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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20세기의 오디세우스 개역판에 부치는 말 니코스 카잔차키스 연보 |
Nikos Kazantza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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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정열에서 풀려나와 다른 더 고상한 정열의 지배를 받는 것. 그러나 이 역시 예속의 한 형태가 아닌가? 이상을 위하여, 종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 pp.38-39 행복을 체험하는 동안에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오직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볼 때에만 우리는 갑자기 -이따금 놀라면서 -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다. --- p.98 용기! 빌어먹을! 모험! 올 테면 오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 p.261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 p.314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 pp.325-326 세상이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무슨 수로 우리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달고 세상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 위에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기나 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걸까? 우리가 불멸에 대해 꺼지지 않는 갈망을 품는 것은, 우리가 불멸의 존재여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 어떤 불멸의 존재를 섬겨서가 아닐까? --- pp.388-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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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문학의 구도자]가 그리는 자유 영혼의 투쟁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 잘라 버렸어요」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 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 조르바의 어록 중에서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으로 튀르키예의 지배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유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인으로서 호메로스와 조르바에게 큰 영향을 받아 온 그는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수학하며 베르그송, 니체, 불교 등의 사상을 접하면서 일정한 도덕률의 틀 속에서 제 몫의 삶을 마다하고 [영혼의 자유를 외치는 거인]으로 서게 된다. 이 속에서 탄생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조르바는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물레를 돌리는 데 거추장스럽다고 제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버리는가 하면, 여성의 치모를 모아 베개를 만들어 베고 자며 수도승을 꼬여 타락한 수도원에 불을 지르는 등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자유분방하고 호탕하며 농탕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 이라기보다는 [절대 자유의 초인]으로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인(知人)들이 지향해 온 이상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이 책에서 조르바가 펼쳐 보이는 기괴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자유를 향한 영혼의 투쟁은 각박한 현실에 억압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오랜만에 해방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작품으로, 호쾌하고 농탕한 자유인 조르바가 펼치는 영혼의 투쟁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조르바는 실존 인물로서, 카잔차키스는 자서전 『그리스인에게 고함』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힌두교도들은 [구루(사부)]라고 부르고 수도승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다….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토이소노] 즉, [거룩하게 되기]의 개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고 포도주가 되는 것이 물리적, 화학적인 변화라면,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은 바로 [메토이소노]인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바로 이 책에서 조르바의 거침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투쟁을 통해 [삶의 메토이소노]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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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처럼 나에게 감동을 준 이는 내 생애에 없다. 그의 작품은 깊고, 지니는 가치는 이중적이다. 이 세상에서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생산하고 갔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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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 - 알베르 까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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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정교하면서도 강하고 극적인 힘을 보여 주는, 의심할 여지 없이 높은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다. - 토마스 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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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콜린 윌슨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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