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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Ⅰ. 나는 왜 쓰는가?
자기소개의 글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나? 어느 서평가의 고백 Chapter Ⅱ.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 소설의 옹호 소년 주간지 새로운 말들 예술과 프로파간다의 경계 문학과 전체주의 유럽의 재발견 문학과 좌파 좋은 나쁜 책들 문학의 파괴 정치와 영어 작가와 리바이어던 Chapter Ⅲ. 문학이란 무엇인가 찰스 디킨스 고래 뱃속에서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 러디어드 키플링 W. B. 예이츠 마크 트웨인, 허가받은 재담꾼 아서 쾨슬러 굴과 갈색 흑맥주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 검토 리어왕과 톨스토이, 그리고 광대 Chapter Ⅳ. 정치적인 글쓰기 우든 좌든 나의 조국 웰스와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스페인 내전 회고 사회주의자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프로파간다와 대중의 말 영국의 반유대주의 파국적 점진주의 제임스 버넘과 관리자 혁명 역자 후기_ 조지 오웰, 정직하고 용감한 에세이스트 |
George Orwell,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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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는 건 고통스러운 질병과 오래도록 드잡이하는 것처럼 끔찍하고 소모적인 투쟁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악마에게 붙들려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것이며 그게 아니라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 글쓰기다. 그 딱 달라붙는 악마는 관심을 가져달라고 울부짖는 아기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기 개성을 제거하려고 지속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재미있는 책을 쓰지 못한다는 것 역시 옳은 말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의 글쓰기 동기 중 어떤 것이 가장 강력한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중 어떤 것을 따라가야 하는지는 분명하게 안다. 내 작품을 되돌아볼 때 생기 없는 책을 썼거나, 아니면 전반적으로 화려한 글귀, 의미 없는 문장, 장식에 불과한 형용사,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여대던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늘 그랬듯이 정치적인 목적 없이 막연히 글을 쓰던 때였다.
--- p.15~16 내가 아는 한 예술은 언어의 조잡함과 애매모호함을 먹으면서 번성한다. 나는 단지 생각의 전달 수단인 어휘의 기능을 비판할 뿐이다. 정확성과 표현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언어는 아직도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 내가 제시하는 해결안은 새로운 말들을 발명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자동차 엔진을 위해 새로운 부품을 발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휘가 마음의 생활을 상당 부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해보자. 우리 삶을 표현할 수 없다는 무기력한 느낌이 아예 없고, 예술적 기술이라는 속임수에 의존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해보자. 그러면 우리 의미를 표현하는 것은 대수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올바른 어휘를 선택하여 제자리에 배치하는 문제로 축소된다. 이렇게 된다면 그 이점은 아주 분명할 것이다. --- p.10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정치를 피하는’ 게 모든 작가의 의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당치도 않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어떤 경우든 지금 같은 시대에 지식인이 완벽하게 정치를 회피하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정치적인 충실성과 문학적인 성실성의 경계에 대하여 지금보다 더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제안할 뿐이다. (…) 작가가 정치에 관여한다면 시민으로서, 개인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것이지, 작가의 신분으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의 감수성을 핑계로 내세워 정치판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지저분한 일들을 피할 권리가 작가에게 있다고 보지 않는다. (…) 자기 정당에 봉사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해도 상관없지만, 정당의 지시에 따라 글을 쓰는 일만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가 그런 행위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작가는 당에 협력하면서도 동시에 필요할 때에는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거부할 수도 있어야 한다. --- p.205~206 우리는 아주 개성적인 글을 읽으면 그 페이지들 뒤에서 작가의 얼굴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게 작가의 실제 얼굴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스위프트, 디포, 필딩, 스탕달, 새커리, 플로베르를 읽을 때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비록 이들 중 몇몇은 실제 얼굴을 잘 모르고, 또 알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다. 우리가 보는 얼굴은 작가가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얼굴이다. 디킨스의 경우에 내가 보는 얼굴은 디킨스의 사진 속 얼굴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닮아 있긴 하다. 턱수염을 약간 기르고 얼굴빛이 붉은 마흔 살쯤 된 남자의 얼굴이다. 그는 웃고 있으나 그 웃음 속에는 약간의 분노가 있다. 그러나 의기양양한 승리감이나 악의는 전혀 없다. 그것은 뭔가에 맞서서 언제나 싸우되 겁먹지 않고 공개적으로 싸우는 사람의 얼굴이며, 관대하게 분노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유로운 지성을 갖춘 19세기 자유주의자이다. 오늘날 우리 영혼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저 모든 편협하고 냄새나는 지배적 주류 사상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 p.298 정당의 제재를 받아들이거나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작가는 조만간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당의 지시를 따르거나 입을 다물거나. 물론 당의 지시를 따르면서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부르주아’가 말하는 사상의 자유는 환상이라고 아주 손쉽게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증명을 끝냈을 때도 ‘부르주아’의 자유가 없으면 창작의 힘이 위축되어버린다는 심리적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앞으로 전체주의 문학이 생겨날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아주 다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은 개인적인 것으로서 심리적 정직함, 그리고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최소한의 검열을 요구한다. 이런 전제조건은 시보다 산문에 더 중요하다. 1930년대의 가장 뛰어난 작가들이 시인이었다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정통성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언제나 산문에는 해로우며, 특히 가장 무질서한 형태의 문학인 장편소설에는 아주 해롭다. 로마가톨릭교도 중에 훌륭한 소설가가 몇 명이나 되는가? (…) 이런 분위기에서 좋은 장편소설이 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좋은 소설은 정통성만 따지고 드는 사람들도, 자신의 비정통성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도 써내지 못한다. 좋은 소설은 겁먹지 않은 사람들이 써내는 것이다. --- p.344~345 소련 체제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강력히 소련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보아 버넘이 언급한 ‘관리자’ 계급 소속이다. 즉 그들은 좁은 뜻에서는 관리자가 아니지만 과학자, 기술자, 교사, 언론인, 방송인, 관료, 직업정치인 등 넓은 의미에서 관리자인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귀족적인 체계로부터 속박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산층이며, 더 많은 권력과 특권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소련을 은근히 지지하면서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체제를 보거나, 혹은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체제란 무엇인가. 바로 상류층을 제거하고 노동계급을 낮은 자리에 그대로 고정해둔 채 그들과 무척 비슷한 관리자들에게 무한한 권력을 넘겨주는 체제이다. 많은 영국 지식인이 소련 체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소련 체제가 명백하게 전체주의로 기울어진 이후의 일이다. 비록 소련을 지지하는 영국 지식인들은 부정하고 나서겠지만, 버넘은 실제로 그들의 은밀한 소원을 대변해준다. 그 소원이라는 것은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낡은 사회주의 형태를 무너뜨리고 지식인들이 마침내 권력의 채찍을 손에 쥘 수 있는 계급사회를 도입하는 것이다. --- p.632~6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