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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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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전기
카이사르 저/김한영 역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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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문

문사 카이사르
전쟁터에서... 글을 쓰다

무사 카이사르
군인의 윤리를 알다, 리더의 윤리를 알다

카이사르, 그의 삶과 죽음

제1권 기원전 58년
카이사르 42세, 갈리아 전쟁 1년째
침입자 헬베티족과의 전쟁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쟁

제2권 기원전 57년
카이사르 43세, 갈리아 전쟁 2년째
벨가이 정복

제3권 기원전 56년
카이사르 44세, 갈리아 전쟁 3년째
알프스 산악 부족과의 전투
바다에서의 불리한 전투
부하 장교들의 승전보
모리니족 답사

제4권 기원전 55년
카이사르 45세, 갈리아 전쟁 4년째
게르만인과의 살육전
최초의 라인강 도하
브리타니아 상륙 작전

제5권 기원전 54년
카이사르 46세, 갈리아 전쟁 5년째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로마군 최대의 참사
네르비족의 총공격
갈리아인들의 음모

제6권 기원전 53년
카이사르 47세, 갈리아 전쟁 6년째
트레베리족의 반란
제2차 라인 강 도하
갈리아의 풍습과 제도
게르마니아의 풍습과 제도
암비오릭스 추격

제7권 기원전 52년
카이사르 48세, 갈리아 전쟁 7년째
갈리아 대반란의 조짐
아바리쿰 점령
게르고비아에서의 패배
갈리아 총반란, 하이두이족 변절
알레시아 공방전

제8권 기원전 51년
카이사르 49세, 갈리아 전쟁 8년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서문
갈리아 평정을 위한 전투
갈리아 최후의 전투
임박한 내전

옮긴이의 글
카이사르 연표

저자 소개2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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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Julius Caesar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정치가. BC 100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7월을 가리키는 영어의 July는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로 원로원파인 술라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민중파인 아내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숨어 지냈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귀환, 정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BC 69년에는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을 거쳐 BC 63년 종교상 최고직인 종신 대신관이 되었다. BC 60년에는 폼페이우스 및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다. BC 58년∼BC 50년, 속주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정치가. BC 100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7월을 가리키는 영어의 July는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로 원로원파인 술라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민중파인 아내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숨어 지냈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귀환, 정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BC 69년에는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을 거쳐 BC 63년 종교상 최고직인 종신 대신관이 되었다. BC 60년에는 폼페이우스 및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다. BC 58년∼BC 50년, 속주 갈리아의 장관으로서 갈리아 전쟁을 수행, 브리튼과 게르만 족의 영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대부분 평정하였다.

BC 53년 삼두체제의 한 중심인 크라수스가 동방원정에서 전사함으로써 원로원 보수파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으며 BC 51년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로마 소환과 군대해산을 결의하자, BC 49년 1월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함으로써 내전을 시작하였다. BC 45년 3월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들까지 진압함으로써 마침내 5년간의 내전을 종결시켰다. BC 46년에 10년 임기의 독재관이 되었고, 곧이어 BC 44년에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율리우스력을 제정하고 노예에게 관직을 허용함으로써 로마 시민권을 대폭 확대하는 한편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 로마를 정비하는 등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지나친 권력의 집중을 견제하고자 했던 원로원 공화파와 공화정 지지자들에 의해 BC 44년 원로원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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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고, 서울예술대학교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했다. 오랫동안 번역에 종사하며 문학과 예술의 곁자리를 지키고 있다. 옮긴 책으로 『미를 욕보이다』 『무엇이 예술인가』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빈 서판』 『언어본능』 『지금 다시 계몽』 『영혼을 찾아서』 『그러나 절망으로부터』 『생각은 어떻게 행동이 되는가』 『각인된 지식』 등이 있다. 제45회 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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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07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630g | 153*224*30mm
ISBN13
9788995671306

예스24 리뷰

명장의 기록, 『갈리아 전쟁기』
---여준호(Peteryeo@yes24.com)
『갈리아 전쟁기』는 지금의 서유럽 지역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역에서 기원전 58년부터 8년간 벌어졌던 전쟁을 카이사르가 직접 기록한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카이사르가 저술한 부분은 전쟁 7년째에서 끝이 나고, 8년째는 그의 부하였던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썼다. 갈리아 전쟁 이후 내전이 시작되고, 그것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사르가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종군 기자도 아니고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냉정함을 유지한 채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자신이 수행한 전쟁을 기록으로 남겨야할 이유가 있었다. 원로원의 의견도 묻지 않고 갈리아 지방을 정복한 카이사르를 총독에서 해임하고, 게르만인에게 그를 넘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고 하니 카이사르에게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다.

