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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자리
양장
문진영
창비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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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0 미래
1 지해
2 자람
3 나래
4 지해
5 자람
6 지해
7 자람
8 나래
9 지해

작가 노트

저자 소개 1

文眞鍈

2009년 장편소설 『담배 한 개비의 시간』으로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눈 속의 겨울』, 중편소설 『딩』, 짧은 소설집 『햇빛 마중』 등이 있다. 2021년 김승옥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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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28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306g | 122*188*18mm
ISBN13
9788936439583

책 속으로

작고 흰 푸들 한마리를 한 손으로 꼭 끌어안은 채 고요히 그네를 타는 할머니. 할머니도 강아지도 특별히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별다른 표정 없이, 그러나 공허해 보이지는 않는 얼굴로, 그러니까 모든 게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그네를 타고 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규칙적인 리듬으로.
지해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게 좋았다.
--- p.36

모든 서사는 성장 서사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성장.
지해는 그 단어에 왠지 모를 저항감을 느꼈다.
--- p.38

모두가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치고, 눈빛을 나누지만 각자의 외줄 위를 걷고 있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줄 수가 없다.
나는 네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 줄 알아. 삐끗해서 떨어져버릴 것만 같은, 떨어져서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아 무서운 마음을 알아. 한편으로 저 아래는 너무 깊고 어두워서 바닥이란 게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몸에 힘을 풀어버리면 다 평온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도.
--- p.124

뭔가가 선명하게 만져진다는 것.
자신의 손을 거쳐 몸을 가진 무엇이 만들어진다는 게 서서히 기뻤다. 하면 할수록 조금씩 더 잘하고 싶어졌다. 그건 조금씩 자신을 갉아먹는 종류의 열망이 아니었다. 그저 매일 반복하면서, 미세하게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소중했다.
--- p.162

바람이 불자 버드나무들이 한꺼번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치 우아한 군무를 보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구나. 자람은 깨달았다.
내 흉터는 저 버드나무를 닮았구나.

직선도 곡선도 아닌 것.
단단하지만 유연한 것.
흔들리지만, 끊어지지 않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해삼과 멍게가 건강하게 살다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거라고, 자람은 생각했다.
--- pp.196~197

지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낮은 숨소리만 새근새근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지해가 말했다.
……살아주면 안 될까. 내 소원이야.
나래는 힘을 내서 응, 하고 대답했다. 두달 만에 처음으로 낸 소리였다.
--- p.204

언니. 나는 가끔 어떤 순간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면, 어떤 열망에 사로잡힐 때면, 모르는 얼굴들이 떠올라. 왜 나는 여기 있고, 누구는 없지? 그런 게 이상해. 나는 왜 살아 있지? 세상이 미쳐 날뛰는 것 같다가도, 근데 왜 이렇게 아름답지? 그런 생각이 들고. 웃다가도 갑자기 죄책감이 들고, 슬퍼할 만한 걸 슬퍼하다가도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단 생각을 해.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싶다가도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런 생각으로 바뀌고. 내가 너무 먼지 같다가도 또 가끔은 우주만큼, 너무 커다랗게 느껴지는 거야. 그러다 아, 그 사람도 우주였는데. 그리고 또 누가 그 사람을 우주만큼 사랑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거야.
--- pp.210~211

나래는 거실로 나가 커튼을 걷고, 도시의 밤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소란하던 세상이 어둠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래는 문득 불이 꺼져 있지 않은 창문들을 헤아려보았다. 왜 누구는 지금 깨어 있고, 누구는 잠들어 있을까.
미래야. 나는 네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언니, 하고 부르던 목소리. 읊조리듯 조곤조곤 이야기하곤 했던 그 목소리를 아직 잊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요함 속에서 나래는 발톱 끝의 욱신거림이 아주 조그만 심장박동처럼 느껴진다는 걸 알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밤들을 이렇게 깨어 있게 될까. 그러나 그 밤들이 아주 고통스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나래는 알았다.
--- pp.216~217

지해는 금목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실제로는 어떤 향기가 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부러 찾아볼 생각도 없었다. 지해의 머릿속에는 지해가 상상한 금목서가 있고, 그걸로 충분하니까. 손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마늘이나 생강 냄새, 꽃 향기가 한데 섞여 오묘한 냄새가 날 때가 있었는데,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지해는 가끔 자신의 손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내려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손은 순간 아주 낯선 것이 되었다가, 곧장 새삼스러운 실감과 함께 되돌아왔다.

