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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계의 오래된 사랑
앨리스와의 티타임 / 비거스렁이 / 교실 맨 앞줄 / 계단 / 마산 앞바다 / 디저트 아득한 어둠 저편의 아름다움 옆집의 영희 씨 / 우주류 / 입적 / 귀가 / 도약 / 개화 / 발견자들 / 스마트워치 작가의 말 추천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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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누군가가 빈자리를 채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루트벤은 다른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셸던 부인이 낯선 시공을 헤매며 만들어간 것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빈자리로 남은 세계가 아니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p.34 「앨리스와의 티타임」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본 적도 없을 우주 한복판에서 정연이 이처럼 흔들렸던 순간이 있었다. 정연은 잠시, 지영에게 저 틈 너머에 수많은 세계가 있다고, 지영도 원한다면 그 사이로 아득히 흩어지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맞지 않는 세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지영이 얼마나 대단하고 대견한지 진심으로 칭찬하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정연은 지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한 번 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었어.” --- p.64 「비거스렁이」중에서 “그러면 열리는 계단을 맨 처음 밟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야? 그런데 왜 밟아?” “글쎄, 모르고 열어버리는 거 아닐까? 너도 모르고 세 번이나 들어왔었잖아. 아니면 호기심이나 모험심 많은 사람이 하나씩 찾아낸 걸 수도 있지. 나는 처음에 누가 어떻게 계단을 발견했는지는 몰라. 그냥 관악캠 생길 때부터 있었다고만 들었어.” “난 모험심 같은 거 전혀 없는데. 정말이지, 처음에는 진짜 황당했다고.” --- p.96 「계단」중에서 사람이 죽으면 바다로 간다는 것은 새로운 것 없는 사실이다. 인구 밀집지에 인접한 해저에는 물에 녹은 탄소가 내는, 사이다 거품 같은 망자(亡者)의 잔여물을 부글부글 올려내는 기점이 있기 마련이다. 보통은 물속으로 꽤 깊이 들어가야 거품을 직접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심이 얕고 파도가 거의 일지 않는 바닷가에 커다란 덩어리 같은 잔여물이 떠다니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런 밀집된 잔여 에너지가 가까이에 모인 사람들의 에너지와 반응하여 림보를 만들어낸다. --- pp.111~112 「마산 앞바다」중에서 “옆집에 그게 산다고? 무섭지 않아?” “무섭긴. 본 적도 없는걸. 평소엔 조용해서 옆집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겠어.” “너도 참, 간도 크다. 그…… 떡대 아저씨들 왔다 갔다 안 해? ‘그들’은 혼자 안 다니잖아.” “아, 그 사람들은 몇 번 봤어. 엄청 심각한 얼굴로 오피스텔 입구 지키고 있는데, 그냥 지나가면 그뿐이야. 오히려 든든하지. 지금까지 좀도둑 한 번 안 들었대.” “나는 벽 하나 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징그러워서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꼭 두꺼비같이 생겼잖아.” --- p.157 「옆집의 영희 씨」중에서 -반상이 곧 우주다. 과학 잡지의 화사한 화보, 학교에서 빌려 온 과학소설, 달 유인 기지 건설 계획의 수립 과정이 담긴 동영상을 보고 싶어 투덜거리던 내게 어머니는 말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바둑이나 인생이나 수가 나지 않는 법이다. 교만하면 길을 잃는다. 반상이 곧 우주다. --- p.183 「우주류」중에서 내가 지구인이 아님을 안 것은 예순 살 무렵이었다. 물론 그때는, 우주선이 나타났을 때 미국 하늘에 걸려 있던 카시오페이아자리의 이름을 딴 ‘페이아’라는 말이 쓰이기 전이다. 맨 처음 나를 키운 주모는, 내 어머니가 하룻밤 묵는 사이에 나를 낳은 후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했다. 도무지 자랄 생각을 않는 늦된 아기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호의에 기대 여기저기 휩쓸려 다녔다. --- pp.206~207 「입적」중에서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정식으로 입양되기 전인 여섯 살 때, 나는 내 방에 걸린 거울을 보며 부모님의 말투나 행동을 흉내 냈었다. 