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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후기-근대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
제1부 아렌트 ‘정치미학’이란 무엇인가? 1장 ‘새로운’ 정치철학 1. 한나 아렌트의 학문적 정체성 이슈 2. 아렌트 정치철학의 ‘개성원리(Thisness)’ 3. 칸트 ‘미학’에서 아렌트 ‘정치미학’으로 1) 18세기 칸트 미학의 등장 2) 21세기 아렌트 정치미학의 탄생 2장 정치사상 체계로서 ‘아렌트주의(Arendtianism)’ 1. 아렌트 정치철학의 지향성과 방법론 1)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결합 추구 2) ‘철학적’ 반(反)정초주의(Antifoundationaism) 2. ‘아렌트주의(Arendtianism)’의 이론 틀 1) 하나의 ‘이즘(Ism)’으로서 아렌트주의 2) ‘아렌트주의(Arendtianism)’의 기본명제와 정치원리 3. 아렌트주의와 아렌트 정치미학 3장 아렌트의 『판단력 비판』 독해 1. 칸트의 반성적 판단 모델 2. 『판단력 비판』의 창조적 재해석 1) 심미적 판단 기준으로서 자기충족성 2) 판단의 상호주관적 타당성 3) 판단함과 행위함의 상호연계성 4) 심미적 판단의 무도덕성과 정치성 3. 정치미학의 명제: 판단의 자기-정초적 토대 제2부 사유, 사유함, 그리고 실존적 정치존재론 4장 독일 실존주의 철학과 사유함 1. 하이데거의 ‘다자인(Dasein)’ 존재론 2. 야스퍼스의 ‘엑시스텐츠(Existenz)’ 존재론 3. 아렌트의 ‘정치적 실존주의’ 존재론 1)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적 실존주의와 시간성 2) 인간실존, 사유함, 그리고 카프카의 ‘그(He)’ 5장 사유(Thought)와 사유함(Thinking) 1. 사유는 반복과 차이의 발생사건 1) 사유의 ‘자기충족성’ 허구2) ‘페넬로페(Penelope)의 베 짜기’ 은유 2. 사유함의 현상학(The Phenomenology of Thinking) 1) 정신(The Mind)의 세 가지 기능 2) 사유함의 부산물로서 판단과 양심 3. 사유함(Thinking)과 행위함(Acting)의 상호연계성 1) 근대적 사유함으로서 데카르트의 ‘내관(內觀)’ 2) 아테네 폴리스와 ‘아렌티안 폴리스(The Arendtian Polis)’ 6장 사유함과 ‘무토대적 토대(A Groundless Ground)’ 1. 아렌트의 ‘아르키메데스 점’과 코기토(Cogito) 2. ‘아렌티안 폴리스’와 유목적 주체 1) 공영역과 정치행위의 유목성 2) 유목적 주체와 정치행위 3. 시민공화주의적 분투주의와 약속의 정치 1) 유목적 주체와 분투주의 2) ‘약속의 정치’ 패러다임 제3부 ‘인간다수체’의 유형학과 타자윤리학 7장 사유함과 ‘인간다수체’의 유형학 1. 사유함과 인간다수체 1) 전도된 코기토(The Reversed Cogito) 2) 인간다수체: ‘단독적-다수의-있음(Being-Singular Plural)’ 2. 인간다수체의 다섯 가지 유형 1) 인간 서식지(the Habitat)로서 물리적 세계(HP-I) 2) 정치적으로 조직된 공영역(The Public realm)(HP-II) 3) 심미적 판단 공중(HP-III) 4) ‘내부-공영역(An Interior Public Space)’(HP-IV) 5) 정치적으로 비(非)연루된 ‘타자’(HP-V) 3. 하나의 개념 범주로서 ‘아렌티안 폴리스(The Arendtian Polis)’ 8장 타자윤리학: 레비나스 vs. 아렌트 1. 두 가지 길항적 하이데거 효과2. 레비나스의 ‘철학적’ 타자윤리학 1) 타자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끼는 주체 2) ‘선(善)’의 추구 문제 3) ‘나’와 ‘타자’의 비대칭적 소통 구도 3. 아렌트의 ‘정치적’ 타자윤리학 1) 정치적 평등과 사유함의 평등 구도 2) 사유함과 사회정의 요청 3) 심미적 척도로서 양심의 정치적 유의미성 9장 후기-근대의 정치적 조건과 아렌트 정치미학 1. 근대성과 전체주의의 상관성 2.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책으로서 시민불복종 3. 21세기 한국 시민과 ‘정치적 행동주의’ 결어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전인미답의 사유 여정에 관한 지적 오디세이”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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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매우 복잡하고 다면적인 성격의 정치사상을 펼쳐 보여 준 정치철학자이다. 이 점은 그를 지칭하는 다양한 호칭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호칭 중에는 보수주의자, 공화주의자, 공동체주의자, 급진적 민주주의자, 반체제이론가, 혁명이론가, 실존주의자, 비판이론가, 탈근대론자와 같은 것이 포함되며, 그 가운데 일부는 심지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를 두고 ‘보수주의자’로 칭함과 동시에 ‘반체제이론가’로 칭하는 것, 아테네 민주정을 흠모하는 ‘고전주의자’로 칭함과 동시에 서구 철학 전통을 거부하는 ‘반역사주의자’로 칭하는 것, 또는 시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로 칭함과 동시에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자’로 칭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 p.31~32 아렌트 학문 세계의 특성을 가장 적실하게 설명하는 단 하나의 어휘를 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반정초주의(Antifoundationalism)’, 즉 그의 정치철학 방법론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기존의 학파나 이념, 확립된 개념을 전제로 논의에 돌입하는 서구 학계의 오랜 관행을 거부하고, 기성의 개념과 이론적 범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는 독자적 철학함의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실 이 철학함의 태도는 아렌트의 발명품이 아니며, 단지 그가 서구 철학의 시원에서 재발견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모름지기 철학의 본질은 ‘타우마제인(Thaumazein)’, 즉 기성의 사물들을 새로운 시선으로(또는 ‘경의롭게’)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 p.59~60 아렌트의 후기 정치철학은 칸트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곳곳에서 칸트의 지적 영향을 받은 흔적이 발견된다. 