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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작가의 말 해설 |
Bora Chung
정보라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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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 p.9 그녀는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아내와 나눠 먹었다. 행진이 다시 출발했다. 아내는 그녀와 함께 또다시 대열 끝에서 천천히 느긋하게 걸었다. “그때 나 꼬시려고 네가 일부러 느리게 걷는 줄 알았지.” 나중에 그녀가 말했다. --- pp.20~21 “이봐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 p.104 그래서 단단은 알에게 의지한 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발과 비교적 잘 움직이는 발을 조심스럽게 조절하며 오로지 걷는 데만 집중했다. 시체 무더기를 떠나, 삶이 있는 곳으로. --- p.128 죽은 자들이 일어섰다. --- p.139 죽은 자들은 반란군이 남긴 총탄과 무기를 들고 원한을 풀기 위해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었고, 인간의 시간은 이제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천히 느긋하게 움직였다. 하나의 방향,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 p.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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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걷는 데만 집중한
삶이 있는 곳으로의 걸음 ⟪처단⟫은 2024년 12월 3일 계엄을 그리고 있다.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무장한 군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비롯한 헌법기관을 무력화했고, 이에 반발하는 시민을 공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비상계엄은 6시간만에 해제되었지만, 그 몇 시간은 누군가의 일상과 삶, 의미, 가치, 시간이 멈추고 허물어지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작가 정보라가 치밀하게 담아낸 소설이 ⟪처단⟫이다. 비상계엄은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다는 단순한 사실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결과를 남겼다. 누군가는 1979년 이후 45년 만에 선포된 비상계엄 앞에서 절망적인 과거로의 회귀를 경험했고, 어떤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깊이 있는 작품으로 담아낸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과 비상계엄이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라는 데 새로운 절망을 느꼈다. 원 달러 환율 급등과 코스피 하락 등 환율·주식·채권 금융시장에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되며 누군가의 가계 경제는 위기를 맞이했다. 국제적으로 한미일 관계 및 글로벌 금융시장에 대한 우려가 커져 외교·투자 신뢰가 흔들리며 어떤 이의 소중한 일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사회적으로 약자와 소수층에 더 위험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처단⟫에 잘 드러난 것처럼 이 상황을 타개하고 풀어간 것도 소위 약하고 적은 수의 우리 주변 사람들, 바로 시민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연대가 6시간만에 계엄을 해제한 것처럼, 희망적이기만 한 미래 전망은 차지하고라도 어쩌면 비상계엄이 야기한 불안과 공포도 헤쳐갈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무심하고 끈기 있게 ‘오로지 삶이 있는 곳으로 걷는 데만 집중하는’ 시민의 걸음이 암시한다. 작가의 말: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야기 미래가 없는, 혹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소설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작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절반 정도는 사실이다. 