식판에서 음식 찌꺼기를 씻어내는 손.
향기로운 핸드크림을 바른 손.
마늘을 다듬는 손.
서가를 더듬는 손.
키보드 위에서 머뭇거리는 손.
모든 손이 자신의 손이었다.

지해는 심호흡을 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한 문장만 나아가자,고 생각한다.

--- pp.225~226

출판사 리뷰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안고도 살아갈 수 있음을,
내일이 없는 자리에도 평온한 오늘이 찾아들 수 있음을

미래가 예고 없이 세상을 떠난 이후, 더는 소설을 쓸 수 없게 된 소설가 지망생 지해와 고통 없는 사랑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자람,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모를 만큼 무감각해진 나래는 하루하루 외줄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상을 보낸다.

한때 신춘문예 최종심까지 오른 적이 있는 지해는 이제 매일 무기력하게 방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다.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 어느 여자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오늘이 어제 살아본 오늘”일 뿐인 아득한 상황에서 이야기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뭔가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모두 버겁”다고 생각하는 지해에게 오늘은 견뎌야 할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자람은 과거 사고를 당한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지망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고, 이후 가정폭력을 가하기 시작한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첼리스트의 꿈도 포기해야 했다. 그런 자람은 일찌감치 독립한 동생 우람과 번듯한 첼리스트가 된 동기들을 부러워하며 자신에게도 가능했을지 모를 미래를 그려보지만, 어머니를 버릴 순 없다는 생각에 자해까지 해가며 매일을 버틴다. “고통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자문하면서.

미래의 쌍둥이 자매인 나래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신과 달리 세상을 잘 살아가는 듯 보였던 미래를 부러워했다. 동시에 미래는 나래에게 “세상이 다 몰라도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런 미래의 죽음은 나래로 하여금 삶을 향한 모든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 뒤로 삶에 대한 회의를 지닌 채 “고치 안에 몸을 숨기는 애벌레처럼” 막을 치고 살게 된 나래. 그런 나래에게 어느 날 지해가 전화를 걸어와 말한다. “……살아주면 안 될까. 내 소원이야.”

한때 미래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 당신에게
애틋하게 건네는 또 한번의 오늘에 대한 믿음

이처럼 내일을 잃어버린 채 오늘마저 위태로이 견디는 이들을 붙드는 것은 다름 아닌 서로의 손이다. 자람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 지해는 얼결에 작은 음식점에 취직해 일하기 시작하고, 일상의 곳곳에서 마주하는 이들의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자신을 잡아 이끈 자람의 손, 목가구를 만드는 동료 용이씨의 손. 화분을 가꾸고 길고양이를 돌보는 엄마의 손과 김밥을 마는 자신의 손. 그 손들을 통해 지해는 “뭔가가 선명하게 만져진다는 것”, “자신의 손을 거쳐 몸을 가진 무엇이 만들어진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한번 키보드 위에 손을 얹어본다. 일단은 그저 오늘치의 “한 문장만 나아가자,고 생각”하며.

자람은 자신에게 첼로 레슨을 듣는 민서를 볼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느끼지만, 헛된 기대는 고통만 안겨줄 뿐임을 되뇌며 마음을 접으려 한다. 그럼에도 자꾸만 민서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 자람은 문득 생각한다. 민서와 함께 산책하고 식재료를 사서 나란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매일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다시 한번 ‘매일’을 그려보게 된 자람은 뜻밖에 고양이 두마리를 키우게 되며 그들이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눈을 감을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겠다고 생각하고, 타인과 자신을 고통 없이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간다.

