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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의 시집(실천시선)

책소개

목차

제1부 격렬비열도|간|시인들|바람 인형|폐결핵|동백, 대신 쓰는 투병기|호버링|시인 클럽|북역|한밤의 조문|저녁 비|박제들|외곽|눈먼 자들의 도시|거짓말쟁이 미군과 고장 난 창녀|우리들의 중세
제2부 복서 2|오빠|아르바이트 소녀|복서 연대기|누나|목련 출처|피자 배달 소년 표류기|박제사들|중3|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원정|목련 하차|호모 텔레비전 사피엔스 1|호모 텔레비전 사피엔스 2|호모 텔레비전 사피엔스 3|멸치
제3부 인천|비글호, 비굴호|용호동|음악처럼|술래와 순례|가족 도감 1|가족 도감 2|산책|구제역|문장|닻|한 잎의 무덤|집시의 시간|마네킹|비둘기처럼 다정한
제4부 와중|당귀|자소상|우물|시인의 손|흠집|물집|의자|병산 행간|빗방울 화석|암 병동|체르노빌|감기|무덤들|에필로그
해설 홍기돈
시인의 말

저자 소개 1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200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내 가슴의 무늬」 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가 있으며, 산문사진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그림산문집 『그림약국』, 장편소설 『토끼가 죽던 날』이 있다. 2006년 제24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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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5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242g | 148*210*10mm
ISBN13
9788939222335

책 속으로



아버지는 침묵했다
병 앞에서
간처럼 침묵했다
아버지 등 뒤로
죽음 몰래 다가설 때마다
위험하다고 툭툭
등 두드리던 기침, 소리
침묵하는 간

심장과 엄마는
언제나 혼자 뛴다
약을 사러 갈 때도
약을 먹여야 할 때도
두근두근 울먹울먹
혼자만 서두른다
아버지,
여전히 침묵하는 간

심장은 간 옆에 있지만
피(血)는
간에 닿기 위해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
엄마는 왜 날마다 병든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는가
심장을 떠난 피는 어떻게
발끝까지 흘러갔다
간으로 되돌아오는가

집 나간 자식들은
아버지 몸속을
흘러 다닌다 매일
변두리 혈관을
돌고 돌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죽은 아들은
아버지 몸속에서
그대로 죽은피가 되었다

아버지 누운 볼기 아래
슬그머니 욕창이 슬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몸을 씻겨줄 때
자꾸만 커지는 아버지 음경
자꾸 커지는 엄마 한숨 소리
여전히, 침묵하는 간


복서 2

지구의 스파링 파트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삭월(朔月)의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들 3은 실업자,
나비처럼 날아도 벌처럼 쏠 데가 없다
오늘도 집 안을 겉돌며 눈치만 살핀다

꼭두새벽 집을 나서는 엄마는
정류장까지 로드워크를 한다
아버지가 녹아웃된 후
대신 엄마가 장갑을 끼고 매일
지옥의 링 위로 올라간다

아들 3은
품속에 카운터블로를 숨긴 채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달과 엄마처럼
숨죽이며 참고 견딘다

탐색전이 지나치면
식구들의 야유를 받는다
나가 싸우지 않는 아들 3을 향해
아들 1이 경고를 보낸다
도대체
누가 적(敵)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사랑했다고 치자,
아들 1과 한 여자가
링 위에서 엉겨 붙는다
사랑도 결국
사람과 무관한 일이 되어버린다

때리는 자와 맞는 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로기 상태에 빠진 생이여
너에게 확,
수건을 던지고 싶다


음악처럼

이별하는 사람들에게
레퀴엠을 들려주고 싶어
조금은 서글프고
북처럼 가슴 치는 음악으로
떠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무겁게 만들어주고 싶어

싸움질하는 사람들에게
탱고를 들려주고 싶어
때론 끌어당기고
때론 밀어내지만
음악이 멈출 때까지
잡은 손 놓지 않는
탱고 춤을 추게 하고 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재즈를 들려주고 싶어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마지막 숨을 들이켤 때,
은은한 트럼펫 소리를
폐부 깊숙이 불어
넣어주고 싶어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박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박후기 시인이 그리는 가족 풍경은 암울하다. 한평생 고된 노동을 하다가 병을 얻어 “녹아웃된” 늙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매일 “지옥의 링 위로 올라”가는 어머니, “대기실에서 청춘을 보내”며 늦은 밤 “취한 주먹”이나 툭툭 던져보는 아들, 24시간 편의점에서 밤낮을 보내며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다는 열아홉 살짜리 딸아이(「복서 2」, 「아르바이트 소녀」). 부모 세대는 여전히 삶의 최전방에서 고전 중인데, 자식 세대는 일자리가 없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자리라고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이나 최저임금에도 모자라는 아르바이트가 고작이다. 그야말로 비극과 절망만이 유전되는 “그로기 상태에 빠진” 삶인 것이다.