나는 남편의 입원과 수술 때문에 2024년 12월의 대부분을 대구에 있는 병원에서 지냈다. 남편이 입원하기 일주일 전, 수술 열흘 전에 지금은 파면된 반역자가 내란을 일으켰다. 그 주 주말에 서둘러 국회 앞으로 갔는데 특정 정당 국회의원 모두 투표를 거부해서 탄핵안이 부결되었다. 망할 내란정당과 망할 내란수괴와 저주받을 포고령 때문에 남편과 함께 병원에 있는 내내 나는 너무 무서웠다. 특히 의료인을 처단하겠다는 부분이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다. 남편이 입원하기 전에는 남편만 걱정되었는데, 남편이 입원하고 나니 같은 병동에서 매일 마주치는 다른 모든 환자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썼다. 초안은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병원을 배경으로 수술 전후 ‘그녀’와 ‘아내’의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탄핵안 가결을 나는 대구 중심가의 국채보상로에서 집회에 참여한 다른 동료 시민들과 함께 보았다. 국채보상로 왕복 7차로가 꽉 찼고, 탄핵안이 가결되자 모두 다 응원봉을 들고 혹은 들지 않고 일어나서 환성을 질렀다. 승리의 순간을 대구 시민들과 함께해서 영광이다. 그곳이 대구였기 때문에, 일명 ‘보수의 성지’였기 때문에, 탄핵안이 가결된 순간의 그 환성이 더욱 소중했다. 앞으로 선거 결과 따위가 어떻게 되든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에 내가 대구 시민들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란수괴가 파면되는 장면을 나는 구미에 있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지회 사무실에서 노조 동지들과 함께 보았다. 그때는 박정혜 동지와 소현숙 동지가 공장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파면이 인용되지 않으면 고공농성 하는 동지들이 위험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응원하러 온 동지는 커다란 꽃다발을 사 왔다. 결국은 꽃다발을 사 온 동지의 예상이 맞았다. 꽃다발은 서울에서 온 동지가 옥상에 있는 박정혜 동지와 소현숙 동지에게 올려보냈다. 그때는 고공농성이 곧 끝날 줄 알았다. 우리가 세상을 그래도 조금은 바꾸었을 것이라 믿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자들도 고용승계 되어 평택으로 가고, 세종호텔 해고자들도 복직하고, 조선소 하청노동자들도 밀린 임금도 받고 가혹한 작업환경도 조금은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장애인 동지들이 휠체어에서 분리되어 짐짝처럼 끌려가다가 팔다리가 부러지는 야만적인 국가폭력은 이제 없을 것이라 믿었다. 내란은 어떻게든 물리쳤지만 그 후폭풍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더 싸워야 한다. 계속 싸울 수 있는 세상을 지켜낸 것만은 다행이다. 그러니까 나는 동지들과 함께 계속 싸울 것이다. 투쟁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지만 내가 지키지 않으면 빼앗기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란이 나에게 남긴 교훈이다. _정보라 작가 해설: 혼(신)으로 일어서는 공동체 《처단》은 이런 문장으로 실행된다. “이것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9쪽) 얼핏 지당하게 수긍되는 명제와도 같은 이 문장은 SF라는 정보라의 문학적 영토와 ‘기록’이 배면에 품은 사적(私的), 사실적 성격이 충돌하며 한 편의 소설을 향해 나아가는 점화의 순간으로 작동한다. 이제 막 소설의 문밖으로 나온 독자는 이 문장에 동의하는 한편 그러기에는 너무도 익숙한 상황적 전개 때문에 기시감을 초과하는 현실성마저 느끼며 이야기의 문을 마저 닫지 못한 마음으로 서성대고 있진 않을까. 우리가 아는 현실에서 단지 한 발짝 더 뗐을 뿐인데 그 발밑은 천 길 낭떠러지라는 지독히 사실적인 그림. 정보라의 SF가 섬뜩한 이유는 단 한줄기의 서사만을 비틀었을 뿐이라는 점으로부터 육박해온다. 이렇게 말하는 게 허락된다면 이 소설은 ‘르포르타주-SF’다. 《처단》은 그날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정보라의 현실에서 ‘2차 비상계엄’은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자행된다. 이 소설의 서사가 긴박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이유가 지난한 현실의 더블(Double)이기 때문임은 우리의 트라우마로서 확인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고 기록하는 ‘거짓말’로 SF를 유려하게 채택하며 동시에 현실을 향한 경고로 제출된다. 