‘자기 정당화’라는 목적이 분명한 글이지만 카이사르는 결코 냉정함과 객관성을 잃지 않는다. 『갈리아 전쟁기』가 당시 로마군의 군사 전략은 물론이고, 갈리아 지방의 문화를 기록한 사료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 ‘객관성’ 덕분이다. 객관성을 위해 카이사르는 ‘3인칭’의 시점을 유지한다. 섣불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전쟁을 묘사한 그의 글은 목표 독자인 로마 시민들에게 높은 신뢰감을 주었을 것이다. 좋은 일은 자기가 다 했고, 나쁜 일은 다 반대했다는 식의 정치인 회고록과 비교하면 같은 목적이라도 결과는 사람에 따라 천지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카이사르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마치 유치원생이 ‘병팔이 오늘 착한일 했어요.’라고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글쓴이가 카이사르라는 것을 나처럼 당시 사람도 뻔히 알고 있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오히려 객관을 가장하여 자신의 성과를 더 자랑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갈리아 전쟁기』의 객관성은 문체가 아니라 내용에서 나온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으로 넘쳐나는 카이사르에게 자기 자랑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사람인데 전혀 자기 자랑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독자로서 딱 한 장면 카이사르의 잘난 척(?)을 엿볼 수 있었다. 갈리아 전쟁 7년째에 병사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카이사르의 명령을 듣지 않고 후퇴하는 적을 추격해 46명의 백인대장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본문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적의 진지를 점령하고 높은 산과 성벽을 단숨에 돌파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승리와 결과에 대해 총사령관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 것은 무례하고 오만한 행위로,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고 혹독하게 나무랐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용맹함과 대담성 못지않게 분별력과 자제심을 가져야 한다고 훈계했다.’ (p.315).

카이사르의 자신감이 자만심이나 우월감으로까지 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의 자신감과 우월감 없이 없다면 대군을 지휘할 수 없다. 로마군의 희생에 안타까워하던 2,000년 전의 독자들도 ‘카이사르의 말만 잘 들었다면...’이라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에 비해 야만인이었던 갈리아인의 종교나 풍습을 묘사하면서 ‘야만인’이라는 호칭은 사용하지만 절대 무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 이것도 카이사르가 지키고자 했던 객관성의 일환이겠지만 갈리아의 문화를 존중한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뢰를 어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군에게 포용 정책으로 일관하고, 단순히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갈리아의 속주화를 고려한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객관성 말고도 『갈리아 전쟁기』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많다. 로마군은 갈리아 전쟁 4년째 라인 강을 건너면서 다리를 건설한다. 카이사르가 기록한 자세한 다리 건설 과정은 로마군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 났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이처럼 카이사르는 전쟁 중에 사용된 로마군과 갈리아인의 기술이나 무기, 전략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갈리아에 가보지 못한 로마 시민들을 위한 배려였겠지만 수많은 역사학자들에게 『갈리아 전쟁기』가 소중한 사료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게다가 이 책에는 당시를 경험하지 못했던 독자들을 위해 복장, 무기, 진지의 모습 등을 묘사한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카이사르의 의도, 역사학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을 꼼꼼한 주석을 통해 보완해 주고 있어 독자들에게 책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에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군단에서 백인대장이라도 시켜달라고 부탁했을 겁니다.”라는 이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갈리아 전쟁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나는 일개 졸병이라도 좋으니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군단에 소속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 한 명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고, 철저한 준비로 반드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총사령관 밑에서라면 전쟁의 두려움도 사라지지 않을까.

