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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전집 4권
화개집, 화개집속편 양장
루쉰
그린비 201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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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루쉰전집』을 발간하며

화개집(華蓋集)
제기

1925년
글자를 곱씹다(1~2)
청년필독서 ― 『징바오 부간』의 설문에 답하여
문득 생각나는 것(1~4)
통신
논변의 혼령
희생의 계책 ― ‘귀화부’ 실경실경장 제13
전사와 파리
여름 벌레 셋
문득 생각나는 것(5~6)
잡감
베이징 통신
스승
만리장성
문득 생각나는 것(7~9)
‘벽에 부딪힌’ 뒤
결코 한담이 아니다
나의 ‘본적’과 ‘계파’
글자를 곱씹다(3)
문득 생각나는 것(10~11)
여백 메우기
KS군에게 답함
‘벽에 부딪힌’ 나머지
결코 한담이 아니다(2)
민국 14년의 ‘경서를 읽자’
평심조룡
이것과 저것
결코 한담이 아니다(3)
내가 본 베이징대학
자질구레한 이야기
‘공리’의 속임수
이번은 ‘다수’의 속임수
후기

화개집속편(華蓋集續編)
소인

1926년
참견과 학문, 회색 등을 같이 논함
흥미로운 소식
학계의 삼혼
고서와 백화
자그마한 비유
편지가 아니다
나는 아직 ‘그만둘’ 수 없다
부엌신을 보내는 날 쓰는 만필
황제에 대하여
꽃이 없는 장미
꽃이 없는 장미(2)
‘사지’
비참함과 가소로움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
공허한 이야기
이 같은 ‘빨갱이 토벌’
꽃이 없는 장미(3)
새로운 장미 ― 그렇지만 여전히 꽃은 없다
다시 한번 더
반눙을 위해 『하전』의 서문을 쓰고 난 뒤에 쓰다
즉흥일기
즉흥일기 속편
즉흥일기 2편
‘월급 지급’에 관한 기록
강연 기록
상하이에서 보내는 편지

화개집속편의 속편
샤먼 통신
샤먼 통신(2)
「아Q정전」을 쓰게 된 연유
『삼장법사 불경 취득기』 등에 대해서
이른바 ‘사상계의 선구자’ 루쉰이 알리는 글
샤먼 통신(3)
바다에서 보내는 편지

『화개집』에 대하여
『화개집속편』에 대하여

저자 소개 1

魯迅,본명 : 저우수런(周樹人), 자 : 위차이(豫才)

중국의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이자 교육가. 본명은 저우수런이고 자는 위차이이다. 중국 현대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루쉰은 당대의 중국 예술과 화에서 다른 어떤 작가와도 비견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적 영웅으로 찬양한 루쉰은 중국혁명의 지적 원천으로서 추앙받아 왔으며, 마오쩌둥을 위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장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부의 하옥, 아버지의 병사 등으로 어려서부터 고생스럽게 살았다. 청년시대에 진화론과 니체의 초인철학, 톨스토이의 박애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898년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입학,
중국의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이자 교육가. 본명은 저우수런이고 자는 위차이이다. 중국 현대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루쉰은 당대의 중국 예술과 화에서 다른 어떤 작가와도 비견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적 영웅으로 찬양한 루쉰은 중국혁명의 지적 원천으로서 추앙받아 왔으며, 마오쩌둥을 위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장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부의 하옥, 아버지의 병사 등으로 어려서부터 고생스럽게 살았다. 청년시대에 진화론과 니체의 초인철학, 톨스토이의 박애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898년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입학,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2년 졸업 후 일본에 유학, 고분학원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의학을 단념, 국민정신의 개조를 위하여 문예 활동에 힘썼다.

