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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5
1부 생은 쓸수록 닳는다 12 담쟁이 가계도家系圖 13 사과꽃이 있는 풍경 15 지렁이 16 물방울 우주 17 개미집을 밟다 18 아름다운 감옥 19 허물 20 Delete 21 대나무 22 사랑 23 짐볼 24 폐선 25 철쭉 한잎 26 보리 파종 27 2부 사진 30 소엽풍란 32 결석結石 33 비닐의 춤 34 민들레 35 강아지풀 36 씀바귀 37 두꺼비 38 장마 39 탁발 40 어머니의 소금 41 감자무지 42 풍장風葬 43 춘분 44 3부 코티 분 46 마두금 48 부활절 50 북산집 51 흠다리 고구마 53 밥차 앞에서 54 종점 55 양말 인형 56 시집 읽기 58 한 생각에 갇혀 59 소똥구리 60 종기 61 첫눈 63 진흙 그림 64 카레이츠 65 시숙모 이야기 67 4부 시비詩碑 공원에서 70 꽃잠 72 달구지 73 연리지 74 까치 75 산나리꽃 76 팥시루떡 77 책탑 78 애기똥풀 79 질경이 80 길을 묻다 81 화전 아지매 82 절경 84 해당화 85 궁금해서 86 눈이 내린다 87 해설/ 사물에의 발견 - 홍정숙의 시/ 윤석산 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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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나무로 만든 연필을 깎는다
모래막이숲에서 나무 한 그루 처형한다 모래바람이 백양나무 잎을 때리는 비명의 중심을 파내려간다 혼돈의 결정체가 천도 이상의 높은 열에 단련을 받고 생각이 형체 없이 녹아내린 캄캄한 막장에 닿는다 비밀의 통로를 채운 숲은 숯처럼 부서진다 울컥 바람소리를 토하는 모가지를 서늘한 칼날이 지나간다 비스듬히 칼등을 미는 손가락 끝에 나무의 저항이 팽팽하다 생은 쓸수록 닳아서 마침내, 몽당연필처럼 버려진다 온몸으로 쓴 지울 수 없는 문장이 난감하다 - 「생은 쓸수록 닳는다」 전문 우리의 어린 시절 ‘몽당연필’이 들어 있는 필통을 애지중지 지니고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때는 그 만큼 물자가 귀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나없이 연필을 더 쓸 수가 없어, 버려야 할 때까지 깎고 깎아, 짤막한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우리는 깎아서는 쓰고 또 썼다, 이런 어린 시절의 ‘몽당연필’을 떠올리며, 시인은 그 어린 시절부터 살아오며, 이 세파(世波)를 힘들게 거쳐 온, 그래서 닳아버린 자신의 생을 떠올린다. ‘몽당연필’은 화자가 살아온 삶의 소중한 모습의 한 상징인 것이다. 연필이 되기 위해 숲에서 백양나무가 베어지고, 또 이 백양나무에 천도 이상의 높은 열에 단련을 받아내는, 어쩌면 우리는 숲속의 한 그루 백양나무였었는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생각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듯, 우리 모두는 캄캄한 막장과 같은 생의 한 일면에 닿아 만들어낸, 하나의 검은 연필심이 우리의 깊은 속으로 박히듯, 우리들 중심에 단련된 우리의 내면을 담아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러함은 나의 소중한 생각을 써내려갈 수 있는 내 삶의 ‘연필’로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소중한 생각과 삶을 기록하기 위하여 ‘울컥, 바람소리를 토하는 모가지를’ 붙들고 ‘서늘한 칼날로’ 연필을 깎듯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아프게 깎아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스듬히 칼등을 미는 손가락 끝’으로 ‘나무의 저항을 팽팽히’ 느끼듯이, 삶에의 저항, 세파에의 저항을 