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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전집 5권
이이집, 삼한집 양장
루쉰
그린비 201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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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루쉰전집』을 발간하며

이이집(而已集)
제사

1927년
황화절의 잡감
중국인의 얼굴
혁명시대의 문학 ― 4월 8일 황푸군관학교에서의 강연
『노동문제』 앞에 쓰다
홍콩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
독서 잡담 ― 7월 16일 광저우 즈융중학에서의 강연
통신
유헝 선생에게 답함
‘대의’를 사양하다
‘만담’을 반대하다
‘자연 그대로의 유방’을 우려하다
‘우두머리’를 제거하다
‘격렬’을 말하다
『위쓰』를 압류당한 잡감
‘공리’의 소재
밉살 죄
‘예상 밖으로’
새 시대의 빚 놓는 방법
위진 풍도?문장과 약?술의 관계
사소한 잡감
다시 홍콩에 관한 이야기
혁명문학
『진영』 제사
타오위안칭 군의 회화전시회 때 ― 내가 말하려는 몇 마디 말
루소와 취향
문학과 땀 흘림
문예와 혁명
이른바 ‘궁중 문서’에 대한 이야기
예언의 모방 ― 1929년에 나타날 자질구레한 일
[부록] 50명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다

삼한집(三閑集)
서언

1927년
소리 없는 중국 ― 2월 16일 홍콩청년회에서의 강연
어떻게 쓸 것인가? ― 밤에 쓴 글 1
종루에서 ― 밤에 쓴 글 2
구제강 교수의 ‘소송을 기다리라’는 사령
비필 세 편
모필 두 편
홍콩의 공자 탄신 축하를 말하다
애도와 축하

1928년
‘취한 눈’ 속의 몽롱
쓰투차오 군의 그림을 보고
상하이에서 루쉰의 공고
문예와 혁명
편액

머리
통신
태평을 바라는 가요
공산당 처형의 장관
나의 태도와 도량, 나이
혁명 커피숍
문단의 일화
문학의 계급성

1929년
‘혁명군 선봉’과 ‘낙오자’
『근대 세계 단편소설집』의 짧은 머리말
오늘날의 신문학 개관 ― 5월 22일 옌징대학 국문학회에서의 강연
황한의학
우리나라의 러시아 정벌사의 한 페이지
예융친의 『짧은 십 년』 머리말
러우스의 『2월』 서문
『어린 피터』 번역본 서문
부랑배의 변천
신월사 비평가의 임무
서적과 재물과 여인
나와 『위쓰』의 처음과 끝
루쉰 저서 및 번역서 목

『이이집』에 대하여
『삼한집』에 대하여

저자 소개 1

魯迅,본명 : 저우수런(周樹人), 자 : 위차이(豫才)

중국의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이자 교육가. 본명은 저우수런이고 자는 위차이이다. 중국 현대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루쉰은 당대의 중국 예술과 화에서 다른 어떤 작가와도 비견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적 영웅으로 찬양한 루쉰은 중국혁명의 지적 원천으로서 추앙받아 왔으며, 마오쩌둥을 위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장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부의 하옥, 아버지의 병사 등으로 어려서부터 고생스럽게 살았다. 청년시대에 진화론과 니체의 초인철학, 톨스토이의 박애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898년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입학,
중국의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이자 교육가. 본명은 저우수런이고 자는 위차이이다. 중국 현대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루쉰은 당대의 중국 예술과 화에서 다른 어떤 작가와도 비견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적 영웅으로 찬양한 루쉰은 중국혁명의 지적 원천으로서 추앙받아 왔으며, 마오쩌둥을 위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장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부의 하옥, 아버지의 병사 등으로 어려서부터 고생스럽게 살았다. 청년시대에 진화론과 니체의 초인철학, 톨스토이의 박애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898년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입학,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2년 졸업 후 일본에 유학, 고분학원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의학을 단념, 국민정신의 개조를 위하여 문예 활동에 힘썼다.