『갈리아 전쟁기』을 읽은 로마 시민들 중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라면 로마를 맡겨도 좋겠다고. 그렇기에 카이사르의 반대파인 원로원 의원들은 그를 더욱 두려워했고,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전쟁기』의 마지막 장을 마무리할 시간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쉬울 뿐이다.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지만 인간 카이사르의 열렬한 팬으로써 루비콘 강을 건넌 후 동족과 싸워야 했던 내전을 다룬 『내전기』의 번역본을 기다릴 뿐이다.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운이니까.

책 속으로

카이사르는 10군단을 독려한 후 우익으로 달려갔다. 이곳에서 아군은 크게 고전하고 있었다. 여러 대대의 기들이 한곳에 몰린 탓에 12군단 병사들은 너무 밀집해 있었고 이로 인해 서로의 전투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4대대는 백인대장들이 모두 전사하고 기수가 살해되었으며 대대기마저 사라졌다. 다른 대대의 백인대장들도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용맹함으로 명성이 높은 수석 백인대장 푸블리우스 섹스티우스 바쿨루스마저도 온몸에 중상을 입어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다른 병사들도 움직임이 둔해졌고, 후방의 병사들 중에는 투척 무기를 피하기 위해 대열을 이탈하고 물러나는 자들도 있었다. 적은 공격을 늦추지 않았는데 정면 아래에서는 언덕 위로 밀고 올라오고, 양쪽 날개에서는 계속해서 아군을 압박했다. 전력 보강마저 불가능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방패를 두고 왔기 때문에) 후방의 한 병사로부터 방패를 빼앗아 들고 최전선으로 나아갔다. 그는 백인대장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독려하고, 병사들이 검을 보다 쉽게 휘두를 수 있도록 앞으로 전진하여 대열을 넓히라고 명령했다. 카이사르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희망과 용기의 불씨를 되살렸다. 병사들은 저마다 큰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총사령관에게 분투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자 적의 기세가 주춤해졌다.

--- p.113~114

동서고금의 명문으로 통하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를 번역하게 된 것은 옮긴이로서 큰 영광이자 부담이었다. 4권의 영역본을 비교하며 번역해야 했고 또한 기존에 번역되어 있는 정보들도 제각각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보의 부족 또는 과잉으로 번역하는 펜이 흔들릴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2000년을 뛰어넘어 전해지는 생생한 전율과 감동 덕분에 최후의 한 문장까지 즐겁고 기쁘게 번역할 수 있었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출판사 리뷰

고대의 위대한 장군이 자신의 출정을 직접 들려주는 유일한 책

기원전 100년 7월 12일에 태어나, 7월을 의미하는 영어 가 그의 이름 <율리우스Julius>에서 유래된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등의 말을 남기며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 동안 지금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역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당시의 전투 상황과 정복 과정을 매년 한 권씩 기록하여 전쟁이 끝날 즈음인 기원전 51년 초에 로마에서 출간한 책이 바로 『갈리아 전쟁기』이다. 갈리아 전쟁의 승리는 그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번에 <사이> 출판사에서 펴낸 책은, 9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발행된 6권의 라틴어 원본을 비교하면서 영어로 번역한 H. J. 에드워즈의 <라틴어-영어 판본>인 『Caesar: The Gallic war』(Harvard University Press)를 주 텍스트로 삼았으며,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라틴어 원본인 『Commentarii De Bello Gallico』와, 최근 20년 동안 출간된 영문판 4종을 함께 비교하며 번역하였다.

카이사르는 정치가로서는 공화정 체제의 파괴자로, 또는 제정帝政의 초석을 굳힌 자로 상반되게 평가된다. 정치가로서 카이사르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관점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양한 의견을 보인다. 그러나 문사文士, 문인文人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만큼은 한결같다.
방대한 독서량, 폭넓은 저술 활동
언어 전달 능력과 문장력이 뛰어났던 카이사르의 독서량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도 인정할 정도로 방대했다. 그는 갈리아 지역으로 떠나기 전까지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그 빚의 상당수는 당시 값비싼 파피루스에 필사한 두루마리 책들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의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 행위>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뒤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독서량과 함께,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수시로 글을 써 다양한 책을 출간했다.