실감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이렇듯 나의 생은 쓰였고, 또 쓰기 위하여 깎이고 깎여 왔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모두 ‘몽당연필’이 되어 추억의 필통과 같은 좁디좁은 현실 속에 뒹굴어 누워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온몸으로 쓴 지울 수 없는 문장마냥 우리는 그 난감함’ 속에서 우리의 보다 처연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고속도로변 방음벽을 온몸으로 기어가는 담쟁이를 보았다 마디마다 꼬부라진 손가락들이 절벽을 움켜쥐고 떨고 있었다 실금 간 벽 속으로 굳은살 밴 손톱을 디밀고 내일에 닿으려고 안간힘 쓸 때 손톱마다 붉은 심장이 돋아 서로 밀고 당기고 붙고 휘어지며 핏줄처럼 얽힌 길 위에서 바람의 갈기를 휘어잡고 한 뜸 한 뜸 포복으로 살아남은 이유가 가계도가 될 줄을 담쟁이는 알았을까 - 「담쟁이 가계도」 부분 이 시는 매우 흥미롭다. 우리 삶의 가계도(家系圖)는 수많은 고난의 연속이며, 아픈 역사의 축적인지도 모른다. 온갖 소음을 견디며 서 있는 ‘고속도로변 방음벽을 온몸으로 기어오르는 담쟁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마디마다 꼬부라진 손가락들이 절벽을 움켜쥐고 또 떨고 있다.’ 또한 ‘실금 간 벽 속으로 굳은살 밴 손톱을 드밀며’ 치열하게 기어오르며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서로 밀고 당기고 붙고 휘어지며’, ‘바람의 갈기를 휘어잡으며’, ‘한 뜸 한 뜸’ 포복을 하듯 힘겹게 살아간다. 우리의 가계도는 이렇듯 형성이 된다. 몇 대조(代祖) 조상은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몇 대조 할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시다 참형(斬刑)을 당하였고,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 감옥살이를 했고, 하는 등의 우리의 가계도를 우리들은 매우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돌아본다. 그러나 이들 우리의 가계를 이룬 영광스러운 조상들의 삶은 마치 담쟁이가 방음벽을 기어오르며, 실금 간 벽 속으로 굳은살 밴 손톱을 드밀며, 또 서로 밀고 당기고 붙고 휘어지며, 한 뜸 한 뜸 포복을 하듯, 그렇게 모두 모두 힘겹게 이루어 놓은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우리의 가계도를 다음과 같이 처연히 노래한다. 저, 푸른 촉수에서 무한 계보로 뻗어나간 피의 소용돌이를 보아라 항렬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 낸 길들이 한 그루 층층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핏줄들이 벽 한 채를 숨결로 어루만져 일가를 이루는 동안 담쟁이는 쓴다, 벽은 절망이 아니라 온몸으로 열어 나가는 생의 함성이다 벽이 끝나는 곳에서 푸른 연대의 본능이 잎과 입 사이를 좁히며 날개를 키울 때 담쟁이는 걸음을 멈춘다 붉게 물든 입술들 훨훨 벗어버리고 얼음의 시간 앞에 선다 먼 기억에서 출발한 떨림으로 모든 핏줄의 문이 열린다 - 「담쟁이 가계도」 부분 가계(家系)는, 아니 인간이 쌓아올린 역사는 어느 의미에서 ‘무한 계보로 뻗어나간 피의 소용돌이’이며, ‘온몸으로 열어 나가는 생의 함성’이며, ‘먼 기억에서 출발한 떨림으로’, 그렇게 이룩된 ‘모든 핏줄의 문’인 것이다. 고속도로 담장을 기어 올라가는 담쟁이에서 우리의 가계, 아니 우리 인류의 아픈 역사를 읽어내는 시인의 시각은 새로운 것이다. 고속도로의 소음을 막기 위하여 세운 방음벽에서, 이 방음벽과 함께 힘겹게 살아가는 담쟁이를, 소음을 견디며 힘겹게 펼쳐나간 우리의 가계도, 나아가 인류의 아픔과 고난이 이룩한 역사로 읽어내고 있는 데에서 시인의 그 시각을 발견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