1905~1907년 혁명당원의 활동에 참가하고, ‘마라시력설’, ‘문화편지론’ 등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유럽의 피압박민족 및 슬라브계 작품에 공감하여 1909년 동생 저우쭤런(周作人)과 ‘역외소설집’을 공역하는 한편, 망명중인 장빙린(章炳麟)에게 사사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남경임시정부와 북경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일하면서 틈틈이 금석 탁본의 수집, 고서 연구 등에 심취하였다. 19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처음으로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을 사용, 중국현대문학사상 첫번째의 백화소설인 ‘광인일기’를 발표하여 신문학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5·4운동 전후 ‘신청년’ 잡지의 일에 참가하여 ‘5·4’ 신문화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1918년에서 1926년에 이르는 동안 창작을 계속하여 소설집 ‘눌함’, ‘방황’, 논문집 ‘분(墳)’, 산문시집 ‘야초’, 산문집 ‘조화석습’, 잡문집 ‘열풍’, ‘화개집(華蓋集)’, ‘화개집 속편’ 등을 출판하였다. 이 중에 ‘공을기(孔乙己)’, ‘고향’, ‘축복’ 등을 발표하여 중국 근대문학을 확립하였는데, 1921년 12월에 발표된 중편소설 ‘아Q정전(阿Q正傳)’은 중국현대문학사상 불후의 대표작으로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다. 많은 외국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였고, 1920년 이후에는 베이징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저우쭤런과 어사사를 조직하고, 1925년 청년문학사와 미명사(未名社)를 조직하였으나, 1926년 8월 베이양 군벌의 문화 탄압과 격돌한 베이징 학생애국운동 지지로 말미암아 베이징을 탈출, 아모이대학 중문과 주임으로 부임하고, 1927년 1월 당시의 혁명 중심 광저우(廣州)에 이르러 중산대학의 교무주임이 되었다. 1927년 가을 상하이의 조계에 숨어 쉬광핑(許廣平)과 동거하며 문필생활에 몰두하는 한편, 창조사, 태양사 등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적 그룹 및 신월사(新月社) 등 우익적 그룹에 대한 논전을 통하여 매우 전투적인 사회 단평(短評)의 문체를 확립하였다.

한편 소비에트 러시아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0년 전후하여 중국자유운동대동맹, 중국좌익작가연맹과 중국민권보장동맹에 참가하여 국민당 정부의 독재 통치와 정치 박해에 항거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뒤에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 예술지상주의 및 소품문파(小品文派)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역사소설집 ‘고사신편’을 출판하였고, 대부분의 작품과 잡문은 ‘이이집’, ‘삼한집’, ‘이심집’, ‘남강북조집’, ‘위자유서’, ‘준풍월담’, ‘화변문학’, ‘차개정잡문’, ‘차개정잡문 이편’, ‘차개정잡문 말편’, ‘집외집’과 ‘집외집습유’ 등에 수록되었다.

또 1931년부터 판화 운동도 지도하여 중국 신판화의 기틀을 다졌다. 루쉰의 일생은 중국 문화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다. ‘미명사(未名社)’, ‘조화사(朝花社)’ 등 문학 단체를 영도하고 지지하였으며, ‘국민신보부간’, ‘망원(莽原)’, ‘어사(語絲)’, ‘분류(奔流)’, ‘맹아(萌芽)’, ‘역문(譯文)’ 등 문예잡지를 주편하였고, 청년 작가를 열성적으로 적극 배양하였다. 외국의 진보된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 힘쓰고, 국내외의 저명한 회화, 목각을 소개하였으며, 대량의 고전문학을 수집, 연구, 정리하고, ‘중국소설사략’, ‘한문학사강요’를 저술하였으며, ‘혜강집’을 정리하고 ‘회계군고서잡록’,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 ‘당송전기록’, ‘소설구문초’ 등등을 집록하였다. 죽기 직전에는 항일투쟁 전선을 둘러싸고 저우양(周揚) 등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대체로 그의 주장에 따른 형태로 문학계의 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그의 문학과 사상에는 모든 허위를 거부하는 정신과 언어의 공전이 없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1936년 10월 19일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나고 민중 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공제(公祭)를 거행하여 훙자오만국공묘에 묻혔다. 1956년 루쉰의 유해는 훙커우공원에 이장되었다. 1938년 ‘루쉰전집’ 20권이 출판되었다. 그를 혁명의 모범이자 사상의 근원으로 여긴 마오쩌둥에 의해 20세기 내내 중국을 지배한 개혁과 혁명적 변화의 선동가로서 거의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다.