1905~1907년 혁명당원의 활동에 참가하고, ‘마라시력설’, ‘문화편지론’ 등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유럽의 피압박민족 및 슬라브계 작품에 공감하여 1909년 동생 저우쭤런(周作人)과 ‘역외소설집’을 공역하는 한편, 망명중인 장빙린(章炳麟)에게 사사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남경임시정부와 북경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일하면서 틈틈이 금석 탁본의 수집, 고서 연구 등에 심취하였다. 19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처음으로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을 사용, 중국현대문학사상 첫번째의 백화소설인 ‘광인일기’를 발표하여 신문학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5·4운동 전후 ‘신청년’ 잡지의 일에 참가하여 ‘5·4’ 신문화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1918년에서 1926년에 이르는 동안 창작을 계속하여 소설집 ‘눌함’, ‘방황’, 논문집 ‘분(墳)’, 산문시집 ‘야초’, 산문집 ‘조화석습’, 잡문집 ‘열풍’, ‘화개집(華蓋集)’, ‘화개집 속편’ 등을 출판하였다. 이 중에 ‘공을기(孔乙己)’, ‘고향’, ‘축복’ 등을 발표하여 중국 근대문학을 확립하였는데, 1921년 12월에 발표된 중편소설 ‘아Q정전(阿Q正傳)’은 중국현대문학사상 불후의 대표작으로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다. 많은 외국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였고, 1920년 이후에는 베이징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저우쭤런과 어사사를 조직하고, 1925년 청년문학사와 미명사(未名社)를 조직하였으나, 1926년 8월 베이양 군벌의 문화 탄압과 격돌한 베이징 학생애국운동 지지로 말미암아 베이징을 탈출, 아모이대학 중문과 주임으로 부임하고, 1927년 1월 당시의 혁명 중심 광저우(廣州)에 이르러 중산대학의 교무주임이 되었다. 1927년 가을 상하이의 조계에 숨어 쉬광핑(許廣平)과 동거하며 문필생활에 몰두하는 한편, 창조사, 태양사 등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적 그룹 및 신월사(新月社) 등 우익적 그룹에 대한 논전을 통하여 매우 전투적인 사회 단평(短評)의 문체를 확립하였다.

한편 소비에트 러시아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0년 전후하여 중국자유운동대동맹, 중국좌익작가연맹과 중국민권보장동맹에 참가하여 국민당 정부의 독재 통치와 정치 박해에 항거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뒤에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 예술지상주의 및 소품문파(小品文派)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역사소설집 ‘고사신편’을 출판하였고, 대부분의 작품과 잡문은 ‘이이집’, ‘삼한집’, ‘이심집’, ‘남강북조집’, ‘위자유서’, ‘준풍월담’, ‘화변문학’, ‘차개정잡문’, ‘차개정잡문 이편’, ‘차개정잡문 말편’, ‘집외집’과 ‘집외집습유’ 등에 수록되었다.

또 1931년부터 판화 운동도 지도하여 중국 신판화의 기틀을 다졌다. 루쉰의 일생은 중국 문화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다. ‘미명사(未名社)’, ‘조화사(朝花社)’ 등 문학 단체를 영도하고 지지하였으며, ‘국민신보부간’, ‘망원(莽原)’, ‘어사(語絲)’, ‘분류(奔流)’, ‘맹아(萌芽)’, ‘역문(譯文)’ 등 문예잡지를 주편하였고, 청년 작가를 열성적으로 적극 배양하였다. 외국의 진보된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 힘쓰고, 국내외의 저명한 회화, 목각을 소개하였으며, 대량의 고전문학을 수집, 연구, 정리하고, ‘중국소설사략’, ‘한문학사강요’를 저술하였으며, ‘혜강집’을 정리하고 ‘회계군고서잡록’,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 ‘당송전기록’, ‘소설구문초’ 등등을 집록하였다. 죽기 직전에는 항일투쟁 전선을 둘러싸고 저우양(周揚) 등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대체로 그의 주장에 따른 형태로 문학계의 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그의 문학과 사상에는 모든 허위를 거부하는 정신과 언어의 공전이 없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1936년 10월 19일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나고 민중 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공제(公祭)를 거행하여 훙자오만국공묘에 묻혔다. 1956년 루쉰의 유해는 훙커우공원에 이장되었다. 1938년 ‘루쉰전집’ 20권이 출판되었다. 그를 혁명의 모범이자 사상의 근원으로 여긴 마오쩌둥에 의해 20세기 내내 중국을 지배한 개혁과 혁명적 변화의 선동가로서 거의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다.

