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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이라 불리는 명준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 dmswl 은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호수 쓰러질 듯 말 듯 도도하게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해설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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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신문에 실린 조그만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그 남자라고 말했다. 앤디 워홀(Andy Warhol).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알파벳까지 외운 첫번째 영어 이름일 것이다. 할머니는 신문과 잡지에서 그에 관한 기사나 사진을 발견하면 스크랩을 했고, 모르는 단어는 사전에서 뜻을 찾아내 영문 옆에 한글로 적어 넣었다. 할머니는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소년의 엄마는 가장의 부재가 남긴 재정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의 상점을 그만두고 급료가 더 높은 일을 찾았지만 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는데, 어쩌면 앤디 워홀이 그곳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폴이라 불리는 명준」중에서 “햇빛로 32단지 주민들에게 아래와 같은 사실을 통지함. 하나, 햇빛로 32단지에서 기르는 개들 중에 미친개가 있으니 찾아내서 제거하기 바람. 둘, 미친개를 식별할 수 있는 건 햇빛로 32단지에 거주 중인 십대 청소년들뿐임. 단, 그들도 다른 세대의 개만 식별 가능함. 셋, 그들은 타인의 개에 대한 정보를 같은 세대의 구성원은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됨, 법률적으로 타인의 재산권과 명예에 대한 훼손 행위가 될 소지가 있음. 넷, 미친개의 제거는 오직 미친개의 주인만 할 수 있음. 이를 어길 경우 법률적 분쟁의 여지가 있음. 다섯, 빠른 시일 내에 작업에 착수하기 바람. 만약 상황이 조기에 종식되지 않을 경우 적절한 행정조치가 있을 예정임. 본 통지문은 전문가들의 엄격한 감수와 충분한 법적 검토를 거친 후 작성된 것임을 보증함. 작성 및 발신, 국가관리국.”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중에서 군 제대 후 십년을 최대한 짧게 요약하려 했지만 쉽지 않다. 차라리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 지랄을 하더니 결국 이 꼴이구나.” 종일 잠만 자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오후에 일어나 찬밥을 물에 말아 휘젓고 있는 내 앞에 달걀부침을 내려놓으며 엄마가 한 말이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다가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듯 책을 펼쳐 들었다. 엄마는 동네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독서모임의 열성 회원이어서 매달 한권씩 책을 읽고 감상을 발표해야만 했다. 식탁에 머리를 처박은 채 밥을 퍼 넣다가 엄마에게 요즘은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책의 제목을 말했다. 나는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엄마 손에 있던 책을 낚아채서 표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신미영 소설집 『은하』. ---「은하」중에서 수진이 눈을 뜬다. 하마터면 더 오래 잠들어 있다 기훈과 마주쳐 민망한 꼴을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채 닫히지 않은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수진을 불안한 잠의 기운에서 건져낸다. 주위를 살펴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자마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움직여 자신의 얼굴과 몸을 더듬는다. 청바지의 단추 한개가 풀어진 걸 알고 깜짝 놀라지만 원래보다 작은 사이즈여서 저절로 풀렸거나 자다가 불편해서 무심결에 풀었을 가능성이 떠올라 마음을 놓는다. 다행히 지퍼는 단단히 잠겨 있고 셔츠의 단추도 늘 그랬듯 위로부터 두개만 빼고 모두 채워진 상태이며 진작 벗어던져도 좋았을 양말마저 그대로다. 오전 다섯시에서 7분 지난 시각. 수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얼굴을 살핀다. 끔찍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중에서 “있을까요? 호수로 가는 버스가.” 그녀의 목소리는 시적인 상상을 불러일으켜서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미소만 지었다. 여자와 나는 어깨를 바짝 붙인 채 서로의 보폭과 속도와 방향을 신경 쓰며 걸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 중에는 비와 대지가 만나서 일으킨 물과 흙의 내음이 가득했다. 가벼운 공기와 차가운 물의 기운 속에서 나의 정신은 점점 맑아졌다. 마침내 차도에 이르러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몇 미터 앞쪽에 줄지어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을 발견했을 때는 약간 아쉬운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걸음을 멈췄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든 정류장의 정면 벽 한복판에 버스 노선도가 붙어 있었지만 무심하게 기어가는 지렁이의 몸뚱이처럼 구부러진 노선 위에 점으로 표시된 지명 어디에도 호수가 연상되는 곳은 없었다. ---「호수」중에서 영주와 내가 경마공원에 간 건 백 퍼센트 우연이었다. 원래 우리의 목적지는 서울랜드였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몽환적인 형상으로 떠다니는 흰 구름, 신나는 음악과 온갖 꽃들의 울긋불긋하고 유치찬란한 향연, 그리고 롤러코스터의 비현실적인 질주.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영주를 그런 것들의 한복판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나흘 전에 영주는 주 2회 수업에 오십을 받던 수학 과외에서 잘렸다. 송파구 방이동에 살던 그들 가족이 용인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게 학생의 엄마가 밝힌 사유였다. 영주는 학부모에게 말했다. 용인 어디로 가시느냐고, 수지 정도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학부모는 웃으면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보자고 말했다.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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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결말까지 단숨에 데려가는 흡인력