전쟁터에서도 붓을 놓지 않는 문사(文士)

카이사르는 생전에 많은 양의 글을 남겼는데, 그가 쓴 글이나 책들 대부분은 소실되었고,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책은 『갈리아 전쟁기』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원로원파와 하나가 된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다룬『내전기』 단 두 권뿐이다. 두 권 모두 라틴어로 씌었으며, 특히『갈리아 전쟁기』는 <라틴 문학의 정수, 전쟁 문학의 명저> 등으로 평가받고 있다.

『갈리아 전쟁기』가 이민족과의 전쟁을 기록한 책이라면, 『내전기』는 동족과의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갈리아 전쟁기』에서는 카이사르 자신이 펼친 군사적 전술과 전투 상황을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면,『내전기』에서는 동족과 싸워야 하는 고뇌와 긴박하게 돌아가는 로마 내부의 정세를 들려주며 순간순간 고민하며 망설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이사르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갈리아 전쟁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독일, 스위스 일대를 포함하는 서유럽 지역으로, 이곳에는 기원전 60년 당시 100여 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로마의 속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갈리아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수시로 로마의 국경 지대를 공격하면서 반란을 일으킨다. 카이사르는 이곳에서 그의 인생 6분의 1을 보내면서 그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된다.

카이사르는 이 전쟁으로 도시 국가 로마의 국경을 라인 강까지 확장시켜 로마인들에게 국경에 대해 넓은 시야를 갖게 해주었다. 또한 <로마인 최초>로 라인 강 도하를 두 차례, 도버 해협을 두 차례 건너면서 유럽 내륙에 처음으로 <그리스-로마 문화>가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해 서유럽 문화권의 기초가 형성되는 틀을 제공하기도 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영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 해협을 건너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까지 했다.

『갈리아 전쟁기』에서 카이사르는 <현장감 있는 전투 묘사>와 함께, 당시 로마군이 펼친 군사적 전략과 기술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때론 불리한 전투 상황에서 공포에 떨며 우왕좌왕하는 로마군의 모습과(68, 115, 169페이지) 그로 인한 처참한 패배의 실상(203-214페이지), 그리고 총사령관의 고뇌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부하들이 이룬 승리>에 대해서는 일일이 부하들과 병사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 공적을 글로 남겨 치하하고 있다(136페이지). 또한 적군의 용맹함도 인정하여 그 용맹함을 글 속에서 표현하고 있으며, 적군이 펼치는 전략적 우수함을 소개할 때는 자신의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로마군(위쪽)과 갈리아인(아래쪽)의 전투

갈리아 전쟁의 내용
로마 속주의 국경을 침범한 헬베티족과 게르만족인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투(제1권)를 펼친 후부터 카이사르는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다. 먼저 북쪽의 벨가이를 공격했고(제2권), 알프스 산악 부족을 정복했고, 해전에 강한 베네티족과 대서양에서 전투를 펼쳐 임기응변의 전략으로 승리를 한다(제3권). 그런 다음 갈리아인을 지원하는 게르만인과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라인 강과 도버 해협을 건넜다(제4권).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제5권)으로 갈리아 북서부에 대한 해외 세력의 개입을 차단했지만, 이때부터 <불길한 징조>(203페이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명의 부장과 로마군이 학살당하고 두 곳의 진지가 맹렬한 공격에 시달린 것이다. 이듬해의 원정(기원전 53년, 제6권)은 북쪽의 부족들을 정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다시 한 번 라인 강을 건너야 했다. 제7권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로 일어난 갈리아 대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아르베르니족과 핵심 부족들이 일으키고 로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한 하이두이족까지 가세한 갈리아 대반란은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갈리아인들의 필사적인 저항이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제8권 첫머리에는 “이제 갈리아 전체가 복속되었다”라고 써 있지만 아직 몇몇 곳에서는 반란군 지도자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8권의 마지막 몇 장은 기원전 50년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제 갈리아는 평온해졌지만 로마에서 벌어지는 몇몇 사건은 내전을 향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는 마침내 루비콘 강을 건넌다.

