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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2. ‘일단’과 ‘어쩌다’ 3. 철학이란 죽음을 배우는 것 4. 복제의 삶, 모조의 욕망 5. 자기 자신의 죽음 6. 죽음의 착취 7. 죽음과 종교 8. 불확실한 나의 죽음 9. 장례 문화의 기원 10. 의례의 문제 11. ‘근거율’과 의례 12. ‘구원’과 ‘기억’의 문제 작가의 말 해제 |
Ataru Sasaki,ささき あたる,佐佐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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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결국 죽는다는 사실. 자, 우리의 철학 입문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참 이상하다. 죽어본 적이 없는데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참 이상하다. 아무것도 허락하지도, 아무것도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죽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인생이란 ‘일단’과 ‘어쩌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답하는 것 외에 방도가 없다. 즉, 인생은 우연이다. ‘일단’ 눈앞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쩌다’ 운 좋게 기회가 찾아와도 붙잡을 수 없다. 철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습이다. 에피쿠로스도, 스피노자도, 니체도 모두 이렇게 말했다. “나의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죽는 순간,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는 것을 빌미 삼아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태도는 ‘철학 실격’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살며 누구나 ‘철학적’ 물음에 눈을 뜬다. 언젠가 다른 사람이 죽고, 언젠가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언젠가 나도 죽겠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제 저 물음을 품었는가. 잠시 생각해보자. 누구든지 틀림없이 당신을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당신도 누군가를 남겨둔 채 사라질 것이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에 ‘오염’된 것이다. 나만의 유일무이한 독창적인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에서 비롯한 모든 ‘체험’도 어딘가에서 빌려 온, 타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복제’일뿐이다. 욕망을 채우는 순간 그 ‘유일무이함’은 사라진다. 아무튼 나의 죽음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 당신의 죽음은 당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은 ‘공유’된다. 단절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우리는 죽음에 다다르며 처음으로 같은 존재 양태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죽음의 착취! 우리는 죽는다. 삶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삶은 가치 있다. 죽음을 의식하기. 그리하여 나에게 주어진 한 번뿐인 삶을 ‘생생하게’ 살아가자는 논리는 여기저기에서 ‘저렴하게’ 유통되고 있다. 서점을 수놓은 자기계발서를 비롯해 사방에 넘쳐난다. 이쯤에서 질문 하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삶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삶은 ‘의미’ 있고 반짝반짝 ‘빛난다’는 논리는 어디에서 듣지 않았는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에 의미가 생겨난다!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논리가 아니던가. 의례로 이루어지는 사회에 저항하는 자들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똑같은 티셔츠를 맞춰 입는다. 우리는 의례를 생략할 수 없다. 우리가 의례를 폐기하는 경우는 의례 자체가 낡고 신진대사를 잃어 실제 생활에 맞지 않을 때다. 의례가 ‘악한’ 주체를(차별, 학살, 식민주의, 죽음의 착취) 낳을 때뿐이다. 의례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태어날 것을 강요당하고, 태어난 이상 죽어야 한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아 무의미하게 사라져가는 사실을 계속 마주하는 것. 그것이 ‘삶’이다. ‘권태’다. 너무 모질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며 당신도 깨달았으리라. 철학은 당신에게 새로운 정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듣고 나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것. 이것이 철학의 역할이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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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관한 글이 맞나 싶을 만큼 거침없고 파격적인 문장, 읽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야전과 영원』, 『이 치열한 무력을』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읽기란 혁명”이라고 선언한다.
자본도 무력도 대중적 인기도 없었던 지방 수도원의 성직자였던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읽고 쓰는 힘’이었다. 루터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성경을 섭렵하며 진리를 발견했다. 십계명을 지킬 것! 믿음의 준거가 되는 성경에는 교황과 추기경과 대주교와 주교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지 않았다. 루터는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어디 루터뿐인가.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도스토옙스키, 버지니아 울프, 니체, 제임스 조이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라고, 사사키는 증언한다. 사사키가 오랜 침묵을 깨고 펴낸 『모두를 위한 철학 입문』은 제목 그대로 ‘모두’를 위한 책이다. 얇고 가벼운 볼륨, 평소의 어휘를 벗어나지 않은 문장, 그렇다고 독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해독해야 할 만큼 너무 짧지도 않은 책. ‘모두’를 염두에 둔 저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그러나 철학 입문의 주제는 가볍지 않다. 당신은 누구인가? 사사키는 철학책에 등장하는 뻔한 물음을 반복하지 않는다. 철학은 죽음을 배우는 것! 사사키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명제로 독자를 인도한다. 죽음의 확실성 앞에서 타인과 완전히 ‘평등’해지는 인간의 존재 의미를 성찰한다. 죽음은 가장 고독하고 개별적인 체험이다. 동시에 죽음은 나 홀로 완결할 수 없는 사건이다. 자기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가 없는 한 ‘나’는 죽을 수 없다. 나의 죽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단독적(singular)’ 의미, 동시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보편적(universal)’ 의미. 타자의 시선과 사회적 의례라는 그물망에 놓임으로써 절대적으로 고독한 개인의 죽음은 ‘의미’를 갖는다. 인생은 불합리하다. 누구도 나의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다. ‘일단’ 노력하다가 ‘어쩌다’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지도 않는다. 선한 자의 죽음과 악한 자의 성공 앞에서 우리는 죽음의 불합리함을 토로한다. 그렇다면 삶에 의미는 없는 걸까? 사사키는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는, ‘우연’과 ‘어쩌다’ 살아가야 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 ‘당신’이 스스로 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사키는 무의미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이라는 대안적 의례를 통해 삶과 죽음에 스스로 의미를 만드는 ‘새로운 주체’를 선언한다. 장례와 국가와 종교에 ‘기억’을 의탁하는 죽음의 의미를 벗어나 죽음 앞에서 기꺼이 웃을 수 있는 주체. 인생의 무의미 앞에서 초조한 사람, 죽으면 잊힐까 두려운 사람, 하루하루 공허하고 외로운 당신에게 “철학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가장 짧은” 입문서를 권한다. 우리, 잘 살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