칸트 철학 연구와 강의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이 특별히 “칸트의 정치철학서”라고 책의 성격을 규정한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 대한 독창적인 재해석 작업에 매진했다고 알려진다. 그를 아는 모두가 예상하였듯, 아렌트의 칸트 미학 독해는 거의 창조적 파괴에 가까우리만치 혁신적이었다. 그가 강의 중에 재해석한 논점들은 ‘칸트 정치철학 강의 노트’에 오롯이 담겨 있다. --- p.98~99 20세기 독일 실존주의 철학의 쌍벽인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사사한 아렌트는 독일 관념론 전통의 집요함과 모순됨을 함께 인식했다. 그리고 그들의 논의 지평 위에서 그들의 실존주의 존재론의 관점들을 비판적으로 재전유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론적 관점을 구축해 나갔다. 그가 두 스승과 다른 실존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20세기 초엽 유럽의 불안정한 전체주의적 현실정치 상황과 1941년 이후 자신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미국의 상대적으로 안정된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그 스스로가 터득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었다. --- p.150 아렌트는 인간 정신(the mind)의 기능들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인간은 ‘철학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사유가 모든 사람에게 항상적으로 주어진 정신의 기능이라면, ‘사유함(thinking)’과 ‘철학함(philosophizing)’ 사이의 구별은 불필요해진다. 이에 그는 인간 정신의 활동으로서 ‘사유함’은 서구 철학 전통에서 얘기하듯 철학자들만 향유하는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항상 현전하는 정신 능력”(LM I, 191)으로 새롭게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역으로 ‘사유 불능’도 “모든 사람에게 항상 현전하는 가능성”인데, 이는 “과학자, 학자, 다른 정신적인 업무와 관련된 전문가들”이라고 해서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p.175~176 한나 아렌트는 수천 년간 이어진 서구 철학 전통을 위시하여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인간의 인식 체계를 지배했거나 지탱해 주었던 종교, 권위, 전통과 같은 인식적 토대들이 점차 형해화되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적 ‘토대들’의 붕괴 현상으로 인해 인간의 인식 체계가 사실상 무토대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인간의 행위는 물론 행위를 매개로 형성되는 모든 인간관계도 그 근거 기반을 잃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이에 그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에서 우리가 여전히 그 전통적 토대들과의 밀접한 연계성 속에서 수립된 “형이상학과 철학의 모든 범주”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 p.192~193 아렌트 정치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인 ‘인간다수성’의 직접적인 원천은 하이데거의 ‘Mitsein’ 또는 ‘함께 있음(being-with)’ 개념이다(Bowring 2011, 24). 한편, 하이데거에게 ‘있음(Sein; being)’은 “어떤 현전함의 사건(an event of presencing)이지, 특정의 구체적인 사물(a specific thing)이 아니다.”(Ansell-Pearson 1994, 512) 따라서 무엇 또는 누구의 ‘현전함’이라는 사건은 특정의 구체적 시간 및 공간과 분리된 추상적인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그곳(Da)’에 현전하는 하나의 사건, 즉 그곳의 ‘있음(Sein)’으로 정의되며, ‘그곳의 있음’으로서의 다자인(Dasein)은 한 개인의 실제적인 있음의 현존 양태 또는 양식이 된다. --- p.237 한나 아렌트의 정의상 정치행위는 한 사람의 행위자가 공적인 장소에서 다수 청중을 상대로 자신이 지닌 최고 덕목과 기량을 최대한 펼쳐 보이는 의사소통행위다. 이 정의가 전제하는 것은 행위자가, 첫째로, 특정의 공적 영역에서 언어적 행위 수행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청중에게 공개적으로 노출하게 되며, 그 결과, 둘째로, 그들과 함께 구성하는 공동 세계의 유의미한 일부라는 사실, 즉 자신의 공적 실재감을 획득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성격의 정치행위는 행위자의 행위 수행 차원에서 탁월성, 적절성, 상호주관성, 타당성을 요구하며, 역으로 청중의 판단 차원에서는 객관성, 공공성, 합리성을 요구한다. --- p.272 현대 사회는 모두가 ‘노동’한다는 점에서 평등한 ‘노동자 사회’이다. 