패널을 쥘 때 왼쪽으로 조금 기울였다가 오른쪽으로 반 바퀴 돌리는 어머니의 습관이나,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이면 눈을 몇 번 깜박이는 아버지의 버릇을 그대로 따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지금까지 아무도-부모님도-이 사실을 모른다고 믿고 싶다. --- p.236 「귀가」중에서 옆에는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앉아 있고, 주위에서는 사람들이 전단지를 나눠 주고 구호를 외쳤어요. 저는 그 가운데 텐트에 앉아 계속 음식 생각만 했어요. 점점 내가 왜 거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옆에서 뭐라고 하는지도 안 들리고, 머릿속에 짜장면, 마카롱, 김치볶음밥, 호박케이크 따위만 계속 떠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죠. --- p.309 「발견자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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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틈 너머에 수많은 세계가 있다고,
원한다면 그 사이로 아득히 흩어지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익숙한 현실에서 살짝 넓어진 세계로 막막한 현재에서 조금 멀어진 미래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모험 정소연은 도약을 앞둔 한국 SF 앞에 놓여 있던 가장 탄탄한 디딤돌이었다. 피뢰침처럼 맨 앞에서 폭풍을 견뎌내는 활동가이고, 누구보다 높은 안목으로 모두의 하한선을 끌어올린 매서운 독자이며, 오랫동안 비어 있던 비평 영역을 대신해 멀리 보고 방향을 제시한 자신만만한 길잡이였다. (소설가 배명훈) 정소연의 개인들은 이 세계를 포기하는 대신 끝까지 붙들고, 틈새로 비치는 다른 가능성의 빛을 바라보며 앞으로 걸어간다. 그 마음을 따라 저벅저벅 나아가고 싶어지는, 맑은 반짝임을 지닌 소설들. (소설가 김초엽) 2005년 제2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에서 스토리를 맡은 만화 〈우주류〉로, 2006년 제48회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에서는 단편 〈마산 앞바다〉로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소연은 과작이지만 20여 년간 꾸준한 창작을 이어왔다. 그의 국내 유일한 단독 단행본 소설집 《앨리스와의 티타임》이 2024년 가을 출간된다. 데뷔 20주년을 맞는 내년에 《미정의 상자》를 펴내며 두 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이 책에는 정소연의 초기작들에서부터 최근 발표된 단편들까지 총 14편을 만날 수 있다. 일상에 틈입한 낯선 세계를 탐험하며 무지갯빛 사랑을 나누는 용기와 더불어 광활한 우주 안에서 멀지만 환하게 서로를 밝혀주는 굳건한 신뢰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익숙한 세계에 환상적인 창을 열어 우리를 해방하고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는, 정소연 소설의 매력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세계(異世界)에서 만나는 오늘 우리의 사랑 그 일이 벌어진 건 오히려 평범한 날이었어. 평범하게 모두가 나를 못 본 체하고,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척 앞만 보고 앉아 있던 5교시. 교실이 썩둑 잘리듯 갈라지고, 바닥과 벽이 부서졌지. 수학 선생님과 반 전체가 앉거나 선 모습 그대로 한 명씩 운동장으로 순간 이동하고, 교실은 마른 나뭇잎처럼 조각났어. (〈교실 맨 앞줄〉, p. 78) 수록된 소설들은 초기작인 〈마산 앞바다〉 〈우주류〉부터 2021년 발표면 〈교실 맨 앞줄〉까지 다양한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이다. 젠더 불평등, 퀴어 포비아, 집단 따돌림, 장애인 소외 등 여러 주제를 경유하며 발표 당시에도 현장성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창작 시기에서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더라도 지금 한데 모아 읽었을 때 우리에게 여전히 뼈아픈 문제들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정소연 소설의 여전히 유효한 현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익숙한 현실 조건에 발 묶이지 않고 SF의 세계로 무대를 이동하여 상상적인 틀을 세우고 인물과 인물, 인물과 세계의 갈등과 사랑을 선명하게 형상화한다. 시어도어 스터전이 “과학소설은 과학적인 요소가 없었다면 애당초 없었을 인간의 문제와 (그에 대한) 인간의 답을 둘러싼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하듯, 이세계나 우주 시대를 맞은 미래를 다루면서 그 안에서 인물들이 직면한 삶의 과제를 헤쳐나가는 여정을 몰입감 높게 보여준다. 