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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역사
인도를 지배한 마지막 거대 제국! 황금과 피로 쓴 제국의 역사, 세계를 압도한 찬란한 문명의 절정
더숲 20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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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2위 역사 top100 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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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한국 독자를 위한 저자 서문
감수의 글
연대표
일러두기
들어가며_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한 무굴 제국

제1부 무굴 제국의 기원과 창건(1526~1540, 1555~1556년)

제1장 인도 북부 정복 이전의 바부르
무굴 제국의 기원이 된 칭기스 왕조와 티무르 왕조│경쟁자 사이에서 보낸 바부르의 청년기│바부르의 카불 시절│1526년, 바부르의 첫 번째 정복

제2장 바부르 황제의 무굴 제국 만들기
낯선 남아시아의 환경│남아시아 문화와 공동체의 상호 작용│농경 · 목축 · 삼림에 기반한 남아시아 경제│남아시아의 정치 세계│무굴 제국 창건

제3장 후마윤 황제와 인도인
후마윤의 황제 계승│후마윤이 거둔 초기의 군사적 성공│후마윤의 무굴 제국 상실│무굴 제국 재건을 위한 후마윤의 원정

제2부 악바르 황제 재위와 무굴 제국의 확립(1556~1605년)

제4장 무굴 제국의 중심이 된 악바르 황제
악바르의 급작스러운 즉위와 경쟁자들│섭정의 그늘에서 벗어난 악바르│결혼 동맹으로 지지자를 확대한 악바르

제5장 악바르 황제와 무굴 제국의 제도
자민다르가 지배한 농촌 경제│지방 엘리트에 의존한 무굴 제국의 지방 행정│무굴 제국의 만사브 제도

제6장 수도에 따른 악바르 황제 재위기의 변화
아그라 시기, 1556~1571년│파테푸르시크리 시기, 1571~1585년│라호르 시기, 1586~1598년│데칸의 전장과 아그라에서 보낸 말년

제3부 무굴 제국의 전성기(1605~1707년)

제7장 자항기르 황제와 무굴 궁정의 개화
경쟁자와 반란을 물리치고 황제가 된 자항기르│화려한 예술과 혁신의 궁정│누르 자한과 샤 자한의 계승 분쟁

제8장 샤 자한 황제와 무굴 제국의 발돋움
되풀이되는 반란과 데칸에서의 전쟁│중앙아시아를 향한 원대한 야망│샤 자한의 투옥으로 끝난 계승 분쟁

제9장 무굴 제국의 정점이자 쇠퇴의 시작, 알람기르 황제
알람기르의 즉위와 통치 면모│데칸 원정과 어두운 미래│확대되는 전쟁과 무굴 제국의 퇴보

제4부 무굴 제국의 해체와 기억(1707년부터 현재까지)

제10장 무굴 제국의 소멸
바하두르 샤와 어지러운 계승│섭정의 지배를 받는 살라틴과 황제들│최후의 무굴 황제들

제11장 무굴 제국의 의미에 대한 논쟁들
17세기의 무굴 제국에 관한 다양한 시선│18세기 이후의 무굴 제국 역사 서술과 중요성│영국 식민 통치 시대, 1857~1947년│독립 이후 무굴 제국 역사의 의미 모색

그림 · 지도 · 계보도 목록

참고문헌
찾아보기
무굴 제국의 황제들과 그 가계:1526년에서 1857년까지
무굴 제국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들

저자 소개3

마이클 피셔

관심작가 알림신청
 

Michael Fisher

미국 오버린 대학교의 로버트 댄포드 역사학 석좌교수. 시카고 대학교에서 남아시아 연구로 역사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6세기 이후 인도와 유럽에서 빚어진 인도인과 유럽인 사이의 상호 작용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2007년에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교육 업적을 인정받아 교육우수상Teaching Excellence Award을 수상했다. 《인도사A History of India》《세 바다 너머:무굴 제국의 여행자 이야기Beyond the Three Seas :Travellers’ Tales from Mughal India》 등 무굴 및 인도 역사를 다룬
미국 오버린 대학교의 로버트 댄포드 역사학 석좌교수. 시카고 대학교에서 남아시아 연구로 역사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6세기 이후 인도와 유럽에서 빚어진 인도인과 유럽인 사이의 상호 작용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2007년에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교육 업적을 인정받아 교육우수상Teaching Excellence Award을 수상했다.

