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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한 덕수궁
저자의 말 : 정동길을 따라 덕수궁의 역사를 묻다 1. 환구단 가는 길 2. 대한문으로 들어가다 3. 중화전, 자립의지를 보여주다 4. 석어당, 임금이 머물렀던 집 6. 함녕전과 덕홍전, 황제의 공간 7. 정관헌, 커피향과 음악이 흐르다 5. 즉조당과 준명당, 덕수궁의 모태 8. 석조전, 황제가 꿈꾼 근대화 9. 덕수궁을 돌아나오는 길목에서 10. 정동길을 걷다 부록 : 덕수궁 십경 / 정동길 십경 / 조선왕조 가계도 / 덕수궁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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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덕수궁으로 떠나는 여행에서는 조선왕조의 정릉동 행궁으로, 궁궐 경운궁(慶運宮)으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던, 덕수궁의 주변 영역을 함께 돌아보고자 합니다. 봄볕이 따사로운 날이나 가을 노란 은행잎이 눈부신 날, 정동길과 시청 앞 광장 건너편 환구단 터까지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서는 여행을 권하는 이유는 저만치 보이는 덕수궁이나 환구단 터를 성큼 건너가 쓱 둘러보기에는 이 작은 궁궐이 지닌 이야기가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를 만나게 될 것이고, 어린 덕혜옹주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운명을 되돌리려 몸부림쳤던 용기와 그들을 둘러싼 음모와 외세의 힘에 의해 떠밀려갔던 슬픈 역사 또한 바라보게 되겠지요. 이렇게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영광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궁궐입니다.
--- p.17 국가 의례로서 제천 의례가 다시 실시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입니다.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새벽 2시,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광무개혁을 실시한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첫 제사를 지내고 황제(皇帝)에 즉위하여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으로 고쳤습니다. 과거 조선의 왕들이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만 하늘에 직접 제를 올릴 수 있다며 제천의식을 삼갔지만, 고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짓고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독립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했습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인 환구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제천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천제(天祭)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례로서 황제 고유의 의무이자 특권이었습니다. --- p.27 사건은 바로 1904년(광무 8) 4월 14일의 경운궁 대화재입니다. 경운궁을 잿더미로 만들고 오늘날 덕수궁의 입지를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위축시킨 계기가 바로 1904년의 화재 사건입니다. 당시의 화재를 전했던 일본 측의 언론에 의하면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 온돌을 수리한 뒤 말리는 과정에서 아궁이에 불을 잘못 때어 나무기둥에 불이 옮겨 붙어 삽시간에 급한 북동풍을 타고 궁궐 전체로 번져 하늘이 새카맣게 변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 p.140~141 석조전은 고종 황제의 집무실과 외국 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서 지어졌습니다. 전체 3층 건물로 지상 층에서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1층은 황제의 접견실,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계획되었습니다. 전통 궁궐의 전각들이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과 그 용도에 따라 그 위상을 달리하고 구분해서 썼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파격적인 공간 구성을 받아들인 거였지요. 실제로 석조전은 황궁의 정전으로 계획되었으나 1900년 착공해서 1910년에야 준공되어 대한제국이 제대로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 p.218p 현재 덕수궁 밖에 있는 중명전은 원래 수옥헌의 중심 건물로, 1900년경 경운궁 안에 최초로 지은 양관으로 대한제국의 황실 도서관 용도로 건립하였습니다. 수옥헌 경내에는 중명전의 북쪽으로 만희당, 흠문각, 서쪽에 양복당, 경효전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고종 황제가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대한제국 근대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로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되었고,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중명전에서 이준, 이상설 등 헤이그 특사를 친견하고 친서를 전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 p.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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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릉동 행궁에서 경운궁으로, 그리고 덕수궁까지
덕수궁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궁궐로, 정릉동 행궁으로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문을 지나 중화문을 통해 중화전 영역에 들어서면 그 뒤편에 단청을 하지 않은 2층 집이 웅장하게 서 있다. 덕수궁의 뿌리가 되는 ‘석어당’이라는 건물이다. 원래 조선왕조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이곳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환도 후에 머물게 되면서 행궁이 되었다.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부르던 이곳을 ‘경운궁’이라고 정식 궁궐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했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았다. 경운궁이 근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고종의 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를 데리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되었고, 곧바로 경운궁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이 있었고, 선교사들이 많이 모여 살던 외국인 거주지였다.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후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영광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궁궐이 되었다. 2. 환구단에서 시작하여 정동길을 따라 걷는 덕수궁 여행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환구단’을 지었다. 중국 사신을 위한 숙소나 연회장으로 사용되던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중국 황제가 내린 국새를 버리고 대한제국과 황제를 상징하는 대한국새를 제작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이 되었던 환구단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헐려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이 들어섰고, 현재는 조선호텔 뒤쪽으로 삼문과 황궁우만이 남아 있다. 대한문을 들어서서 덕수궁 내부로 들어오면 다른 궁궐과는 다른 건축물이 눈에 띈다. 하나는 동서양 양식이 적절히 혼합된 ‘정관헌’이고, 다른 하나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양식 석조 건축물 ‘석조전’이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감상하며 외교 사절을 만나곤 했는데, 이곳에서 고종에 대한 커피 독살 미수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근대 국가로의 지향을 상징하던 석조전은 1900년에 짓기 시작해서 1910년 완공되었으나 그 해 국권을 빼앗겨 대한제국의 정전으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 그 의미가 훼손되었다. 19세기 후반 정동 주변은 외교의 중심지답게 각국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었다. 영국 공사관, 미국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과 대한성공회 대성당, 정동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19세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동극장 옆 작은 골목길에 들어선 중명전은 의미 깊은 역사적 장소다. 경운궁 안에 지어진 황실 도서관이었는데,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고종 황제가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근대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중명전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친견하고 친서를 전한 곳이다. 중명전 전시장에서는 을사늑약으로 인해 위기에 임박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역사가 아직도 흐르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로의 여행을 추천한다. ◆ 추천의 말 올해 10월에는 대한제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형, 훼손된 덕수궁 석조전이 2009년부터 시작된 복원의 대장정을 마치고 1910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석조전 건립 100여 년 만에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난 의미 있는 시점에 이런 소중한 책자가 집필, 발간되어 덕수궁을 대내외로 새롭게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상 덕수궁 관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