이 ‘노동자 사회’라는 아렌트의 인식은 일차적으로 현대인들 대부분이 ‘임금’노동자 ?우리 한국 사회는 ‘근로자’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현대인들이 노동의 대가를 오락이나 소비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사적인 외로움과 무력감을 해소하는 ‘탈(脫)정치적’ 삶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요컨대, 현대인들은 ‘삶의 과정(the life processes)’에 예속되어 생활의 필요에 부응하는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의 삶에 우선성을 부여함으로써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다운 삶의 방식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탈정치적’ 삶은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 아니다(O’Sullivan 1976). --- p.303~304 |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다시금 재현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 나온 시민들과 190인의 의원들 덕택에 12월 4일 1시 1분경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어 5시 4분경에 4시 30분에 있었던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가 의결되었음이 발표되었으나, 그 6시간 사이에 국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범야권은 1차 탄핵소추안을 공동 발의하였으나 여당은 탄핵 반대 및 표결 불참을 당론으로 정했고, 결국 정족수 미달로 투표 불성립이 선언되었다. 그러자 시민들은 매서워진 추위에도 거리로 나와 탄핵을 촉구하였고, 덕분에 이어진 2차 탄핵소추안에서는 재석 300표, 가 204표, 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이후 피의자로 입건된 현직 대통령에 대해 공조본은 서울서부지법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2025년 1월 3일,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했으나 경호처의 반발로 실패하였고, 같은 달 15일, 재차 발부받은 체포영장의 집행에 성공하였으며, 같은 날 피의자 측이 서울중앙지법에 신청한 체포적부심은 다음 날 기각되었다. 그리고 1월 19일에는 서부지법에서 헌정사 최초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자 그 지지자들은 서부지법을 습격하고 경찰과 기자들을 향하여 폭력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어째서 일어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일까? 여태까지 일어났던 상황들을 무미건조하게 되짚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질문에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상황의 흐름과 맥락, 배경을 되짚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상황 속에 있었던 사람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상황은 매우 정치적인 상황이고, 그 상황 속에 있었던 사람들 역시도 매우 정치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도구로서 매우 적실하게 제시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 책이 논하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미학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내용을 소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인간다수체의 다섯 가지 유형 개념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 다섯 가지 유형이란, 인간 서식지로서 물리적 세계인 HP-I, 정치적으로 조직된 공영역인 HP-II, 심미적 판단 공중인 HP-III, 내부-공영역인 HP-IV, 정치적으로 비연루된 타자인 HP-V이다. 이제 이 다섯 가지 개념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사건들을 재조명해 보자. HP-I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가족, 지역, 국가와 같은 물리적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정치화하기 이전부터 우리가 갖고 있던 배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HP-I은 이 정도로 넘어가기로 하자. 우리 헌정사의 비극은 정치적으로 조직된 공영역인 HP-II의 결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여당과 야당의 협치는 실종되었고, 서로의 주장만을 내세우면서 정쟁을 일삼은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권 정치만의 상황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곤 한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정치 이야기가 곧 분쟁이 되고 마는 우리의 현실을 잘 나타내 준다. 우리의 HP-II는 병들어 있는 것이다. 이 병든 HP-II가 우리가 마주한 비극의 배경이었다. 이러한 HP-II를 바라보며 특정 사안에 대해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잠재적 세력이 바로 심미적 판단 공중인 HP-III다. 