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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1부 삶이 헛되다는 생각은 불현듯 찾아온다 내가 누구냐 묻는다면 어찌 우리는 죽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들처럼 구는가 산다는 건 깊은 고독 속에 있는 것 트라우마에 잠겨 죽지 않는 법 노망난 자의 쓸모없는 지혜 영원한 상실감에 대하여 죽음 앞에서 담담한 사람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다면 왜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을까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의 무게 2부 백만 가지 참견 속에서도 끝끝내 ‘나’로 살아가리 부주의한 칭찬과 경솔한 비판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의 문제…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석가에게 정신과 의사가 있었더라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과 나의 오랜 악연 당신은 누구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사는가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다 우리 삶에 끼어드는 수많은 훈수꾼 비교는 인간의 본능이다 네모난 세상에서 동그라미로 살아남기 나를 평가하는 당신은 나를 얼마나 아는가 3부 인생이란 길고 긴 터널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인연이 무엇이기에 내 옆자리의 당신 비탄에서 벗어날 골드타임 내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랑이었네 나는 그저 나인 것을 이 세상 사람은 모두 비정상 귀 기울이면 모두 알게 된다 우리는 불안과 함께 태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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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생존을 위해 일했지만 소비가 미덕이 된 현대에는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일하는 것만 같다. 말 그대로 ‘굶어서’ 죽거나 옷이 없어 ‘추워서’ 죽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본인의 삶에 만족하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당장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된다면 다음 욕구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놀아야 한다. 마음 편히 노는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발견한다.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며 친밀감을 느끼고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그런데 놀아본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놀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쉴 시간이 생겨도 휴식마저 기를 쓰고 열심히 한다. 우리는 어쩌다가 쉬는 시간조차 편히 누리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었을까.
---「어찌 우리는 죽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들처럼 구는가」중에서 나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살았을까. 이 나이가 되니 문득문득 지난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한가한 시간이면 내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잦아진 탓이다. 하나의 가치나 신념을 일부러 의식하고 살았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하다.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긴 세월은 저절로 흘러간다.’ 아일랜드 소설가 마리아 에지워스(Maria Edgeworth)가 남긴 말이다.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정말 다양하다. 쉽게 사는 사람, 어렵게 사는 사람, 평범하게 사는 사람, 남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 등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과연 무엇이 올바른지는 그 누구도 평가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만 집중하다가는 소중히 했어야 할 순간을 모두 흘려보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의 무게」중에서 어릴 때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고, 커서는 사회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산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오로지 타인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살다 보면 나를 잊게 된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리저리 얽힌 관계가 복잡하다. 이 복잡한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확립하고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흔한 방법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다. “너는 이런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너는 정이 많구나.” 이런 칭찬 속에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정체성이 숨어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나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정체성과는 다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 자기 이외의 사람이 보고 평가하는 나의 모습은 같을 수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당신은 누구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사는가」중에서 정신과에서 일하는 치료자가 정신질환에 노출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미쳐 돌아가는 사회에 갇힌 우리도 미치기 일보 직전인 경우가 많다. 러시아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은 당시 소련 땅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소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 솔제니친을 따라 사회를 정신병에 빗대어 표현한다면 나는 한국을 망상으로 오염된 편집증적 사회(paranoid society)라고 주장하겠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솔제니친처럼 거대한 정신병동을 탈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의 편집증적 의심을 견디고 버티는 것이다. 고려 말의 문신 포은 정몽주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고 시조를 지어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사방에 까마귀뿐이면 누구와 노닐어야 한다는 말인가. 결국 어느 정도는 검은 물이 들 각오를 하는 수밖에는 없는가.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다」중에서 아내는 옷 하나를 만지작거리면서 나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이 치마 어때?” 