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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로키산맥 빛의 사격 봄밤 칼을 위하여 그림자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컵의 깊이 실크처럼 바람의 지도 시계 소리 볼록거울 속의 시 낯선 도로에서 동백이라 했다 과수원 옆에는 콩 이후의 이름 봄밤은 2부 편지의 계절 녹는 꿈 가로등 그늘 회색 문 홍수주의보 비밀의 방 비가 내리는 날엔 저녁의 숲은 자다르 바다 여름에 쓴 책 캥거루 포켓에는 나는 아직도 몸짓들 숲의 하루 여름 편지 돌의 마음 3부 백야 까보 다 로까 청색시대 사이프러스 나무 숲이 생겼다 덩어리 숲 수상한 나라 다음 생에 만나요 빵을 만드는 일 막차 유혹 당신 떠나고, 비 일몰 후기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 있는 것 4부 바람이 지나가며 거미의 일기 빈집 냄새 아버지의 가계부 사거리의 저녁 휘두르는 저녁 데칼코마니 비가 온다, 비가悲歌 적막이 된 집 빗방울 두 개의 계절 엄마와 크레파스 엄마의 잠 진다 잘 가 흔드는 손 작품론 존재의 어두운 그림자와 재생의 공간으로서의 숲 |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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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자예요. 누군가 다녀간 흔적도 있는. 그러나 다녀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아요. 상자도 그림자는 가두지 못하니까요. 밤이 되면 그림자는 투명해지니까요. 어떤 사람은 버려진 것도 그림자였다고 수군거리더군요. 상자에는 그림자도 많아요. 고양이 그림자도 있고 애인에게 받은 꽃 그림자도 있고 아기 그림자도 있어요. 그림자는 그림자이니 그냥 봄밤에 펄럭이는 기저귀라고 할까요. 하지만 내가 말했죠. 상자도 그림자는 가두지 못해요. 나는 상자예요. 이어지지 못한 벽이에요. 어둠이 내게 얼굴을 파묻으면 나는 서늘하고 어두워지죠. 출구가 보이지 않죠. 내 몸을 만지면 날카로운 바닥이 느껴질 거예요. 육면이 모두 바닥이니까요. 상자에게도 엄마가 있을까요? 아기 그림자가 나를 다녀갔으니 내가 엄마일까요? 봄밤에 펄럭이던 아기 그림자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그림자를 버리고 가는 그림자들을 보았어요.
--- 「그림자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중에서 당신이 신기루처럼 희미해질 때 있어요 먼 곳에서 깃발을 흔들며 앞장설 때도 있지만 신기루처럼 당신은 흩어지고 나는 깃발을 스쳐 가고 말아요 신기루니까요 뜬구름을 잡는 걸까요 일생에 잡아본 것은 빈주먹뿐이었는데요 당신은 가끔 대기권 밖을 떠돌다가 돌아온 사람 같아요 유영하는 그림자였던 것도 같고 낯선 도로에서 장승처럼 서 있기도 하고 그런 당신의 표지를 따라왔어요 당신이 깃발처럼 펄럭일 때 있거든요 닿지 않는 거리는 틈일까요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는 교차로, 희미해지는 거리 끝에서 신호등처럼 입술이 붉게 켜지고 있나요 내가 가면 왜 따라오나요 건물도 나무들도 구름도 긴 신호가 되는 나를 따라왔어요 나는 당신을 따라왔고요 깃발을 흔드네요 그림자처럼 --- 「낯선 도로에서」 중에서 컵에 손가락이 찔렸다 분명 허공이었는데 공중을 날아가다 유리벽에 충돌했다 그것은 너무 투명해서 눈이 부셨다 그러니까 내 손가락은 유리에 부딪힌 새 뼛속에 구멍이 있어 가볍게 날아가는 새처럼 온몸에 숭숭 구멍투성이인 나는 몸이 허공이었다 언제나 힘을 다해 날아올랐다 컵을 채우려는 듯이 넘쳐서 흘러나오려는 듯이 비행하다 벽에 부딪혀 죽어가는 새들이 늘었다 어떤 날은 컵을 거꾸로 세워 땅을 딛고 섰다 하늘보다 땅이 나에게 더 높은 세상이 되었고 그 후로도 여러 번 비상했지만 컵이 나의 세상이 되었고 그 작은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넘치는 나를 만나며 컵에 수없이 손가락이 찔렸지만 나는 아직도 넘치지 않았다 --- 「나는 아직도」 중에서 담벼락에 흰 칠을 했다 낙서를 지우려 페인트로 꼼꼼히 칠을 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금이 가더니 수많은 자작나무를 피워냈다 한 그루 두 그루 숲을 이루었다 나무들이 낙서 속에서 나와 가지를 키웠다 아침에는 아침 햇살로 씻고 저녁에는 노을빛으로 세수를 했다 담벼락의 나무를 보려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 그림자가 우르르 몰렸다 나무들이 자란 후 없던 것이 생기고 생긴 것 위에 이야기가 생기고 이야기 위에 나무가 더 자라서 나무들의 장터가 생겼다 숲이 생겼다 숲에 아이들의 소문이 숨어있다 아이들이 더 몰려들어 담벼락에 낙서를 했고 숲이 더 무성해졌고 어른들이 와서 담벼락에 흰 칠을 한다 모든 것은 생겨나고 또한 사라졌다 장터처럼 숲처럼 --- 「숲이 생겼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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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라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이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라 하고, 특히 아상我相을 버리라고 했다. 이는 곧 라캉의 이론과도 상통하는데, 그는 ‘자아라는 것은 없다. 자아란 환상이고 주체는 금이 가고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분열된 주체, 환상적 자아를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시를 ‘기표적 형성물’로 규정하고 심리적인 증상과 환상의 종합인 시를 쓴다는 것은 이성, 지식, 이데올로기를 억압하고 잉여 향락에 빠짐으로써 자아를 해방하고자 하는 행위로 간주하는 이승훈은 ‘증상을 즐기라’라고 하였다. 김수원의 시는 삶의 현실에서 억압되거나 부정된 욕구들을 시적 상상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자아해방의 길을 탐구하고 있다. 동시에 인간의 숙명적 한계와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고 그 현실을 견디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도 시라는 미적 형식이 주는 쾌감과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 고뇌를 대신 표현해 줌으로써 공감과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 고명수(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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