인민정부 성립 후, 루쉰의 저서는 분야별로 나뉘어 ‘루쉰전집’ 10권, ‘루쉰역문집’ 10권, ‘루쉰일기’ 2권, ‘루쉰서신집’이 간행되었고, 루쉰이 편교(編校)한 고적(古籍) 여러 종류도 다시 간행되었다. 1981에는 ‘루쉰전집’ 16권이 출판되었다. 베이징, 상하이, 사오싱, 아모이 등지에는 전후하여 루쉰 박물관, 기념관 등이 건립되었다.

루쉰의 다른 상품

역자 : 루쉰전집번역위원회
공상철, 김영문, 김하림, 박자영, 서광덕, 유세종, 이보경, 이주노, 조관희, 천진, 한병곤, 홍석표
역자 : 이주노(『화개집』)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현대중국의 농민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중국현대문학의 세계』(공저, 1997), 『중국현대문학과의 만남』(공저, 2006)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역사의 혼, 사마천』(공역, 2002), 『중국 고건축 기행 1, 2』(2002), 『중화유신의 빛, 양계초』(공역, 2008), 『서하객유기』(전7권, 공역, 2011), 『걸어서 하늘 끝까지』(공역, 2013) 등이 있다.
역자 : 박자영(『화개집속편』)
중국 화둥사범대학 중어중문학과에서 『공간의 구성과 이에 대한 상상 : 1920, 30년대 상하이 여성의 일상생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협성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2?: 1960~1070년대』(공저, 2009), 『동아시아 문화의 생산과 조절』(공저, 2011)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2000), 『중국 소설사』(공역, 2004), 『나의 아버지 루쉰』(공역, 2008) 등이 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2월 15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488쪽 | 761g | 150*220*30mm
ISBN13
9788976822291

책 속으로

“사막 위에 선 채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을 바라보면서, 기쁘면 크게 웃고, 슬프면 크게 울부짖고, 화가 나면 마구 욕하고, 설사 모래와 자갈에 온몸이 거칠어지고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며, 때로 자신의 엉킨 피를 어루만지면서 꽃무늬인 양 여길지라도, 중국의 문사들을 좇아 셰익스피어를 모시고 버터 바른 빵을 먹는 재미만 못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 나의 생명, 적어도 생명의 일부는 이미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적는 데에 쓰여졌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내 자신의 영혼의 황량함과 거칠음뿐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것들을 겁내지도, 덮어 두고 싶지도 않으며, 게다가 정말이지 조금은 이것들을 아끼고 있다. 이건 내가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라면 이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p.25