《인도사A History of India》《세 바다 너머:무굴 제국의 여행자 이야기Beyond the Three Seas :Travellers’ Tales from Mughal India》 등 무굴 및 인도 역사를 다룬 15권의 저서와 50여 편에 이르는 다양한 글을 집필했다. 또한 인도 델리 대학교, 자와할랄 네루 대학교 등에서 방문교수를 지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동양사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번역기획공동체 ‘창窓’에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로 몽골 제국 시대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와 오스만 제국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다. 논문〈몽골 제국과 포스트 몽골 시기 중앙아시아와 킵차크 초원에서의 투르크 정체성><역사 속의 오이라트인은 ‘서몽골인’이었는가?>과 《티무르의 발흥과 지배》(출간 예정)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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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이옥순

관심작가 알림신청
 

李玉順

인도 델리 대학교에서 인도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연구교수와 서강대학교 조교수를, (사)인도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무굴 황제》《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인도 현대사》《인도는 힘이 세다》《최소한의 인도 수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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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4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98쪽 | 804g | 145*222*32mm
ISBN13
9791194273189

책 속으로

점점 커지고 있는 무굴 제국의 역사를 향한 관심은 가히 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은 무굴 제국의 역사를 동시대 조선의 역사와 비교하고 또 대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국가 모두 안팎의 도전을 이겨 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모든 왕조는 각자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독특한 정치 복합체를 이루기 마련이었다. 이후로도 더 많은 사람이 무굴 제국의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리라는 이야기다.
---「한국 독자를 위한 저자 서문」중에서

무굴 제국의 역사는 우리에게 한 나라의 과거에 대한 지식 이상의 통찰력을 준다. 여기에는 1947년 이후 인도와 헤어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후손은 물론, 더 나은 삶과 기회를 찾아 무굴 제국으로 이주한 다양한 층위의 중앙아시아인과 서아시아인의 문화와 역사가 날실 씨줄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감수의 글」중에서

무굴 제국은 희한한 기원을 가졌다.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다시 말해 이슬람교도 전사 일족은 1526년과 1555년 두 차례 인도 북부를 침공하여 그곳에 살던 힌두, 무슬림을 비롯한 그 밖의 인도인과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을 하여 무굴 제국을 탄생시켰다. 이 왕조의 남성 창건자들은 땅 한 뙈기 지배하지 못하는 처지에도 자신이 황제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억해 온 중앙아시아의 고향으로 몇 번이고 돌아가려 했지만, 결국 낯선 땅과 종족을 침략하고 지배했다.

무굴 제국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을 거대한 이슬람 세계의 주요 인물로 규정했고, 방식과 정도에 차이는 있으나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중앙아시아·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오스만 제 국·아라비아에서 건너온 순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이주자를 따뜻하게 맞았다.
---「들어가며」중에서

악바르는 정치적 결혼 동맹과 문화 정책을 통해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막론하고 인도인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가문과 궁정, 행정, 군대를 확장했다. 그와 조신들은 한층 중앙집권화된 재정과 행정 제도를 발전시켜 제국을 재구성했다.

악바르의 재위기는 수도에 따라 단계를 나눌 수 있지만 그는 언제나 팽창하는 무굴 군대를 직접 지휘하며 야심 찬 친척, 반란을 일으키는 제국의 관리와 엘리트, 봉기하는 민중과 이웃 지배자에 맞서 때로는 방어전을 때로는 공격전을 벌이며 끊임없이 싸웠다. 악바르는 거의 평생 동안 전장에 뛰어들었고 죽기 직전까지 군사 원정을 직접 지휘했다. 말하자면 악바르와 그의 지지자들은 중앙 아시아와 이슬람, 인도의 다양한 제도와 문화, 사람들의 복합체인 무굴 제국을 세우고 확장했다.
---「무굴 제국의 중심이 된 악바르 황제」중에서

4개월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영국인과 그들에게 복속한 인도인 병사들은 샤자하나바드를 탈환하고 바하두르 샤 2세를 투옥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영국 장교들은 바하두르 샤 2세의 아들들을 처형하고 바하두르 샤 2세를 영국에 대한 반역 혐의로 재판정에 세웠다. 또한 영국 장교들은 샤자하나바드에서 모든 인도인을 추방하고 자마 마스지드(대모스크)를 훼손했으며, 붉은 요새에서 크리스트교의 추수감사절 예배를 올린 뒤 주변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영국은 이윽고 바하두르 샤 2세를 버마로 추방함으로써 무굴 제국을 멸망시켰다. 바하두르 샤 2세는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1862년 사망했다. 그럼에도 역사학자와 논평가 들은 무굴 제국이 탄생한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무굴 제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굴 제국의 소멸」중에서

1857년 많은 인도 북부 사람이 영국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을 때 무굴 황제는 이 집단행동에서 가장 주목받는 구심점이 되었다. 영국은 이 유혈 분쟁으로 힌두스탄에서 쫓겨날 뻔했고, 영국과 인 도가 서로에게 자행한 학살은 양측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초 일부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제1차 인도 독립 전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세포 이 반란’으로 표현해 왔다. 일련의 사건이 무굴 왕조를 종식시킨 동시에 무굴 제국의 문화적 중요성을 더욱 강화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무굴 제국의 범위와 복잡성 그리고 방대한 자료를 고려해 볼 때,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와 관심에 따라 무굴 제국을 해석하고 묘사했다.