간단하지 않은 생각거리 끝에 깨닫는 이야기의 매력 「폴이라 불리는 명준」은 이민 가정에서 자란 한국계 미국인 ‘이명준’과 세계적인 미술가 앤디 워홀의 삶이 교차하는 이야기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앤디 워홀은 ‘최후의 만찬’ 미니어처를 사는데, 이 일은 나비효과처럼 이명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배우가 된 이명준은 이름있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중년이 되며 서서히 잊혀간다. 그러던 중 브로드웨이 극단의 앤디 워홀 역 모집 소식을 들은 이명준은 오디션에 지원하고, 외형적 차이를 극복하며 배역을 따낸다. 자신의 캐릭터에 사로잡히고 만 이명준의 삶은 달라지게 되는데…… 운명같이 이어지는 우연의 연쇄가 긴장감을 증폭시키며 읽는 이를 결말까지 단숨에 데려간다.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는 ‘햇빛로 32단지’라는 가상의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거주민들은 미친개를 처분하라는 ‘국가관리국’의 통지문을 전달받는다. 그 통지문의 내용은 무척 기이한데, 미친개를 식별할 수 있는 건 십대 청소년들뿐이며 그들도 다른 집의 개만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자신의 개가 미쳤는지를 확인하고, 미친개로 판명되면 자신의 손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주민들의 일상은 서서히 파괴된다. 흡인력 높은 가상의 이야기가 현실의 상황을 순간순간 환기시키는 수준 높은 정치적 우화라 할 만하다. 「dmswl」는 연극처럼 이어지는 기이한 연출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현우’와 ‘윤희’의 고등학생 딸 ‘은지’의 자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자친구 ‘민수’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은 그 죽음 이후 밝혀진다. 딸을 잃은 둘은 ‘dmswl’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출산에 이르는 여고생의 임신 일기를 사진과 함께 올린다. 학교에는 그 사진이 은지의 모습이라는 소문이 돌고 민수가 찾아와 계정을 삭제할 것을 부탁하지만 둘은 아랑곳 않는다. 이 기이한 계정의 전말이 서서히 밝혀지며 독자들은 기억과 재현에 관한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은하」에 등장하는 ‘나’와 ‘미영’은 소설에 푹 빠진 대학생 커플이다. 취향은 극명하게 달랐지만, 그 다름에서조차 강한 끌림을 느끼며 둘은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그 둘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은하』라는 한권의 장편소설이다. 고등학생 부모의 실제 이야기를 각색한 이 소설을 놓고 둘은 언쟁을 벌이는데, 『은하』가 SNS의 사연과 문장을 도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일은 더 복잡해진다. ‘나’가 군대를 간 사이에 둘은 서서히 이별하고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나’는 미영이 『은하』라는 소설집을 쓴 것을 발견하고 미영이 나타나는 장소를 찾아 뒤따라다니기에 이른다. 소설과 현실, 현실과 소설 사이의 인과관계를 교묘하게 비틀어가며 아슬하게 이어지는 감정선이 일품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언어와 소통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모임 끝에 만취한 ‘수진’은 ‘기훈’의 집에서 일어난다. 마지막 술자리인 기훈의 집에 수진을 남겨놓고 친구들은 하나둘 각기 다른 이유로 귀가한다. 그 이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기훈과 수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두고 미묘하고 불쾌한 대화가 교차된다. 수진은 전화나 SNS로 자기가 잠들었던 순간에 대해 확인해가지만, 이는 수진의 불안과 서로의 의심을 키워나갈 뿐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진실은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아닐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호수」에도 소문이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다만 여기서 소문은 일상의 무료함을 뒤흔드는 역할을 한다. 중견작가인 ‘나’는 정부가 주최하는 문학 세미나에 참석하지만 행사에 금방 흥미를 잃고 자리를 뜬다.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고, 우산 없이 서 있는 여성을 발견한 ‘나’는 우산을 함께 쓰기를 권한다. 대화 끝에 ‘나’는 이 지역에 있다는 호수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지만, 둘의 여정은 이내 사라져버린 것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로 뒤바뀐다. 호수는 의문스러운 살인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며, 세계관의 차이를 확인시켜주는 장치가 되기도 하며 반복해 등장한다. 결말에 이르러 ‘나’는 또다른 호수 이야기를 창작하기에 이르는데,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쓰러질 듯 말 듯 도도하게」의 ‘나’는 어느 영화의 조감독인데, 우연히 본 고양이 이야기를 감독에게 꺼냈다가 곤경에 처한다. 주택가에서 한쪽 다리를 다쳐서 절룩거리는 고양이를 도와 동물병원까지 데려다준 이야기를 듣고 감독은 여주인공의 캐릭터를 위해 그 고양이를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나’는 딱 한번 만났을 뿐인 고양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지만 헛수고에 그친다. 그런 반면 시나리오에서 고양이의 비중은 점점 커져만 간다. 결국 후보로 선택된 고양이는 다리를 절지 않았고, 배역을 위해서는 다리를 다쳐야만 한다. 