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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시간의 예술 2장. 음악으로 생각하기 3장. 과거의 현존 4장. 음악 2.0 5장. 지구촌 시대의 음악 글을 마치며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Nicholas 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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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든 현악 4중주든 연주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악적 시간을 만드는 것은 이런 관계의 연결망이다.
시간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떠올리게 된다. 1951년 독일의 사회학자 알프레트 슈츠는 상호주관성에 대한 글에서 시계의 시간과 음악의 시간을 구분했다. 어디서든 모든 초와 분이 동일한 시계와 달리 음악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역동적이고 협의되며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이후에 나올 히피 언어를 예고하기라도 하듯 슈츠는 말했다. “음악적 과정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연주자와 청자가 서로에게 ‘주파수를 맞추고tuned-in’ 동일한 흐름을 함께 거치면서 함께 늙어간다.” --- p.16, 「시간의 예술, 함께 늙어가기」 중에서 사람들은 어째서 모레스키 등 초창기 녹음들이 내보이는 증거에 거부감을 느낄까? 추측건대 그들은 고전음악의 기초 자료인 악보에 음악의 많은 것이 담기지 않으며 그렇기에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전에 음악의 소리가 어땠는지 우리가 실제로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믿기 싫었던 모양이다. 1902년에 누군가가 그토록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노래했다면, 1802년에는, 1702년에는 어땠겠는가? 고음악 이론가들의 확신에 찬 주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 p.54, 「음악으로 생각하기, 문화로서의 음악」 중에서 내가 말하는 작곡 ‘행위’란 종이에 뭔가를 적는 것 이상의 의미다. 적힌 것을 보고 있노라면 베토벤이 음을 이리저리 밀어붙이고 음이 그에게 반응하여 말을 건 과정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는 음악으로 생각하되 종이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스케치는 그저 그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그의 생각 자체다.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과학 역사학자 찰스 위너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위너는 파인만의 작업 노트를 가리키며 그가 머릿속에서 작업한 것의 기록이라고 했고, 그러자 파인만이 반박했다. “기록이 아닙니다. 일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종이에 쓰면서 일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그 종이라고요.” 똑같은 의미에서 베토벤은 종이를 가지고 일했고, 그렇게 그는 음악으로 생각했다. 클라크가 말한 확장된 마음의 또다른 예다. --- p.68, 「음악으로 생각하기, 음악 실험실」 중에서 고전음악 전통과 20세기 대중음악의 연결점은 여기서 나왔다. 음악이 작곡가의 자기표현이라면 작곡가는 스스로에게 거짓이 없어야 했다. 롤랑의 베토벤 숭배의 토대는 성실함이었다. 작곡가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는 상업성에 영합하는 것, 즉 인기나 세속적 성공, 돈 같은 걸 얻고자 개인적 양식과 미적 가치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베토벤조차 이런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협의하고자 유럽의 권력자들이 모여 빈 회의(1814~15)를 열었을 때 베토벤은 훗날 돈벌이를 위해 썼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곡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중 최고 성공작은 공간적인 음향 효과를 주고 포격 소리를 흉내 내 비토리아 전투를 실감나게 묘사한 〈웰링턴의 승리〉였다. --- p.81, 「과거의 현존, 자기표현의 가치」 중에서 디지털 다운로드가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이 음악과 곧장 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음반사들은 음악을 그런 식으로 팔지 않았다. 그러자 고객은 웹을 검색하고 무료로 음악을 다운로드 받았다. 이에 음반사는 소비자들을 고소했고, 그 결과 시장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앞선 섹션에서처럼 나는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려고 한다. 디지털 기술이 음악 사업에 안겨준 충격을 이해하려면 디지털 이전 시대가 어땠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시작은 베토벤 시대다. 음악학자들은 음악이 세속적인 관심사를 초월한다는 오랜 믿음 때문에 오랫동안 음악 사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초연은 처참한 손실을 남겼다. --- p.136~137, 「음악 2.0, 소리를 팔아라 」 중에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서로 다른 문화적 ·인종적 집단이 생산적으로 공존하기가 힘들어졌다. 음악 역시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세기에 무차별적으로 ‘그들’을 묶어 ‘우리’를 규정했던 낯선 문화의 정형화된 언어가 최근에 다시 등장했다. 20세기에 미국 백인 가수들이 흑인 가수들을 모방했다면, 흑인 미국 가수들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흑인처럼, 미국 백인이 생각한 진정한 흑인 가수의 창법으로 불러야 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중국에서도 나타난다. 소수민족이 음악가로 성공하려면 한족의 기대에 맞춰야 한다. 요컨대 음악에는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이 여전하다. --- p.157, 「지구촌 시대와 음악, 음악과 세계화」 중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음악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험할 때 의미를 가질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종식될 때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를 다 함께 부른 것이 그렇고, 스웨덴 합창단에서 활동하면서 주위에서 목소리들을 듣고 음악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았을 때가 그렇고, 그저 소중한 사람과 음악을 함께 들을 때도 그렇다. 비록 잠깐일지라도 음악의 친밀감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는 궁극적으로 데이비스가 말하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을 통해 서로 인간임을 나누는 문제다. --- p.171, 「글을 마치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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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에서 함께 반응하는 예술로서의 음악