살아달라는 지해의 말을 듣고서야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온 나래는 미래의 유품을 살피다 우연히 미래의 블로그를 발견하고, 거기 적힌 일기들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미래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미래야. 나는 네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
고요함 속에서 나래는 발톱 끝의 욱신거림이 아주 조그만 심장박동처럼 느껴진다는 걸 알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밤들을 이렇게 깨어 있게 될까.
그러나 그 밤들이 아주 고통스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나래는 알았다. (216~17면)

소설은 지해, 자람, 나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미래의 일기를 교차해 보여줌으로써 각각의 오늘을 한데 겹쳐 보인다. 그로써 우리는 소설의 프롤로그 격인 0장에서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던 미래가 공기방울이 된 친구를 일컬어 “그애가 죽은 게 아니라, 그저 다른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라” 말했듯 미래 역시 다른 형태로 그들의 오늘에 자리하고 있음을, 미래의 자리가 영영 비어버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이야기의 끝에 놓인 미래의 일기는 작중인물들과 읽는 이 모두에게 선명한 희망을 남긴다.

그러면서도 내가 삶을 이리도 아름답게 느낀다는 것은 모순일까.
대단한 모험보다는 소소한 위험들을 함께하면서 그 떨림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갖고 싶다.
겁낼 줄도 알고 용기 낼 줄도 아는 사람을.
돌아볼 줄도 알고 내다볼 줄도 아는 사람을. (219면)

“상처를 극복하고 얻어낸 성장을 소망하기보다 흉터를 안고 유연하게 휘어지”(이서수, 추천사)면서 살아나가기로 결심한 이들의 이야기는 아픈 데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조차 심장이 뛰고 있다는 증거임을, 잔바람에도 흔들리되 결코 끊어지지는 않는 버드나무처럼 살아갈 수 있음을, 마침내 내일이 없는 자리에도 평온한 오늘이 찾아들 수 있음을 실감케 한다.

이렇듯 문진영의 소설은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우리를 끊임없이 삶 쪽으로 이끄는 호흡처럼 더없이 꾸준하고 그윽한 방식으로 읽는 이를 추동한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그를 위해 폭우 속으로 뛰어드는” 용기와 “도망치지 않고 시커먼 먹구름 아래 우산도 없이 서 있기로” 하는 선택을, “들리지 않아도 함께 소리 질러 울기로” 하는 결심을 가져주기를. 서로의 손을 붙들어주기를. 그때 찾아올 또다른 오늘을 기다려주기를. 그러니 “부디 살아주”(작가 노트)기를. 어느덧 한국문학의 미더운 이름으로 자리잡은 문진영의 소설이 그 지극한 마음을 안고 여기 도착했다.

작가의 말

돌아보니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있는 건 결국 기댈 수 있는 이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그런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당신에게.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소설이 미약하나마 어떤 인력이 되기를 바라며 썼다. 그 간절한 마음은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을 쓸 때까지 같았다.
(…)
부디, 지금 누구도 완전히 혼자이지 않기를.
살아주기를.

2024년 늦여름
문진영

추천평

문진영의 소설은 여름밤의 산책을 떠올리게 한다. 얼음물을 들고 수풀이 우거진 공원을 걷다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목이 마르지는 않은지 묻는 밤. 거기에는 이런 마음들이 있다. 반가움을 드러내고 싶은 속마음, 필요한 걸 먼저 헤아려보는 배려, 행여 대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물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용기. 그리고 문진영의 소설엔 그런 마음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외줄타기 하는 친구가 떨어질까봐 아래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과 위에서 그걸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겹치는 순간, 추락은 더이상 추락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포옹으로 변한다.
『미래의 자리』에는 상처를 극복하고 얻어낸 성장을 소망하기보다 흉터를 안고 유연하게 휘어지는 편을 택하겠다는 의지와 삶의 유일한 구심력인 사랑이 담겨 있다.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랑이 줄줄 흘러나오게 하는 이 소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대신 가장 깊은 것을 보여주는 작가 문진영은 “우주가 팽창하고 제멋대로 멀어지는 동안”에도 언제나 우리를 “애써, 힘껏” 끌어당긴다. - 이서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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