인물들의 내밀하고 사적인 감정의 진동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려내면서도 사회적으로 의미화되는 여러 주제 의식을 경유함으로써 우리를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고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견고한 세계의 틈을 벌려 광활한 우주로 나아가는 모험 더 세월이 흘러 언니가 더 이상 수배자도 인폐분자도 아닌 지금까지도 납득이 안 돼요.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언니는 영등포교도소에서 봤던 언니보다도 멀리 있는 사람 같아요. 지금 내 나이일 때 언니는…… 뭐 했죠? 대구? 대구에서 뭐 했는데요? 화단 정비? 그때도 선 자르고 있었어요? 끈질기게도 팠네요. 전 정말 모르겠어요. 뭐가 그렇게 절실했는지. (〈개화〉, p. 291) 정소연의 소설은 이야기 자체의 재미와 더불어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소설 양식에도 충실하면서도, 우리를 기꺼이 허공으로 데려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과 마주 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러나 허구적인 기술이나 미래의 과학으로 손쉽게 해결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 가능성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장면들에서 포착되는 위대함에 있다. 두 사람만의 안락한 공간에서 머물지 않고 “향냄새가 나고, 신발이 나뒹굴고, 입과 코를 가리고 뛰어야 하는 세계로 나아가겠다”고 결심하는 〈계단〉의 서혜, 장애라는 신체 조건을 딛고 우주인이라는 오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우주류〉의 ‘나’, 많은 이의 혐오와 경계를 받는 외계인 ‘영희 씨’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권하는 그의 언어를 이해해가는 〈옆집의 영희 씨〉의 수정, 그리고 통제 사회에서도 끝까지 혁명을 꽃피우고자 끈질기게 씨앗을 뿌리는 〈개화〉의 언니 등 정소연 소설의 인물들은 의지와 선의로 엉망의 세계를 조금씩 바꿔나가는 빛나는 행보를 보여준다. 책임감과 희망을 놓지 않고 좌충우돌 길을 모색하는 소설의 인물들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과 시련에 맞닿아 고민의 끈을 연결하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좀 더 나아진 삶을 향해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다. 2024년 다시 만나는 정소연은 고된 현실에도 자신의 꿈과 신념을 잃지 않고 앞으로 한 발을 더 내딛어볼 채비를 하고 있는 모두에게 반갑고도 새로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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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은 도약을 앞둔 한국 SF 앞에 놓여 있던 가장 탄탄한 디딤돌이었다. 솔직하게 감탄하고 유려하게 표현하는 정소연의 문장에는 모두가 추구해야 할 SF의 공기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정소연의 소설은 SF 세계에 놓인 인간의 경험을 높은 해상도로 구현해낸다. 이 책에는 기민한 불안과 예리한 갈망, 자아의 어긋남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균열의 징후를 위대한 삶으로 이끄는 건, 세상뿐만 아니라 우주와도 맞서는 주인공의 용기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정소연의 소설은 내내 ‘조금 미래의 SF’였다. 그 미래가 거의 현실이 된 지금도 정소연의 소설은 여전히 대열 맨 앞줄에 있다. 그 자리가 더는 외롭지 않게 된 건 작가가 스스로 이루어낸 구원이자 성취일 것이다. - 배명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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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처음으로 SF를 읽고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정소연의 소설을 나침반 삼아 나아갔다. 내가 사랑하는 SF의 청명함과 아름다움이 정소연의 소설 속에 모두 있었기 때문이다. 정소연은 놀라운 솜씨로 세계와 개인을 엮어낸다. 외면하고 싶은 세계 속에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타인의 얼굴이 있다. 공고한 질서 위에 누군가가 힘겹게 그어놓은 빗금과 틈새가 있다. 그래서 정소연의 개인들은 이 세계를 포기하는 대신 끝까지 붙들고, 틈새로 비치는 다른 가능성의 빛을 바라보며 앞으로 걸어간다. 그 마음을 따라저벅저벅 나아가고 싶어지는, 맑은 반짝임을 지닌 소설들. - 김초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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