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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 조수삼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일러두기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01] 달단(??) [02] 올량합(兀良哈) [03] 여직(女直) [04] 일본(日本) [05] 유구(琉球) [06] 합밀(哈蜜) [07] 고창(高昌) [08] 토로번(土魯番) [09] 로진(魯陳) [10] 살마아한(撒馬兒罕) [11] 천축(天竺) [12] 파라문(婆羅門) [13] 역력파력(亦力把力刀) [14] 불름(佛?) [15] 소문답랄(蘇門答剌) [16] 우전(于?) [17] 묵덕나(默德那) [18] 천방(天方) [19] 조법아(祖法兒) [20] 람방(覽邦) [21] 합렬(哈烈) [22] 고리(古里) [23] 유산(溜山) [24] 아단(阿丹) [25] 남무리(南巫里) [26] 백송호아(白松虎兒) [27] 아속(阿速) [28] 걸력마아(乞力麻兒) [29] 흑갈달(黑葛達) [30] 흑루(黑婁) [31] 합실합력(哈失哈力) [32] 가와(呵?) [33] 마림(麻林) [34] 가이륵(加異勒) [35] 민진성(敏眞誠) [36] 팔답흑상(八答黑商) [37] 화랄찰(火剌札) [38] 납실자한(納失者罕) [39] 쇄리(?里) [40] 토번(吐蕃) [41] 안남(安南) [42] 점성(占城) [43] 진랍(眞臘) [44] 자바(爪瓜?) [45] 삼불제(三佛齊) [46] 섬라(暹羅) [47] 가지(柯枝) [48] 토래사(討來思) [49] 사합로(沙哈魯) [50] 백화(百花) [51] 답아밀(答兒密) [52] 담파(淡巴) [53] 석란산(錫蘭山) [54] 만랄가(滿剌加) [55] 홀로모사(忽魯謨斯) [56] 빈동룡(賓童龍) [57] 발니(渤泥) [58] 소록(蘇祿) [59] 고마랄(古麻剌) [60] 면전(緬甸) [61] 목방(木邦) [62] 파주(播州) [63] 건창(建昌) [64] 라라(羅羅) [65] 힐로(??) [66] 양황(???) [67] 중가(仲家) [68] 송가채가(宋家蔡家) [69] 오계(五溪) [70] 여인(黎人) [71] 료(?) [72] 총인(??人) [73] 동인(?人) [74] 할랄비아(曷剌比亞) [75] 응다강(應多江) [76] 귀국(鬼國) [77] 북실위(北室韋) [78] 불랑찰(拂郞察) [79] 물누차(勿?茶) [80] 돌랑(突浪) [81] 야차(夜叉) [82] 홍모국(紅毛國) 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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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돌아다니고 몸을 숨기는 사람들
추재가 요약한 정보 중 귀국(鬼國) 내용에는 “사람들은 밤에 돌아다니며 낮에는 몸을 숨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귀와 눈은 사람과 같으나 입이 정수리 위에 있다는 것으로 기술돼 있다. 뱀과 사슴을 잡아먹는다는 식습관과 어두운 밤에만 다닌다는 점을 토대로 귀신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특이한 생김새를 비롯해 『위서』와 『통전』 등 고서가 채록 배경이고, 입이 정수리 위에 있다는 점은 채록한 책과 다소 다른 내용이다. 19세기 조선인의 기록에 등장한 베네치아 풍요로운 땅, 수공예가 뛰어나고 부유한 사람들은 추재가 채록한 이탈리아 베네치아 모습이다. 특히 나라의 주인이 없는 점, 매년 한 사람을 선발해 일을 맡기고 임기가 끝나면 평민으로 돌아간다는 등 정치체계도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추재는 이 같은 정치체계를 보고 “요임금 순임금도 본래 백성으로 돌아가네[堯舜還他本色氓]”라고 노래했다. 특히 “구리 벽돌로 성곽을 축성했다”라는 기록은 이보다 앞선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추상도 돋보인다. 다만 화려한 모습을 상상했다는 점을 이같이 기술했고 이미 당대에 베네치아는 화려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조롱하는 의미지만… 여전히 통용되는 표현도 중국 서남부 소수민족인 이족을 일컫는 말인 라라(羅羅)를 기술하면서 옮긴이는 “사용한 글자는 조롱하는 의미”라고 표현했다. 독자적인 문화를 갖춘 이 민족은 베트남과 태국에서 ‘로로’로 불리고 우리나라에도 ‘로로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모습과 풍습도 독특한 기술이 돋보인다. 몸이 검고 아비가 죽으면 어미를 아내로 삼고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나체로 대야를 올리는 등 지금으로서는 기괴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약한 풀과 쥐, 참새를 비롯해 꿈틀거리는 것이면 모두 즐겨 먹는다는 식습관도 이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특히 아주 음란한 여자를 서로 다투어 취한다는 점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외국’이 궁금했던 19세기 조선인에게 이 같은 기록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