인민정부 성립 후, 루쉰의 저서는 분야별로 나뉘어 ‘루쉰전집’ 10권, ‘루쉰역문집’ 10권, ‘루쉰일기’ 2권, ‘루쉰서신집’이 간행되었고, 루쉰이 편교(編校)한 고적(古籍) 여러 종류도 다시 간행되었다. 1981에는 ‘루쉰전집’ 16권이 출판되었다. 베이징, 상하이, 사오싱, 아모이 등지에는 전후하여 루쉰 박물관, 기념관 등이 건립되었다.

루쉰의 다른 상품

역자 : 루쉰전집번역위원회
공상철, 김영문, 김하림, 박자영, 서광덕, 유세종, 이보경, 이주노, 조관희, 천진, 한병곤, 홍석표
역자 : 홍석표(『이이집』)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의 근대적 문학의식의 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천상에서 심연을 보다―루쉰의 문학과 정신』(2005), 『현대중국, 단절과 연속』(2005), 『중국의 근대적 문학의식 탄생』(2007), 『중국현대문학사』(2009), 『중국 근대학문의 형성과 학술문화담론』(2012) 등이 있다.
역자 : 김하림(『삼한집』)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魯迅 문학사상의 형성과 전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조선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루쉰의 문학과 사상』(공저, 1990), 『중국문화대혁명시기 학문과 예술』(공저, 2007)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인도 다시 읽는 중국사람 이야기』(1998), 『한자왕국』(공역, 2002), 『중국의 차문화』(공역, 2004), 『차가운 밤』(2010) 등이 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2월 15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504쪽 | 747g | 150*220*35mm
ISBN13
9788976822307

책 속으로

“청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중국을 소리 있는 중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대담하게 말하고 용감하게 나아가면서 모든 이해관계를 잊어버리고 옛사람들을 밀어 치우고 자기 진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진실, 이것은 물론 쉽지 않습니다. 오로지 진실한 소리만이 비로소 중국 사람들과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진실한 소리가 있어야만 비로소 세계의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 나갈 수 있습니다.”

---p.266

출판사 리뷰

1927년에 쓴 잡문을 모은 『이이집』

『이이집』(而已集)이라는 제목은 루쉰이 이 문집의 ‘제사’(題辭)로 삼은 ‘따름이다’(而已)를 뜻한다. 천시잉이 루쉰의 잡문에 대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던져넣어 버렸다”며 비방한 적이 있는데, 이에 루쉰이 “잡감마저도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던져넣어 버릴 때면 / 그리하여 ‘따름’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맞받아친 것이 이 제목의 유래이다. 즉, 루쉰의 논전은 1927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만 이때는 수배를 피해 베이징을 떠나 샤먼에 머물렀다가 광저우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상하이에 정착하게 되는 시기이므로, 기존 현대평론파와의 논전은 줄어들고 대신 새로운 논쟁이 벌어진다.

