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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종말을 부정하고 _9 엘리제를 위하지 않으며 _17 마녀재판 _23 은혜를 갚지 마세요, 어머니 _34 여신을 사랑한다는 것 _39 절망 종말에 절망하고 _49 미래의 괴수 _61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_64 육식성 _73 타협 종말과 타협하고 _87 민주주의의 위기 _95 소설, 한국을 말하다 _102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_111 잘 가요, 시리우스 친구들 _118 수용 종말을 수용하고 _127 현수동의 아침 _138 정시에 복용하십시오 _145 승인할까요 _152 알골 _162 사랑 마침내, 종말을 사랑하고 _195 작가의 말 _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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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말이지, 고통이나 손실은 받아들일 수 있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지만, 불공정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 p.13 「종말을 부정하고」 중에서 그때 어머니는 인간의 말을 쓰지 않으셨어요. 은혜를 갚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으셨어요. 은혜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인간들이 쓰는 말이잖아요. 인간들이나 그런 식으로 서로에게 빚을 지우죠. --- p.36 「은혜를 갚지 마세요, 어머니」 중에서 “신들은 모두 전쟁광이야. 다만 서로 취향이 다른 것뿐이지. 어떤 신들은 고대의 백병전을 선호하고, 어떤 신들은 중세의 공성전에 미쳐 있어. 근대에 내려오는 신들은 초인이나 영웅이나 전설이 되는 대신 초인적인 지휘관, 영웅적인 분대장, 전설적인 저격수가 되지.”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신이 없잖아.” 내가 말했다. “현대전은 신들 기준으로는 너무 심심하거든.” --- pp.40-41 「여신을 사랑한다는 것」 중에서 세상은 망했고, 다시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서강대교 북쪽 끝에 있다. --- p.78 「육식성」 중에서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차라리 답을 끝내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 p.93 「종말과 타협하고」 중에서 글쎄요, 어떤 면에서는 저희가 이 스트레스를 더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지구인들은 고통을 평가하는 데 서툴러요. 세상사를 시각적 내러티브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기승전결이 없거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고통을 터무니없이 낮춰 봅니다. 층간 소음 같은 거요. 어떻게들 견디는지 모르겠어요. --- p.120 「잘 가요, 시리우스 친구들」 중에서 나는 그녀의 악몽이 죄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이곳의 결계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 경우가 그랬다. 지구에서 간혹 꾼 꿈과 결계 근처에서 생생하게 겪은 악몽은 확연히 달랐다. --- pp.187-188 「알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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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호라니, 정말 웃겨. 누구의 희망인데?”
무너지기 직전의 세계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상상력 『종말까지 다섯 걸음』은 ‘부정’ ‘절망’ ‘타협’ ‘수용’ ‘사랑’을 키워드로 5부를 나누고, 각 부의 맨 앞에 소행성 충돌로 인한 멸망을 앞둔 인류의 이야기를 배치했다. 「종말을 부정하고」로 시작해 「마침내, 종말을 사랑하고」에 이르는 다섯 편의 짧은 소설을 통해 같은 상황에 놓인 인물들 각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공정 앞에서 분노하고, 목숨을 건 선택 앞에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며, 곧 폭발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저 아득함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장강명은 종말이라는 완전한 ‘끝’ 앞에서 시시각각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고, 종말을 앞두고도 사라지지 않을 불공정한 시스템과 폭력을 내다본다. 늘 동시대 사회를 날카롭게 묘파해왔던 작가의 흡인력 있는 문장들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 때까지 이 서사가 어떻게 끝날지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믿기지 않아. (……)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는 것도, 그걸 인류가 막지 못한다는 것도, 정부가 무너진 것도, 전기와 수도가 끊긴 것도. 경찰 옷을 입은 사람이 경찰이 아니라 무장 강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방공호 안에 있어도 충돌이 일으킬 지진파 때문에 다 죽고 말리라는 것도, 우주 그물 같은 황당한 프로젝트에 그 많은 돈을 썼다는 것도.”(9쪽) 각 부의 키워드 아래 묶인 다른 소설들 또한 신과 마녀, 초능력자 등 우리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상상으로 다채롭다. 지구에서 살다가 떠나가는 외계인과 우주에서 태어난 초인들, 이처럼 비상한 힘을 지닌 존재가 만약 실제로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잘 가요, 시리우스 친구들」에는 지구를 떠나 고향 행성으로 돌아가려는 시리우스인에게 배신감과 서운함을 토로하는 인간이 등장하고, 「알골」에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초인 ‘알골’을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인류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괴수가 출현하는 「미래의 괴수」, 좀비가 되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좇아 비척비척 걷는 인간을 그린 「육식성」은 어떤 특정한 사건 ‘이후’의 삶 역시 지리멸렬하게 펼쳐지리라는 섬뜩한 예감을 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장강명의 상상력은 때론 위트 있게, 때론 슬프도록 서늘하게 뻗어나간다. 아무도 그 코드네임의 유래를 설명하지 않았으나, 의미심장한 작명이었다. 예로부터 알골은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거대한 비극을 예고하는 별이었다. 알골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랍어로 악마라는 뜻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알골을 적시성(積屍星)이라고도 불렀다. 알골이 나타나면 큰 재난이 벌어져 시체가 쌓이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164쪽) 설화와 옛이야기를 비틀며 상쾌한 반전과 장르적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도 빠뜨릴 수 없다. 「엘리제를 위하지 않으며」 「은혜를 갚지 마세요, 어머니」에는 우리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지 소스라치며 깨닫게 하는 장면이 번번이 등장한다.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는 시공간을 막론하고 전해져오는 슬픈 ‘공무도하가’이다. 그런가 하면 현대 한국 사회를 비튼 「민주주의의 위기」 「소설, 한국을 말하다」에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묵직함이 있다. 이러한 변주는 짧은 소설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날렵한 ‘펀치’이자 ‘재미’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종말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재미있고, 홀가분하고, 상쾌하게 써내려간 소설 장강명은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를 장편소설가, 그리고 논픽션 작가라고 여기고 있”다고 밝힌다. 짧은 소설을 쓰면서는 “재미있었다”고 고백하는데, 경쾌한 마음으로 시작한 소설이어서인지 책 속 이야기들은 마치 빠르게 날아가는 작은 우주선 같다. 순식간에 다른 세계를 열어젖힌 후, 독자들이 중간에 내릴 수 없도록 계속해서 이끌고 나아간다. ‘종말까지 다섯 걸음’만을 남기고 출발했던 이 스무 편의 이야기가 끝내 도착하는 곳은 어디일까. 손쉬운 낙관과 비관을 모두 피해 가는 작가의 솜씨를 따라 마지막 장에 이르러 결말을 읽고 나면, 가벼운 충격과 함께 희미하게 번져오는 고양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의 말 대단한 야심이나 목적의식을 품고 시작한 글은 아니지만, 쓰다보니 재미있었습니다. ‘소설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어서 홀가분하기도 했고, ‘어깨 힘 빼고 편하게 써도 괜찮겠지’ 생각하니 마음이 상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기분이 좋아서 앞으로도 가끔 쓸 것 같습니다. (……) 이 글을 읽으실 때쯤 여러분도 상쾌한 기분이길 바라봅니다. 2025년 여름 막바지에 장강명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