이 잔인한 상황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독자들은 이야기의 끝에서 ‘연출되고 꾸며지는 삶’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은 어느 커플의 즉흥적인 결정으로 시작한다. 빠듯한 경제 사정으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대학생 커플 ‘나’와 ‘영주’는 휴일 데이트를 위해 서울랜드로 향하다가 갑자기 경마공원으로 목적지를 바꾼다. 난생처음 와보는 경마공원, 그런데 기적이라 할 만큼 ‘영주’가 베팅하는 말은 매번 우승을 차지하고 둘은 큰돈을 거머쥔다. 이 기묘한 행운은 매주 이어지다가 ‘나’가 형의 결혼식 때문에 경마장을 가지 못하게 되며 돌연 끝나게 된다. 동시에 둘의 관계도 끝을 맺는다. 몇년 뒤 우연히 만난 ‘나’에게 영주는 한가지 비밀을 털어놓는데…… 사람에게 관계란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게 하는 작품이다. 이렇듯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은 각기 다른 일상에서 출발하며 모두의 경험을 조금씩 간지럽히지만, 어느 순간 일상을 아득히 초월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우연과 운명, 소통과 관계, 과거와 미래 등 간단하지 않은 생각거리를 제공받지만 이 과정은 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오기에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다. 서사가 파생시키는 갖가지 상념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독서경험 끝에 읽는 이는 자신의 자리와 자기를 주변에서 구성하는 ‘사회’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독자로 하여금 “잠시 다른 각도로 세상을 볼 수 있게”(해설, 김요섭)해주는 동시에 읽는 시간을 재미로 채워주는 이야기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본령이 아닐까. 작가의 말 해경(海卿)이 눈을 떴다. 그를 깨운 건 어쩌면 어떤 향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생김새를 관찰하고 향을 음미하던 해경은 그것이 한자로 레몬 영(?)과 레몬 몽(?)을 사용하는 영몽의 껍질임을 깨닫는다. 입맛을 다시며 영몽의 물기 없는 노란 껍질만 바라보던 해경은 금홍(錦紅)이 그것의 과육을 모두 먹어치우고 껍질만 남긴 것이라 단정한다. 해경은 영몽을 찾아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1930년대의 경성에서 영몽은 귀한 과일이었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백화점과 과일가게와 시장, 심지어 식당과 주점과 찻집까지, 과일이 있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가 물었지만 영몽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경은 온종일 거리를 헤매다 실의에 잠겨 친구의 화실에 들른다. 그곳에서 해경은 마침내 친구의 정물화 속에 그려진 영몽과 조우한다. 허탈한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던 해경은 탄식한다. 저건 영몽(??)이 아니라 영몽(靈夢)이로구나. 해경은 우리에게 이상(李箱)이라고 알려진 작가의 본명이며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다. 이상이 정말 영몽을 찾아 경성의 거리를 헤맸는지, 심지어 당시 경성에 영몽이라는 과일이 있기는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까, 저건 거짓말이다. 내가 오직 상상에 의존해서 지어낸 어설픈 픽션이며, 대략 십년 전, 종일 소설만 생각하며 습작에 몰두하던 시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머릿속에 던져진 작은 씨앗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이야기는 여전히 씨앗이다. 지금까지 대략 십년이 흘렀으니 저 씨앗이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으려면 앞으로 십년, 아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지난 십년 동안 다행히 나는 저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저것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저것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지 수시로 확인한다. 저것이 있어서 든든하고 마음이 놓인다. 저것을 만지작거리며 꿈을 꾸는 시간이 나는 좋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나의 여생이 되기를 바란다. 저것이 레몬 나무가 되지 않아도 좋다. 이대로 영원히 씨앗으로 남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깨닫는다. 어쩌면 저 씨앗이 나의 영몽(靈夢)일지 모른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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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학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연기’를 하고 있다. 그것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계에서 그나마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듯 필사적으로 대사를 치고, 제 등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세는 언제나 객석을 향해. 그 연기에 심혈을 기울이다보면 자연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이 충돌하게 되고, 그로 인한 확증편향은 더 견고해진다. 하지만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홀로 남는 밤이 되면 비로소 긴 그림자를 늘이며 불안이 찾아온다. 그 불안을 섬세하게, 과장하거나 섣불리 봉합하지 않으면서 바라보는 것이 명학수 소설의 주된 서사이다. 단호하고 냉정한 문체와 칼처럼 날렵한 대사들을 따라가다보면 어쩌면 대낮의 연기는 모두 밤의 불안을 고조시키기 위한 작가의 책략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불안 서사는 빈틈이 없고 핀 조명처럼 서늘하다. 문학의 오래된 힘은 불안에서 나왔다. 그 불안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디에 서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 힘을 아는 작가의 출현이 반갑다. -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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