 열어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익숙한 곳이거나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웃거나 울며 지금의 나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 순간 사진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그 시절의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지금의 내가 이렇듯 자신을 다시 찾아올 줄 알았을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는 일어난 적 없는 일을 가장 잘 기억한다. ─본문 중에서 어쩌면 어린 시절에 꿈꿨던 지금의 나 자신은 그때 꿈꿨던 환상 속의 자신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나 자신이 과거의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닐지라도 그 환상을 지우거나 없앨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기대 속의 환상이든, 상상이나 기억 속의 환상이든 비실재적이라 꼭 사라져야 할 필요는 없다. 현재에서 다시 살아난 과거의 환상은 그 당시에는 실제로 일어난, 비실재적이지 않은 과거 속에 영원히 머물며 과거의 자신을 지켜 줄 마지막 증거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해서 비실재적이진 않았으며, 여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끝내 일어나지 않을까 봐 두렵고, 때로는 아직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하지만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작가는 17편의 자전적 에세이를 통해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 미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그 시간적 의미에 어떻게 접근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려 준다. 단지 사실이나 정보 또는 사유의 결론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 잘 알려진 작가 특유의 문학적 우아함으로 서서히 접근해 간다. 그것은 아주 자세한 기억을 토대로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의 친밀함,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만 할 수 있는 솔직함을 지니고 있다. 한편 예술가나 장소에 대한 새롭고도 정교한 분석 또한 놓치지 않는다. 작가의 감성적이며 정교하고 능숙한 글쓰기 방식은 책을 읽는 독자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함께 성찰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찾으려는 것, 우리가 붙잡으려는 것은 그곳에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을 찾는 일이 우리를 예술로 눈 돌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우리 자신, 우리 주변의 세상을 이해하려 할 때 예술에서 관건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의문, 기억, 해석이다. 심지어 사물의 왜곡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굴절이 관건이기도 하다. 예술은 발, 광채, 빛이 아니라 발자국을 보며 소리가 아닌 반향을 듣는다. 우리가 애착을 갖는 것이 사물 자체가 아님을 우리가 알 때, 우리의 사물에 대한 애착이 비로소 예술의 관건이 된다. ─본문 중에서 작가는 프로이트가 이탈리아에서 찾고자 했던 것과 카바피가 느낀 시간의 역류, 제발트가 흘려보낸 삶의 의미와 로메르가 바라본 진정한 사랑, 베토벤이 들려주고자 했던 침묵, 모네가 되찾아 주고자 한 기억, 프루스트에게 없었던 것과 그가 소유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페소아의 글 속에 깃든 비현실성 등을 문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비현실적 사유가 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그 근원 속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막연히 피어오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없애고 자신을 온전히 옮겨 놓는지에 대한 고찰의 결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가 왜 비현실적 인간으로서 비실재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만든다. 소설가로 더 많이 알려진 작가 안드레 애치먼이 프루스트를 공부하며 평생 동안 탐구해 온 비현실적 서법에 대한 인문 에세이집 『호모 이레알리스』를 통해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곁을 스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시간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나무 그루터기가 꼭 죽는 건 아니다. 더 이상 자라지 않을 뿐이다. 나무가 제대로 자라려면 새 가지가 나와야 하니까.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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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장소에 대한 아주 특별하고 우아한 에세이집 - 존 도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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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세상에 없었다면 안드레 애치먼이 그를 대신했을 것이다. - 리처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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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애치먼을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작가다. - 수잔 솔터 레이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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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이해하기 위한 작가의 통찰력은 결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 커커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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