---「무굴 제국의 의미에 대한 논쟁들」중에서

출판사 리뷰

세계사의 또 다른 중심이자 유럽이 동경했던 황금의 땅
황금과 피로 쓴 제국의 역사,
번영과 파멸이 교차하는 거대한 역사의 무대

무굴 제국은 1526년 중앙아시아 출신의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고 세운 이슬람 왕조로, 약 3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부를 일구어 번영을 누리다 1857년 막을 내렸다. 이 나라는 인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되지만, 사실 공식적으로 ‘무굴’이라는 국명을 사용한 적은 없다. ‘무굴’이라는 이름은 왕조를 세운 바부르와 그 후손이 속한 부족을 가리키는 말로, 몽골을 뜻하는 페르시아식 표현이다.

이 책은 무굴 제국의 정치와 외교는 물론, 종교와 문화, 예술, 국제 관계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전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무굴 제국의 시작은 ‘세계의 정복자’ 칭기스 칸과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의 피의 정복에서 시작된다. 이후 악바르, 자항기르, 샤 자한, 알람기르로 이어지면서 17세기를 제국의 전성기로 인도한다. 이 시기의 무굴 제국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성기일 뿐만 아니라 영토 또한 사상 최대 판도를 기록하게 된다. 〈감수의 글〉에 따르면,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지배자, 기업계와 언론계의 거물을 ‘모굴Mogul’이라고 표기하게 된 것은 무굴 황제의 묵직한 존재감과 그들이 다스린 제국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다.

무굴 제국은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대제국이었다. 동시대 중국을 제외하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로 떠올랐으며, 그 번영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50년대 인도로부터 강제로 헌납받아 현재 런던탑에 전시되어 있는 코흐누르(일명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전설로 남은 ‘공작 옥좌’만 보더라도 무굴 제국의 눈부신 부를 짐작할 수 있다. 코흐누르 다이아몬드는 당시 전 세계가 이틀 하고도 반나절을 쓸 값어치에 해당했고, 각종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이 옥좌는 무려 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무굴 제국이 이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정학적 위치 덕분이었다. 중앙아시아와 중국, 멀리는 유럽을 잇는 비단길과 동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어지는 해상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한 무굴 제국은 교역과 무역의 요충지로서 풍요를 누렸다.

그 부를 바탕으로 무굴 황제들은 예술과 문학, 건축을 아낌없이 후원했고, 이는 곧 찬란한 문화적 전성기로 이어졌다. 특히 악바르 황제가 닦은 제국의 토대 위에서 자항기르와 샤 자한 황제는 무굴 예술과 건축을 한층 정교하고 세련된 형태로 꽃피웠다. 타지마할, 델리의 붉은 요새, 아그라 요새 등은 무굴 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걸작들이며, 오늘날까지도 그 찬란한 영광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하지만 알람기르 사후 유약한 황제들이 잇달아 즉위하여 제국의 행정과 통제는 드넓은 영토에 미치지 못하게 된 데다 섭정들이 황제보다 강력해지는 등 혼란에 빠졌고, 이런 상황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점차 광대한 인도 영토의 정복자이자 지배자로 진화하여 결국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기에 이르고 만다.

무굴 제국은 찬란한 황금과 피로 쓰인 대서사시이다. 번영과 파멸이 교차하는 거대한 역사의 무대, 그 중심에 무굴이 있었다.

융합과 포용, 공존의 방식으로
거대한 인도 대륙을 통일한 무굴 제국의 모든 것

같은 시기 강력한 이슬람 제국으로는 사파비 왕조와 오스만 제국이 있었지만, 무굴 제국이 이들과 뚜렷이 달랐던 점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종교적 간극이었다. 지배자는 이슬람을 따랐지만, 압도적 다수의 백성은 힌두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무굴 제국은 배척이 아닌 포용, 동화가 아닌 융합을 택했다. 힌두 전통과 페르시아 양식이 만난 무굴 세밀화, 이슬람 건축 위에 힌두 조형미가 더해진 웅대한 무굴 건축, 힌두교 경전과 대서사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고, 음악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하려 한 시도들이 모두가 융합의 결과였다. 비록 이 문화가 기층까지 깊게 뿌리내리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언어와 종교, 문화가 느슨한 형태로 공존했던 무굴 제국의 유산은 이후 영국 식민 통치와 현대 인도 국가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무굴 제국은 단순한 과거의 제국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다름 속의 공존’이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충돌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무굴 제국의 실험은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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