악보 그 너머의 음악을 탐구하다 음악은 무엇일까? 니컬러스 쿡은 음악이 ‘어떤’ 예술인지, 그 성격을 펼쳐 보이려는 시도로 이 작은 책의 개정판을 연다. 물론 음악은 문화적 산물이자 실천이며, 재현이기도 하고 수행이기도 하다. 다만 그는 “음악은 모든 문화 활동을 통틀어 시간과 가장 본질적으로 얽힌 예술일 것”이라면서 음악이 ‘실시간’ 연주로서 갖는 의미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탐구한다. “우리는 다가오는 매 순간을 산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향해 계속 나아가고 일어나는 일에 최선을 다해 반응하면서 삶을 이어간다. 마치 즉흥연주처럼.” (16~17쪽) 서로를 면밀히 듣고 곧장 반응해야 하므로 역동적이고 유연하고 상황적인 즉흥연주의 시간은 “사회적·문화적 삶을 이루는” 창조성과 연결되며, 전통과 규칙에 속한 기존 음악 및 사고와 구분되기도 그러한 구분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니컬러스 쿡은 개인이 음악으로 경험하는 횡적 시간에서 인생의 시간, 사회의 시간, 음악의 역사라는 종적 시간을 능숙하게 오가며 음악이라는 옷감을 짜낸다. 음악사의 치열한 역사적 진정성 논쟁, 경전을 만들기 위해 작동하는 ‘게이트키핑’, 악보와 악기를 통해 음악으로 사고하는 음악가들, 젠더와 인종 문제, 정체성의 표식으로 기능하는 음악, 베토벤에서 밥 딜런으로 이어지는 영웅적 천재들에 대한 선망 등등 흥미로운 논의들이 그 옷감의 선명한 무늬를 이룬다. 소리로 들리도록 만든 ‘사회’ 음악은 우리를 어떻게 연결하는가 음악을 사람들이 만드는 ‘산물’로만 보지 않고 현재 행하는 ‘활동’으로 보는 관점에서 음악은 사회의 다른 곳에서 일어난 변화를 그저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다. 니컬러스 쿡은 말한다. “소리와 사회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음악은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다. 음악은 그 자체로 사회다. 소리로 들리도록 만든 사회.” 예를 들어 아파르트헤이트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탄생하는 과정의 사회적 긴장과 협의는 당시 음악 스튜디오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났고, 확실한 서열과 관리 체제를 갖는 오케스트라 조직은 현대 산업사회의 폭넓은 특징을 보인다. 즉 음악과 사회에서 변화는 어느 방향에서든 동등하게 올 수 있다. 음악은 음악 너머로까지 효과가 미치는 일들이 벌어지는 장이다. 사실, 그 과정을 21세기의 우리는 몸으로 겪어왔다. LP에서 CD로, 다시 디지털 파일과 스트리밍으로 이어진 매체의 변화는 음악을 점점 더 우리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음악은 특정 장소와 시간을 정해 감상하는 대상에서 일상에 스며든 ‘생활양식’이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재설정하는 디지털 기술은 음악 생산자와 청자 간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보컬로이드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가 지원하는 가상의 여학생 캐릭터 하츠네 미쿠에게서 음악은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공동 활동이다. 이러한 음악 2.0 시대의 특성은 엘리트적 권위와 단일한 해석에 기대던 고전음악 시대와 분명히 구별된다. 음악을 읽어내는 힘이 필요한 시대 지금 우리가 음악을 다시 배워야 하는 이유 이러한 모든 변화를 짚어낸 뒤 니컬러스 쿡이 향하는 곳은 낙관보다는 우려다. 그는 초판과 개정판 모두에서 광고 음악을 통해 음악의 힘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광고업자의 메시지를 듣지만 여기서 음악의 힘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는 깨닫지 못한다. 음악은 이런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행하며, 인위적인 것이면서도 ‘자연’처럼 행세해 감시망을 빠져나간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한 힘이 음악에 있다. 피리 연주로 아이들을 유인하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세계 곳곳에서 전해오는 인어 이야기, 그리스 신화 속 사이렌 이야기 등을 생각해보라. 식민지 개척에 음악을 이용했던 제국주의자들은 어떤가. 근래 세계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서로 다른 문화적·인종적 집단이 생산적으로 공존하기 힘들어진 상황을 음악 역시 벗어나지 못하는 점도 우려스럽다. 더 복잡한 사정도 있다.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파는 스포티파이 등 웹2.0 서비스들 말이다. 내밀한 감정에, 가장 깊숙하고 가장 진정한 자아에 친밀하게 접근하는 음악을 당신이 언제 어떻게 골라 듣는지 아는 것은 음악 앱들이다. 사반세기 전에 뉴미디어 평론가 하워드 라인골드는 놀라운 예지력으로 “미디어가 앞장서서 욕망을 조종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 지구적인 상업주의가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도 있다고 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욕망 조종의 선봉에 음악이 있다. 음악의 힘을 이해하는 미디어 문해력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점인 만큼 새로 쓴 《음악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은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유효하게 다가간다. 이 책을 계속 번역해온 음악 전문 번역가 장호연의 소회를 여기에 소개한다. “한 번도 음악을 문해력의 대상으로 본 적이 없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태초에 음악과 말은 하나였다. 음악은 감정을, 말은 의사소통을 나눠 맡으면서 점차 분화한 것이다. 말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음악이라고 다를까? 음악에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사용하고 즐기려면 음악도 배워야 한다. 이 책은 이 시대에 필요한 바로 그 배움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서로 인간임을 나누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이 책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