고대의 위대한 장군이 자신의 출정을 직접 들려주는 유일한 책
총 8권으로 기록된 이 책은 해마다 한 권씩 연대기 순으로 기록하여 묶은 책이다. 1권부터 7권까지는 카이사르가 집필하였고, 갈리아 지역을 평정한 후의 전후 처리 시기인 기원전 51년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가 죽은 후 그의 참모이자 비서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써서 추가하였다.
특히 카이사르가 갈리아인 중 유일하게 자신의 적수가 된다고 생각한 베르킨게토릭스와의 전투 상황을 다룬 제7권은 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이사르는 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이후 <로마를 지배할 권력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객관적 서술을 위한 3인칭 시점>, 문화사적 사료로서의 가치
카이사르의 글은 간결하고 힘이 있으며, 결코 화려한 수식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관찰력, 생사의 고비에서도 잃지 않는 객관성을 바탕으로 <자기 중심적인 설명은 최대한 배제하여 사실 위주로 간단 명료하게> 군더더기 없이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전쟁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자신을 <카이사르가, 카이사르는 ....>과 같은 3인칭으로 표현하여 객관적 서술을 지향했다. 이 책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을 1인칭으로 표현한 것은 3,4회>에 그친다 (110페이지). 이것은 감정이 이입된 <주관적 서술을 최대한 배제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서술을 지향>하고자 한 그의 표현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주관적 기억에서 나온 객관화된 기록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다른 전쟁기와 특히 다른 점은, 카이사르는 이 책에서 긴박하게 진행되는 전투 상황을 서술하다 갑자기 자신의 적군인 갈리아인, 게르만인, 브리타니아인들의 풍습과 민족성, 지리적 환경, 생활, 문화 등에 대해 기록하여 기원전 1세기 서유럽 역사에 대한 문화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부여하고 있다. (193, 244, 252페이지)

군인의 윤리를 안 무사(武士), 강제력이 아닌 지도력을 발휘하는 리더
카이사르는 늘 <군인의 윤리the moral of soldier>를 강조했다. 그의 군인의 윤리는 <상호 이해와 자기 존중>에 기초한다. 그는 부하들과 부하들, 부하들과 장교들 사이의 상호 이해를 특히 강조했으며, 부하들의 패배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용서하나, 비겁함, 폭동, 탈주 같은 죄악에 대해서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단호히 처벌하였다(68-71페이지). 그래서 그의 병사들은 그를 지휘관이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경하였으며(285페이지), 8년간의 전쟁을 치른 후 내전 동안에도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부하를 잘 고르는 지휘관이 아닌, 부하를 잘 다루는 지휘관
또한 카이사르는 <부하를 잘 고르는 지휘관이 아니라, 부하를 잘 다루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 책 곳곳에서 부하들이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그들이 이룬 승리나 전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136페이지). 전투 중에는 직접 방패를 들고 최전선으로 나가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병사들은 그의 <실천하는 리더십>을 통해 더더욱 그를 따르게 되었다.

마흔이 되어야 뜻을 펼치는 대기만성형 카이사르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부각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비교적 늦었다. 그는 40대에 들어선 뒤에야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대 사람인 키케로나 폼페이우스가 2,30대에 이미 국가적,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카이사르는 2,30대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40세에 삼두 동맹을 맺고, 41세에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선출되고, 42세부터 쉰 살에 이르는 8년 동안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인간 카이사르
돈과 사랑에 있어 보여주는 사고의 자유로움, 마흔이 넘어 성공가도에 진입하는 중년의 힘, 부하들을 감복시키는 매력, 적은 군사로도 갈리아의 수차례 반란을 진압한 판단력, 전쟁의 와중에도 집필을 멈추지 않는 문사로서의 자세, 루비콘 강을 건널 때의 결단력과 비극적인 죽음까지,
그의 삶은 2천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추천평

카이사르는 마흔이 지나서야 출세를 하기 시작했다. 출세하자마자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아니 세계가 그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시오노 나나미
카이사르의 글은 알몸과 같아서, 인간이 몸에 걸치는 장신구를 벗어던졌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 있다.
키케로
『갈리아 전쟁기』는 전쟁 기술에 관한 최고의 교과서다.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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