출판사 리뷰

1925년에 쓴 잡문을 모은 『화개집』

『화개집』(華蓋集)이라는 제목은 점칠 때의 용어 중 하나인 ‘화개운’에서 비롯한다. “화개가 위에 있으면 앞을 가린다”는 점괘처럼 루쉰이 현재 벽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1925년 중국은 쑨원의 사망 이후 국민당 우파가 득세하여 안으로는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 비판적인 지식인과 학생들의 활동이 통제당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과 만행에 휘둘리며 혼란한 정국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5.30운동’(일본인 면사공장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영국 경찰이 총질을 하며 과잉 진압한 결과로 일어난 대중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이 중국 혁명의 주체로서 새롭게 부상하고, 지식인들 또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화를 거듭하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루쉰은 청년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평소 소신에 따라 그들이 발언할 공간(『위쓰』語絲와 『망위안』莽原 등의 간행물)을 마련했지만, 발언하는 이는 매우 드물었고 오히려 정부와 사회,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공격만이 커져가자 실의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위축될 틈이 없었다. 베이징여사대 사건에 휘말렸고, 교육총장 장스자오(章士釗)로부터 교육부 첨사 직을 면직당했으며, 천시잉(陳西瀅)을 비롯한 현대평론파 무리의 공격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혁명 실패의 현실에 대한 풍자〉
이 당시 중국의 현실을 두고 루쉰은 만리장성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89쪽). 위대하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실은 “이제껏 헛되이 수많은 노동자들을 일하다 죽게 만들었을 뿐, 오랑캐를 막아 냈던 적이 있었던가?” 묻고는, “예전부터 있어 온 낡은 벽돌과 보수하기 위해 보탠 새 벽돌이 한데 연합하여 성벽을 이룬 채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당시에 이런 현실에 대한 인식은 쑨원 사후 국공합작이 힘을 잃으면서 외세의 침략과 횡포에 속수무책 당하는 사태가 확산되면서 커져갔다.
그리고 그 주범 중 하나인 국민당 우파를 비롯한 반(反)혁명 세력을 「전사와 파리」에서 이렇게 풍자한다. “전사(戰士)가 전사(戰死)했을 때, 파리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그의 결점과 상처 자국이다. 파리들은 빨고 앵앵거리면서 의기양양해하며, 죽은 전사보다 더욱 영웅적이라 여긴다. 그러나 전사는 이미 전사하여, 더 이상 그들을 휘저어 내쫓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리들은 더욱 앵앵거리면서, 불후의 소리라고 스스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의 완전함은 전사보다 훨씬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어느 누구도 파리들의 결점과 상처를 발견한 적이 없다. 그러나 결점을 지닌 전사는 어쨌든 전사이고, 완미(完美)한 파리 역시 어쨌든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꺼져라, 파리들이여! 비록 날개가 자라나 앵앵거릴 수 있지만, 끝내 전사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 이 벌레들아!”(66쪽)

〈‘정인군자’라 불리는 위선적 지식인들과의 논전〉
이 시기 루쉰에게 핵심적인 사건은 베이징여사대(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과 이를 둘러싼 『현대평론』 문인들과의 논전이다. 베이징여사대 사건은 교장 양인위(楊蔭楡)가 ‘학풍정돈’을 내세우며 학생들을 압박하고 이에 저항하는 학생회를 해산하고 임원들을 퇴학시키면서 불거진 사건이다. 당시 이 대학 강사였던 루쉰은 학생들 편에 가담했고 폐교와 복교, 면직과 복직 소송 등을 거치며 사태 전반에 관련을 맺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베이징대학 교수 천위안(陳源, 필명은 천시잉) 등은 양인위를 옹호하면서 루쉰과 학생들을 비난하였다.
루쉰은 『현대평론』에 소속된 이 문인들을 ‘정인군자’(正人君子)라고 일컬었는데, 본래 품행이 단정하고 사욕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이 말을 루쉰이 되받아 ‘단정하고 엄숙함을 가장하는’ 이들의 행태를 풍자할 때 사용하였다. 즉, 정인군자들은 당국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반면, 루쉰의 글이나 그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짐짓 공정한 척하면서 사실을 왜곡하고 상대를 비하하는 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들은 공리(公理)와 도의(道義), 학문(學問)과 다수(多數)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겼지만, “여사대의 소요사태에는 베이징교육계에서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어느 지역, 어떤 출신 사람이 암암리에 선동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어 왔다”며 루머를 퍼뜨리고, “억압받고 있는 자를 대신하여 몇 마디 공평한 말을 했다면, 당신은 그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그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은 것”이라고 매도하였다.
정인군자들의 황당할 정도로 더럽고도 집요한 공격에 대해 루쉰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 하나하나를 되받아치며 비판의 칼날을 벼리었다. 천위안이 여사대를 ‘냄새 나는 측간’에 비유했을 때 루쉰은 그것이야말로 천위안 무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받아쳤다. “흑막 속에 숨은 채 모른다는 말만 되뇌고, 폭군을 위해 뛰어다니면서도 국외자인 양 자처하며, 뱃속 가득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공정한 웃음 띤 얼굴을 가장하고, 누군가 자신이 관찰한 바의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말하면 ‘뜬소문’이라는 말로 무책임한 무기를 삼는다. 구더기로 가득 찬 이런 ‘냄새 나는 측간’은 말끔히 청소하기도 어렵다.”(120쪽)