〈전기 잡문과 후기 잡문의 교량 역할〉
1927년은 루쉰 자신의 신변 변화와 함께 사상적인 변화도 일어나는 시기이다. 4월 12일 장제스가 일으킨 쿠데타로 말미암아 쑨원이 이끌던 국공합작과 국민혁명은 수포로 돌아갔고,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 인사들이 숙청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해 1월부터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루쉰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체포당한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지만,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어 실망하고, 결국 사직하게 된다. 특히 “청년을 살육하는 사람은 오히려 청년들인 듯하고, 그들은 다른 생명과 청춘을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 피의 유희의 주인공”(83쪽)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청년들에 대한 실망감이 매우 컸다. 혁명 때는 같은 진영에 있던 청년들이 서로를 모함하고 당국의 체포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루쉰은 더 이상 청년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과 경험으로부터 루쉰은 기존에 갖고 있던 사회진화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혁명과 계급성 등의 문제에 대해 천착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잡문집의 출판에서도 이런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이집』을 1928년에 출판하고 나서 『삼한집』을 1932년 9월에 출판하니 그 사이에는 4년의 간극이 있다. 이 4년의 간극이 루쉰의 사상적 변화를 은연중에 표현해주고 있는데, 그렇기에 『이이집』이 이전에 출판된 잡문집 『무덤』, 『열풍』, 『화개집』, 『화개집속편』의 연속이라 한다면, 그 뒤의 잡문집 『삼한집』, 『이심집』 등은 루쉰의 사상적 변화를 내용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이집』은 루쉰의 전기 잡문의 에필로그이면서 후기 잡문으로 나아가는 교량으로서 그의 사상적 변화의 단초를 포함하고 있다.

〈고전으로 현실비판 하기〉
루쉰의 글 중 특징적인 한 가지는 고전에 관한 주석 작업이든 서양 문학작품 번역이든 간에 그것이 갖고 있는 학문적 가치를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작업이 갖는 현재성, 그 내용과 관련된 사회비판적 현실을 의미화했다는 점이다. 이 문집에 실린 글 중 「위진 풍도?문장과 약?술의 관계」는 이런 점에서 백미 중에 백미라고 말할 수 있는데, 위진(魏晋) 시기 문인들의 특징과 사회상, 그리고 양자 간의 관계를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한편, 그 가운데에서 현실에 대한 강렬한 풍자의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조가 공융(孔融)을 죽이고 사마의가 혜강(?康)을 죽인 이유인 ‘불효’(不孝)는 다만 반대하는 자를 제거하기 위한 명목상의 죄에 불과하였음을 밝히는데, 이는 당시 국민당 당국이 ‘청당’(淸黨)이라는 명분으로 공산당원을 몰아내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체포 구금한 사태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직설적으로 밝히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잊지 않고 고전과 역사에 빗대어 현실을 풍자하는 루쉰의 필력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27~9년에 쓴 잡문을 모은 『삼한집』

『삼한집』(三閑集)의 ‘삼한’은 루쉰에 대해 “한가하고 한가하고 한가하다”며 ‘세 번의 한가’(三閑)로 루쉰의 계급성을 비웃은 창조사 동인 청팡우(成?吾)의 글에서 유래한다. 청팡우는 1927년 1월에 발표한 「우리들의 문학혁명을 완성하자」라는 글에서 “루쉰 선생은 화개(華蓋) 자리에 앉아서 그의 소설구문(小說舊聞)을 베끼고 있고, 이것은 일종의 취미를 위주로 하는 문예로 그 배후에는 반드시 취미를 위주로 하는 생활 기조가 자리 잡고 있다”라고 비판하며 루쉰이 유한자(有閑者)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비꼰 것이다. 『삼한집』에서 루쉰은 이를 되받아치며 자신을 향했던 계급적 칼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10년, 그 끝의 시작〉
1927년 9월 27일 광저우를 떠나 10월 3일 상하이에 도착한 루쉰은 동생 저우젠런(周建人)의 소개로 징윈리(景雲裏)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10년을 상하이에서 생활하게 된 루쉰은 교직에 몸담지는 않았으나 대학의 강연에는 응했고, 창작과 번역도 지속하였다. 1928년에는 창조사와 태양사 동인과 혁명문학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격렬한 논전의 과정과는 달리, 결과적으로는 좌익작가연맹(좌련) 결성으로 이어진다. 1930년 좌련의 영수로 추대되어 창립대회에서 강연을 한 루쉰은 이후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잡문을 통해 암울한 현실에 대한 발언을 계속하며 젊은이들이 깨어나길 바랐고, 좌련 기관지 『전초』을 발행하고 판화 등의 새로운 예술운동을 전개하며 미래를 준비하였다.