신념으로서 SF는 사회적 의미에 대한 재사유를 위한 것임을 상기할 때 이 이야기는 그런 일은 오직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야 한다는 간곡한 소망으로 써 내려간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결코 쉬 봉합되지 않을 우리 사회의 상흔을 염려하는 자의 주문을 닮았다. 이 서사는 현실에서 출발하고 현실을 초과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기도문처럼 당도한 이 문장은 기억하듯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이다. 그것은 주어와 목적어를 치환해도 성립하는 웅숭깊은 질문이다. 소설의 결말이 왜 혼의 모습으로 열려야 했는지에 대한 답은 이 문장의 사유와 공명한다. 시민들은 극한의 공포 앞에서 단말마의 비명이거나 그마저도 소거 당한 채 죽임을 당한다. 제대로 되지 않은 절차 없고 맥락 없는 죽음이다. 한 사회가 자의적이고 견고한 구획을 짓고 부적당하다고 거부한 자들을 ‘처단’한다. 그러니 이들은 ‘부정된 자’들이다. 유령이 죽음이라는 부정을 뚫고 ‘돌아오는 자(re-venir)’라는 레비나스를 조금 변형한다면 혼령은 그 뜻에 더해 ‘거기 있는 자’이기도 하다. 토속적 원귀란 생의 일면을 부정당함으로써 죽음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거기 있지 않나. 정보라는 이들에게 약자가 가장 거대해지는 방법, 공포를 무기로 들려주며 복수를 감행한다. 공포는 딱히 가시성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되레 그 비가시성, 혼몽의 상태를 연출함으로써 존재의 내재적 불안을 상기하고 그럼으로써 주체의 자유를 속박한다는 점에서 힘이 세다. 거기에 혼령은 가부장제 권력을 세습한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대가 끊기는 일, 씨족의 절멸임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것을 예감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혼령의 복수는 피 한 방울 없이 완수할 가능성을 확보한다. 본디 공포란 뒤집힌 현재, 미완의 욕망이 배태한 양상적 존재이기에 숭고하기까지 한 그것은 초월이 아니라 환상을 경유해 세계를 전복하는 상상력, SF의 힘이 된다. 혼령은 어쩌면 이 모든 사태, 정치적 올바름을 초과하는 육체성에서조차 경계를 지워나가는 작업이라 말할 수 있겠다. 공포의 조성은 기실 오랜 민담과 전설이 가진 민족적 ‘정서’에 기대는 가장 선량한 방식일지도. 그러니까 한국의 혼령은 종교적 색채를 띤 악귀(Devil)와 달라서 사태의 결과를 따져 묻고 응징하는 것보다 더 깊은 정동에 기댄다. 그런 정동 아래서 자고로 죄지은 자들은 발 뻗고 잠들지 못한다. 이 역시 선한 마음에 대한 끈질긴 믿음의 자장 안에 있는 게 아닐까. ‘Break the story(이야기를 깨뜨리다)!’라는 표현은 어떤 이야기를 맨 처음 하는 사람에게 부여된다. 리베카 솔닛은 기존의 것을 깨뜨리는 이야기는 주변부에 있다면서 거기에 더해 방금 일어난 이야기를 가져오라 말하는데, 저널리즘을 위시한 이 말은 그 자리에 《처단》을 놓을 때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방금 일어났고 그러나 아직 미결인 일에 대해 정보라는 날래게 쓴다. 그가 고통을 남의 것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 택한 방식 역시 거기에 (함께) 있는 것 그리고 쓰는 것이니까. 《처단》은 위반 세력의 처단이라는 조항을 완전히 전복하여 가장 문학적으로 행사하는 정보라식 단죄다. 작가는 혼령이 그러하듯 ‘거기 있음’으로, ‘지켜보고’ ‘쓰는’ 자다. 이 책이 출간될 때는 전 대통령의 내란우두머리죄에 대한 1심 선고 이후겠지만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이보다 더욱 지독한 처단은 되지 못할 것이다. 눈치 보지 않는 입들, 거기 있는 자들로 인해 우리의 현실은 결코 만만하게 부정의 쪽으로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임을 믿는다. 그런 믿음은 이 소설의 혼이 일어서는 그림, 폭압의 어깨에 올라타는 전개가 가리키는 것이 진짜 정치 주체의 기립과 억압 공동체의 연대라는 데서 발아한다. 눈을 부릅뜬 공동체에 죽은 자와 산 자가 따로 있을 리 없다. 역사와 국가를 법과 국민을 일하는 사람과 여린 이들을 편취하고 윽박지를 때 시민은 언제든 그들의 어깨에 올라탈 것이다. 그때, 죽은 자가 산 자와 과거가 현재와 손잡을 것이다. 우리가 혼을 다해, 온몸으로 일어서는 순간이다. 우리는 복수형으로 거기 함께 있는 자‘들’이다. 이것은 정보라가 보내는 경고장이다. 그래서 이 잔혹한 이야기는 슬프게 희망차다. _황유지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