1926년에 쓴 잡문을 모은 『화개집속편』

1926년의 루쉰은 여전히 ‘화개’ 아래에서 답답한 상태로 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때에야말로 창작활동이 왕성한 때여서, 『아침 꽃 저녁에 줍다』와 『들풀』, 『새로 쓴 옛날이야기』 등으로 묶인 글들도 같이 창작했다. 잡문과 시와 산문과 소설이라는 각양각색의 장르를 동시다발적으로 발표하면서 다양한 문체를 선보이던 시기였다.

〈“나는 그들의 경멸을 경멸합니다”〉
현대평론파 정인군자들과의 논전은 해를 넘겨 전개되었다. 그리고 3월 18일의 참사 이후 더욱 첨예해진다.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는 뜻을 담아 청원하러 모인 시민과 학생 시위대를 향해 정부군이 발포한 이 사건으로 루쉰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무려 47명이 사망하였지만, 정인군자들은 참혹한 사건 앞에서도 여전히 공정성의 가면을 쓰고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희생자에 대한 유언비어를 활자화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루쉰에 대한 천위안의 비판 또한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학원사태 배후설 유포, 출신 시비, 표절 시비, 잡문집 비방, 소문 위조, 생김새에 대한 인신공격 등 다양하고 치졸하게 이뤄졌다.
루쉰은 이들의 언론 왜곡과 집요한 시비 걸기에 무력하게 있지 않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자신에 대한 사적인 추문과 비방에 대해서도 공적인 무대에 올려 공론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판을 하나하나 들어 본 다음 그대로 맞받아치면서 그 비판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기도 하였다. “여러 곳에서 비방을 받고 습격을 당했지만 이제는 상처도 없는 것 같고 더 이상 통증도 느끼지 못합니다.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더라도 하나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 나는 이제 물러날 데가 없는 곳까지 물러났을 때 그때 나와서 그들과 싸우고 그들을 경멸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멸을 경멸합니다.”(496쪽)
루쉰이 자신의 명예나 위신이 떨어지는 것에 굴하지 않고 진흙탕 싸움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런 논전을 지속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 위선적인 지식인 집단이 사실을 어떻게 왜곡해서 기득권의 이익을 수호하는지, 여론을 어떻게 독점하여 민의를 좌절시키는지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훗날 『루쉰잡문선집』을 펴낸 취추바이(瞿秋白)가 루쉰은 천위안을 일개인이 아니라 ‘보통명사’로 대했다고 말한 바와 같이 루쉰은 지식인 집단의 성격에서 좀더 큰 권력집단의 생리와 중국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를 보고 투쟁했던 것이다.

〈베이징에서 샤먼으로〉
3.18참사 이후 루쉰은 당국의 수배령을 피해 오랫동안 머물렀던 베이징을 떠난다. ‘화개집속편의 속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문집의 뒷부분은 상하이를 거쳐 도달한 샤먼에서 쓴 글이다. 그리고 이 문집의 마지막 글은 다시 샤먼을 떠나 광저우로 이동하는 바다 위에서 씌어졌다. 이런 점에서 1926년의 상반기가 전투의 시기였다면 하반기는 모색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샤먼에서 보낸 4개월은 루쉰의 생애 가운데 가장 분주하면서도 무료한 나날들이었다. 강의 외에도 대학의 사무와 잡다한 관계로 바쁘기는 했지만 집필은 많지 않았다. 현대평론파와의 치열한 논전으로 시작했던 1926년은 샤먼에서 고즈넉하고 쓸 말 없는 마음 상태로 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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