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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은 무당 집안에서 태어나 천대받으며 살아간다. 기준이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재주를 살려 최고의 소리꾼이 되는 방법뿐이다. 어느 날, 판소리 명창 송흥록의 소리판이 열린다는 소문에 찾아간 곳에서 보기 드문 귀명창인 태평을 만난 기준은 대뜸 그에게 자신을 제자로 거둬 달라고 청을 하게 된다. 자신은 재주가 없어서 또랑광대도 되지 못한 사람이라며 한사코 거절하려는 태평을 기준은 설득한다.
“어르신께는 명창들에게 없는 것이 있어라우.” 갑자기 기준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뭔 말이다냐?” 태평의 물음에 기준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소리를 대하는 마음이지라우. 세상에 판소리를 잘하는 명창은 널렸지만 어르신만큼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구만요.” (중략) 갑자기 기준이 군목질을 하더니 소리 한 토막을 뽑았다. 송흥록의 단가 〈천봉만학가〉였다. (중략) “얼씨구.” 태평은 저도 모르게 추임새를 했다. 짧은 단가였지만 기준은 밀고 달고 맺고 푸는 소리의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듣고 사설과 곡조를 모조리 외워서 부르다니 놀라웠다. 배워서 한 소리가 아니라 타고난 소리였다. 기준은 하늘이 내린 목, 소리 광대라면 누구나 원하는 천구성을 가졌다. - 본문 72~73쪽 기준은 태평에게 소리를 배우고, 태평은 성심을 다해 어린 제자를 돌보고 가르친다. 그러나 기준은 태평의 가르침이 영 못마땅하다.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알쏭달쏭한 화두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기준의 바람과는 달리, 태평은 소리의 정신과 의미를 기준에게 전해 주는 것에 더욱 몰두하기 때문이다. “소리의 주인이 누구냐?” 농민군에 대한 설전 이후 태평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민초라는 말인 게라우?” 기준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민초뿐이겄냐? 고을 아전도 될 수 있고, 고관대작이나 임금님도 될 수 있지야. 허나 진정한 광대라면 제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똑똑히 알고 소리를 해야 하느니.” 소리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공평하지만, 광대는 제 본분을 지켜야 한다. 명창이든 또랑광대든 간에 광대는 민초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말을 기준에게 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본문 177~178쪽 기준은 태평이 〈화용도〉만을 고집하는 점이 이상했다. 어렵고 까다로운 〈화용도〉보다는 다른 판소리 열두 바탕을 두루 배워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싶었기에 기준은 태평에게 왜 〈화용도〉만을 고집하는지 직접적으로 묻는다. 그 물음에 태평은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한다. 득음을 하기 위해 소리를 갈고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슬 퍼런 송곳을 가슴에 품으라는 말을 차마 기준에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평이 만난 명창들은 소리 속에 송곳만 감춘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창검이 번득이기도 했고, 도끼가 날을 세우고 있기도 했다. (중략) 더 이상 〈화용도〉는 영웅호걸이 지략과 용기를 뽐내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또한 무과 급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호랑이에게 외아들을 잃은 시골 아낙, 임진왜란 때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막아 낸 연안 읍성의 백성들, 최소한의 먹을 것을 요구하다 난동을 피운 죄로 목이 달아난 훈련원의 군사들, 무거운 세금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등지고 도적이 되어 버린 전국 각지의 농민들. 태평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화용도〉에 나오는 군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천오백 년 전 중국 삼국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조선의 현실이었다. - 본문 194쪽 결국 기준은 태평이 자고 있는 틈을 타 곁을 떠나게 된다. “꼭 명창이 될라요.”라는 말을 남기고. 훗날 성인이 되어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한 ‘어전 광대’가 된 기준은 제자로 거두려 했던 아이의 죽음을 마주한 후에야 비로소 태평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가장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소리 광대는 보면 안 되는 세상의 비밀을 본 사람이라는 말, 판소리란 권력을 독차지한 양반들의 잔학과 탐욕을 고발하고 험난한 질곡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는 말, 그러므로 〈화용도〉의 모든 더늠에는 이름 모를 백성들의 한과 슬픔이 녹아 있다는 말이 귓속에 알알이 들어와 박혔다. 태평에게 수없이 들었지만 철저히 부정했거나 한 귀로 흘려보냈던 말이었다. - 본문 299쪽 기준은 태평이 자신에게 남긴 제목 없는 소리책을 받아 들고 고민한다. 〈화용도〉 소리책이다. 이 책의 이름은 태평이 이름 붙인 〈화용도〉인가, 아니면 세상에 알려진 〈적벽가〉인가? 고민하다가 기준은 ‘적벽 화용’이란 글자를 서책 제목으로 적는다. 이미 세상 사람들은 〈화용도〉를 〈적벽가〉라고 불렀다. 소리책의 진짜 주인인 소리 광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준은 무엇이라 불린들 어떠랴 싶었다. 어차피 적벽과 화용도에서 죽어 간 이름 없는 군사들의 피울음인 것을. - 본문 305쪽 판소리는 특정한 작가에 의해 어느 날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판소리는 이백 년 동안 소리꾼들이 한 대목씩 소리를 짜 넣어 이루어졌고, 더 넣었다고 해서 그것을 ‘더늠’이라 한다. 그 더늠에는 힘없는 백성들의 슬픔, 원망, 바람이 스며들어 있다. 소리꾼은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을 더늠에 담았다. 더늠은 현실에 대한 가장 날카롭고 치열한 비판이었음을 우리는 명창을 꿈꾸는 소년 기준의 성장과 함께 깨닫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