나는 당연히 이렇게 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서로 허락받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는 용돈을 가지고 있으니 내게 묻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대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아내는 남편인 나를 통해 이 욕구를 채우고 싶었고 내가 해야 할 말은 “잘 골랐네. 역시 안목이 좋아” 같은 종류였으리라. 아내의 불평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반성했다. 부부간의 신뢰를 지키겠다는 약속은 깨지 않았으나 소통은 반쪽짜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매일 환자를 보는 소통 전문가니까 집에서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믿음이 있으면 소통은 알아서 뒤따라온다고도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믿음과 소통은 서로 다른 영역이었다. ---「내 옆자리의 당신」중에서 생로병사가 고통이라면 그 뿌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불안이다. 불안이란, 무엇인가가 걱정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태다. 의학적으로 덧붙인다면 ‘미래의 나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근심을 지나치게 할 때 불안을 겪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니 불안은 뜬구름 같다. 태어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행복하겠느냐는 질문에 이어 연속되는 질문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기왕 세상에 나왔으니 사는 동안이라도 괴롭지 않게, 재미있게 지내는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생로병사가 고통이라고 한들 그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데 어찌 삶에 그런 도피처 하나 없겠는가. ---「우리는 불안과 함께 태어난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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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착각
어째서 우리는 죽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처럼 구는가 “야심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커다란 행운과 재물이 굴러들어 올 것이라 믿기에 늘 무엇인가를 뒤쫓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단지 피로와 분주한 나날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Alain)의 말이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며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천지가 개벽하듯 엄청난 발전을 이뤄낸 지금, 우리의 삶은 왜 여전히 죽어라 일하던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정신과 의사이자 이화여대 의과대학 교수로서 50년을 보낸 90세 노교수 이근후는 말한다.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에서 해방되었다면 그다음엔 다시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 줄 휴식과 여가가 필요하지만 현대인들은 열심히 살다 못해 노는 것마저도 기를 쓰고 열심히 하려 하고 평소보다 빡빡한 스케줄을 세워 몸을 움직이고 자기 개발을 한다며 또다시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너무 열심히 살아서, 나를 돌아보지 못해서 지친 사람들은 삶에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인생이란 이런 퍽퍽하고 고된 일상의 반복일 뿐 아닐까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에 삶이 헛되다는 생각은 불현듯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를 향한 백만 가지 간섭과 멈출 수 없는 타인과의 비교 끝끝내 ‘나’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고, 커서는 사회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하지만 오로지 타인의 기준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나를 잊게 된다. 번아웃, 무기력증, 혹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정체 모를 불안감. 그저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위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진단은 가혹하기만 하다. 이근후 박사는 자신이 만나온 수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나를 휘두르려는 세상의 파도에 부딪혔을 때 맥없이 침몰하는 것만이 당신의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고. 당신에겐 물살이 정해준 방향이 아니라 여전히 당신만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줄 굳센 지느러미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잔잔한 수면에 조약돌을 하나 던져보자. 어떻게 될까. 일파만파 동심원이 퍼져나갈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동그라미는 위아래로 출렁이는 물결을 일으키며 나름의 사연을 만들고, 그 사연 속에는 불확실성과 불안, 실패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 내 삶에 조약돌을 던지는가. 혹은 세상의 물결이 나를 흔들리게 하는가. 부레옥잠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든, 송사리가 되어 수면 아래를 헤엄쳐 나가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_본문 〈네모난 세상에서 동그라미로 살아남기〉 중에서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 삶이 헛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행복할까요?” 언젠가 어느 학생의 질문에 이근후는 막힘 없이 “태어나지 않는 게 더 행복합니다”라고 답했다. 인생은 생로병사를 통해 많은 고통을 겪으며 허우적거리다가 때가 되면 하직하는 과정이니 마냥 행복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그러니 태어나지 않는다면 고통도 행복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아흔의 노교수는 어떻게 여전히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고통이며 공포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행하다. 하지만 고통과 공포조차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은 인생을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욕망과 만족, 행복과 불행, 사랑과 증오 사이를 떠돌며 산다. 행복하게 마음 편히 살자고 다짐하다가도 여전히 눈앞의 목표를 위해 스스로를 갈아 넣고, 타인과 매일 투덕거리면서도 살을 부대끼고, 그리고 사랑하지만 동시에 증오해 마지않는 애증의 가족들과 따듯한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삶의 모난 면과 매끈한 면 이 모두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게 될 것이다. 인생에 더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고. 아직 내 시선이 가닿지 않은 어딘가에 나를 기다리는 봄볕이 있을 거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