꼭두새벽 집을 나서는 엄마는
정류장까지 로드워크를 한다
아버지가 녹아웃된 후
대신 엄마가 장갑을 끼고 매일
지옥의 링 위로 올라간다

아들 3은
품속에 카운터블로를 숨긴 채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_「복서 2」 부분

가끔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아, 다음 생엔
최저인간을 보장받고 싶어요
_「아르바이트 소녀」 부분

사람들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그들의 삶에 행복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어머니가 매일 새벽 일찍 지옥의 링 위로 올라도 그들의 늙고 병든 삶이 꿈꾸는 행복은 도둑맞은 것 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삶이 가진 이러한 비극성 때문일까,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마음이 얼어붙었다. “날아갈 필요가 없어진 새처럼, 자유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비글호, 비굴호」) 이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벽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는 살아 있는 박제가 되어버렸다(「박제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몸, 타인의 눈물이라도 마셔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자조 섞인 웃음을 낄낄거리며 눈먼 과메기처럼 줄지어 앉아 “술잔에 담긴 참치 눈물을 나누어 마”시곤 한다(「눈먼 자들의 도시」).
격렬과 비열 사이에 놓인 삶

시인은 「바람 인형」이라는 시에서 이 벼랑 같은 삶을 버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가 바라보는 바람 인형의 손짓은 마치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드는 (…) 영혼의 구조 신호” 같다. 사람들은 생(生)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있는 힘 다해 춤을” 춘다. “사랑 결혼 취업 재혼 개업” 같은 이벤트를 쉼 없이 벌인다. “사는 게 이벤트”이므로, 행복이라는 낱말이 적힌 “기약 없는 초대장을 들고/흔들리면서 바람 같은/시간을 소비”한다.

무릎 꿇지 않으려면
바람의 뼈를 이식받아야 해
그리고 겨울이 오면
트리 끝에서 명멸하는
알전구라도 끌어안으며
내일을 생각해야 해
주저앉으면, 끝이야
그게 죽음이야
_「바람 인형」 부분

그러나 우리 삶이 언제나 비극의 연속만은 아니다. 시인은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생각함’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인들」이라는 시를 통해 상처를 주기만 했던 삶에 적절한 복수를 하는 순간을 그린다. 그 복수는 피의 복수가 아니라 꽃의 복수다.

스물여섯 살, 요즘 같으면 막 무언가를 시작할 나이. 이시카와 다쿠보쿠에겐 가난과 각혈로 얼룩진 생이 이미 끝나버린 때. 죽기 전, 힘겹게 구한 5엔을 손에 쥐고 밥을 먹는 대신 꽃집에 들러 1엔어치 목련과 1엔짜리 꽃병을 샀다는 시인.
_「시인들」 부분

“가난과 각혈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요절한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는 생(生)이 끝나기 전 힘겹게 구한 돈으로 밥을 사 먹는 대신 목련과 꽃병을 샀다. 그는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가난과 불행에 대항하여 칼을 꺼내는 대신 방패를 선택한 것이다. 아니, 시인에게는 꽃이 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평생 마음속에 꽃을 그리며 살아온 이에게 생의 마지막 선물로 한 끼 밥보다는 꽃이 더 어울린다.
심장을 떠난 피가 발끝까지 흘러갔다 돌아오듯 병들어 쓰러진 남편 곁으로 돌아오는 아내(「간」)의 삶에,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밥알을 캐내던 누군가 돌에 맞아 죽어갈 때도 꽃잎처럼 떨어지는 과자 부스러기를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는(「비둘기처럼 다정한」) 이들의 삶에 필요한 ‘복수’는 무엇일까?
박후기 시인은 시집 맨 앞에 실린 표제작 「격렬비열도」에서 “격렬과/비열 사이//그 어딘가에/사랑은 있다”라고 말한다. 이 선언 같고도 염원 같은 시에서 “사랑”이라는 낱말을 ‘삶’이라 바꿔보면, 우리의 삶이 “격렬”이나 “비열” 어느 하나만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격렬”과 “비열”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어떤 열망에 대한 애증 섞인 수식어일 것이다.

이가 깨져 대문 밖에 버려진 종지에
키 작은 풀 한 포기 들어앉았습니다
들일 게 바람뿐인 독신,
차고도 넉넉하게 흔들립니다
때론,
흠집도 집이 될 때가 있습니다
_「흠집」 전문

삶이 우리에게 가하는 무참한 폭력과 그 삶에 맞서 격렬과 비열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려낸 이번 시집의 후반부에는 “상처가 안식으로 전환하는 순간”(‘해설’ 중)을 구현한 시들이 있다. 시인의 이런 마음이 격렬과 비열 “사이//그 어딘가”에 존재할 “사랑”을 기다리는 이들의 흠집 많은 삶을 조금은 위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추천의 글

길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박후기가 그렇다. 그의 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는 나그네다.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버린 나그네. 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충분히 경건한 나그네. 그리고 그것으로 암각화 같은 시를 적는 나그네.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미덕이 있다. 그들에게는 ‘착(着)’이 없다. 애착도, 집착도, 도착도 그들을 잡지 못한다. 길 위의 미덕. 박후기의 매력적인 시가 가진 미덕이다.
_ 허연(시인)

시인의 말

날은 저물어가고, 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나는 언제나 밤새도록 시를 기다리지요.

이울어가는 달이 나를 가만두지 않네요.
시여, 조금만 서둘러주세요.
새벽이 오면 달도 나도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마음이 열리면 그 어떤 밀봉도 소용없다는 걸 아실 거예요.
나는 수줍게, 당신 앞에서 열리기 위해 또 한 권의 시집을 엮는답니다.

마음 놓고 잠든 적 없는, 나의 그 모든 절망들이여, 이젠 안녕히.
_ 박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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