〈혁명문학 논쟁〉
신해혁명 이후 ‘혁명’은 중국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추세였기에 문예가라면 너나 할 것 없이 혁명문학의 옷을 걸쳐 입었었다. 그러나 1927년 국민당의 ‘청당’(淸黨) 이후로는 공산당 소탕의 분위기가 팽배하여 혁명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가 퍼지기도 하였다. “너무 ‘혁’하면 과격에 가깝고, 과격은 공산당에 가까워 ‘반혁명’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쉰은 늘 혁명문학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는데, 1928년 즈음에 창조사(創造社)와 태양사(太陽社) 동인들은 루쉰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루쉰이란 늙은이는 취한 눈으로 창밖의 인생을 내다본다”라거나 “낙오자”, “추접스러운 설교자”, “봉건 잔재”, “이중성을 지닌 반혁명 인물”, 심지어는 “파시스트”라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말이다.
루쉰은 「‘취한 눈’ 속의 몽롱」에서 이에 대해 적극 반론하는데, 가령 톨스토이에 빗대어 자신을 추접스러운 설교자라고 비난한 그들에 대해 “정부의 폭력, 재판 행정의 희극적인 가면을 찢어 버린 톨스토이의 몇 분의 일만큼의 용기도 없다”며 그들의 말뿐인 태도를 되돌려주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4.12쿠데타 이후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는 와중에도 ‘혁명커피숍’이나 차리고 추상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며 민중이 짓밟히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 루쉰은 이들과 치열한 혁명문학 논쟁을 벌이는 한편, 독자적으로 맑스주의 문예이론을 학습하고, 루나차르스키(Anatoly Lunacharsky), 플레하노프(Georgy Plekhanov), 파데예프(Aleksandr Fadeyev) 등의 관련 서적을 다수 번역하며 혁명문학론, 맑스주의 예술론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지 말이 아니다”〉
루쉰은 말한다. “기억건대 혁명 이전의 사회는 물론 지금처럼 학생을 증오하지도 않았으며, 학생들도 지금처럼 온순하지 않았다. 태도만 해도 오만하기 그지없어서, 사람들 가운데에 있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달라졌다. 온화하고 우아한 태도가 마치 옛날의 독서인과 같다. 나 역시 어느 대학의 강의실에서 이걸 언급하고서 말끝에 사실 지금의 학생은 온순해요, 아니 지나치게 온순하다고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천이지 독서나 말이 아니라고 강조한 바 있다.
루쉰의 청년을 향한 기대와 희망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꾸준히 유지된 것 중 하나이다. 4.12쿠데타 즈음에, 그리고 간혹 청년층에 대한 실망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은 듯하다. 『삼한집』에 실린 다양한 성격의 잡감문 중 편지글 대부분이 젊은이들의 고민에 대해 루쉰 자신이 성심성의껏 답하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루쉰의 남아 있는 편지가 약 3천 통이고, 유명세를 탄 기간을 20년으로 잡으면 약 사흘에 한 통 꼴로 편지를 쓴 것인데, 그 대부분 또한 청년들이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사회진화론적 사고가 파탄되었음을 고백했으면서도 중국의 미래는 그래도 청년들에게 기대해야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젊은 창작자나 번역자들을 위해 책을 주거나 교정교열을 보거나 서문을 써주기도 하는 등 독려하였다. 문학을 꿈꾸거나 ‘소리 없는 중국’에서 무언가 외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여전히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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