갑작스럽게 비상계엄 시국을 접하게 된 우리 시민들 모두가 이러한 HP-III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정치적으로 비연루된 타자인 HP-V는 HP-II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다. 비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과 달리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외국인 같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은 바로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HP-IV다. HP-IV는 바로 우리 내부에 자리한 공영역이다. 이 일련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내부-공영역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즉 주로 심미적 판단 공중인 HP-III와 때때로 정치적으로 비연루된 타자인 HP-V까지를 포함하는 이들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내부의 의견교환을 바탕으로 현실의 공영역인 HP-II에서 우리의 의견을 개진하게 된다. 이 일련의 상황에서 드러난 더욱 심각한 문제는 HP-II에 만연했던 우리 사회의 질병이 결국 우리 사회 내 일부 구성원들의 HP-IV마저도 감염시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HP-V를 자신의 내부-공영역에 초대하여 HP-III로 삼기는커녕 HP-III마저도 자신의 내부-공영역에서 HP-V화해 버린 이들은 상대를 배척하고 상대와의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마치 하버마스가 SNS에 대해 진단한 것처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차폐된 반향실로 후퇴하고”(하버마스 2024, 58) 있었다. 이들은 위중한 시국에도 자신의 차폐된 내부-공영역 속에서 자신과 유사한 목소리들만을 메아리치게 했고, 그것을 HP-II로 확대 재생산하고자 했다. 다행인 것은 이들이 소수에 불과하며, 다수의 시민과 일선 군인들의 HP-IV가 제대로 작동한 결과, 우리는 또 하나의 “서울의 봄”을 맞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다. HP-IV가 제대로 작동함으로써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사례를 살펴보자. 야당의 모 의원은 자신의 보좌관으로 하여금 본회의장에 출입이 불가했던 당시 여당 당대표를 본회의장으로 인도하게 했다. 본회의장이라는 HP-II에서 배제된 타자로서 HP-V에 속했던 당시 여당의 당대표를 자신의 내부-공영역에서 비상계엄이라는 위중한 시국에 함께해야 할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본회의장이라는 HP-II에 구현해 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여당 당대표는 계엄군에 의한 체포를 피할 수 있었고, 그를 따르는 일부 여당 의원과 범야권의 단합된 계엄 해제 결의라는 현대사의 한 장면을 만들 수 있었다. 계엄군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리가 계엄군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이미지와 달리, 이들은 국회 안에 밀집한 시민들을 마주하고는 자신이 부여받은 임무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방식으로 항명했고, 덕분에 우리는 비극적인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 몰린 시민 중에 자기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고려한 결과, 즉 HP-III로서의 시민들을 자신의 HP-IV에서 HP-I으로 받아들인 결과였을 것이다. 이처럼 HP-IV의 비정상적 작동은 헌정사의 위기를 불러온 한편, HP-IV의 정상적 작동은 그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며 위기 극복의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간다수체의 다섯 가지 유형을 중심으로 살펴본 현 정국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알려주는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미처 완결짓지 못한 그의 정치철학을 대신해서 계속 써 내려가고자 한 시도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정신의 삶』의 마지막 편인 ‘판단함’을 끝까지 써 내려갔다면, 그것은 학계 전반이 동의하듯이 임마누엘 칸트가 집필한 『판단력 비판』과 밀접한 관련을 두고 쓰였을 것이라는 데 기반을 두고, 아렌트가 칸트의 미학을 자신의 정치미학으로 거듭나게 했다고 보면서 아렌트의 ‘새로운’ 정치철학을 써 내려가고 있다. 아렌트는 과연 자신의 미완성 유작인 『정신의 삶』에서 어떤 정치철학을 내놓고자 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그가 주창한 새로운 정치철학의 사명은 ‘사유의 정치적 유의미성’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아렌트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분리 전통에 맞서 양자의 상호연계성을 조명하고, 나아가 양자의 결합 필요성을 주장하는 정치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내놓고자 했던 새로운 정치철학, 정치미학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미학은 우리에게 정치적 삶을, 즉 우리의 ‘폴리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