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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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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1부
결 / 잘, 지냈어요? / 바람의 내부 / 세상의 모든 한 번 / 떨림 / 환장 / 오렌지의 올바른 사용법 / 다정 /
놀이터에서의 한때 / 아우성치는 빛 / 계절들에게 쓴다 / 갈증 / 봄날 / 계단의 행방 / 고통 / 담배 자국 /
꽃들 / 정오

2부
모비 딕 / 외출 / 직립의 어둠들 / 꽃에 관한 어쩔 수 없는 상상 / 글루미 선데이 / 숨 / 어둠의 단면 /
어떤 예감 / 잠재적 슬픔 / 고통의 자세 / 불쾌한 나뭇잎 / 구름의 뼈 / 홀리데이 / 적멸 / 벌판으로 간다 /
왼쪽으로 가는 길 / 뉴스의 여자 / 마디

3부
저녁 / 속삭임 / 바람의 사원 / 고요 / 늙은 나비 / 꽃피는 힘 / 노을 속에 잠기다 / 불의 뿌리 / 부레옥잠 /
투명한 날들 / 고등어 / 버드나무 여자 / 달콤한 한때 / 잠 속의 생애 / 유리점 / 창밖, 한 아이 / 이명

해설 최초의 꽃 신동옥

저자 소개

저자 : 배용제
배용제는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이 달콤한 감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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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6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153쪽 | 222g | 128*205*20mm
ISBN13
9788932027579

책 속으로

비가 쏟아졌다
꽃들이 마구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처음 어깨를 두드리는 빗방울들은 단 한 번 나를 느끼곤 사라졌다

집집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늙은이들은 창밖을 힐끔거렸고 아이들은 장난감을 망가뜨렸다
무감각한 것들에게만 불이 담겨졌다

끝없이 제 색을 짓이기며 꽃이 지고 진 꽃 뒤로 처음의 꽃이 피어났다
나무와 늙은이 들은 한 번의 늙음을 오래오래 견디고 있었다
곳곳에서 구조 신호처럼 돋아난 불빛들이 서로의 증오를 확인하며 달아올랐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고
한 번이란 결말에 이르자 서로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마음들이 무너졌고
비가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처음과 혹은, 모든 마지막과
모든 한 번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저녁이 되는 오늘
---「세상의 모든 한 번」 전문


나는 수많은 것들의 증오에 대해 증명하고 싶다

바람난 사내의 피부가 반질반질 빛나는 월요일 저녁
창가에선 몇 개의 화분이 말라죽고 있었다
멀리서 휘파람을 부르며 풋내기 계집애가 오고 있는 월요일 저녁

어느새 치를 떨며 빛나는 가로등 아래로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수레를 끌고 어떤 사막을 건너온 낙타를 바라보던
거대한 광고판 아름다운 공주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희디흰 살결 위에서 헐떡이는 바람
가장 불규칙적인 방법으로 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났다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뿐이지

그렇게 나는 너에게 수많은 애무의 효과에 대해 말해주었다
서로를 겨냥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증오와 권태의 종류가 있는지
매일 밤마다 깨달았다

세상에 어떤 밤이 고요했던가
또 어떤 어둠이 단 한 번이라도 세상을 내버려두었던가
꽃은 꽃의 방법으로,
바람은 바람의 방법으로,
눈물은 눈물의 방법으로 저마다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이 봄이라는 계절이고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뿐이지

그러나 나는 모두 기억하고 싶었다
어두워지면 더욱더 환하게 빛나는 공주의 희디흰 살결과
아무 때나 피어나고 아무 때나 시들어버리는 생물들의 욕정과
수많은 낙타의 길과
가장 은밀한 시간을 가르치는 고양이의 교육철학과
비명을 지르며 피어나던 너의 이상한 고통의 체위까지

다시 월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저녁이 오길 기대하는 바람난 사내가
어떤 은밀한 방식으로 이상한 꿈을 꾸어도 상관없겠지

---「다정」 전문

출판사 리뷰

다만 꽃의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수만의 어둠에서 가장 잔인한 빛깔로 터져 나온 꽃송이들, 봄밤
이 換腸의 상징에 대해,
뜨겁게 얼어붙은 겨울의 魂들이 한꺼번에 반짝이는 섬뜩한 순간들을
하필 꽃이라고 말해버렸을까
우리는 스스로 울음이 되어 무너지며 반짝거리고
최선을 다해 무덤으로 향하지만
영영 꽃이 되고 싶지 않아 까맣게 타오르던 불의 정신을
동물적인 태도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

숨이 막힐 때까지 어둠을 밀어 올리는
은밀한 울음과
마침내 터져 나와 빛나는 짐승의 자세를 취하는 꽃들
-「환장」 부분

앞서 말했듯 이번 시집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꽃’이라는 대상은 죽음을 삶의 자양분으로 인식해온 배용제의 시각을 잘 드러내주는 소재로 기능한다. 꽃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소재지만,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꽃의 이미지는 생과 죽음 가운데 서 있는 중간적 존재를 은유하기 때문이다. 어둠을 소화하고 울음을 터뜨려야만 제 빛을 발할 수 있는 꽃은, 결국 제 몫을 다하고 나면 시들어 죽는다. 최선을 다해 무덤으로 향하는 존재인 것이다. 시인은 위의 시 첫머리에서 “꽃의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꽃을 대상화하지 않고 꽃 안에 담긴 죽음충동을 고스란히 이해해보려는 그의 진중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시인 신동옥은 이러한 그의 작업을 ‘비정상으로 일그러진 마음의 자리를 스스로 돌보는 일’이라고 보며 ‘그것은 물론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고통과 불안이 낳는 공격성은 마음을 다치게 하고, 다친 마음을 돌보는 일은 고통이 허락하는 부정적인 쾌락을 즐기는 죽음충동과 희열의 작동 구조를 통찰하는 일일 것’이라고 읽어내기도 했다.


세상에 고통만큼 환한 게 있을까

짙은 어둠 속에서 고통만큼 선명한 게 있을까

엑스레이 필름 위에 하얗게 모습을 드러낸 내 몸의 통증
몸 밖으로 꺼내진 고통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본래 어두워야 할 부분이 하얗게 빛나는 것이었다
캄캄한 몸을 뚫고 들어와 아아, 소리 지르는
수만의 별들, 수천의 꽃송이들

[……]

이곳의 풍경은 누구의 가슴을 찍은 필름일까
-「고통」 부분

시인은 말한다. “나는 우발적으로 살아 있고, 지속적으로 죽어간다”(「계절들에게 쓴다」)고.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나를 내가 사용하는 것 같은 죄스러움”(「떨림」)으로 삶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은 욕망 속에서 우발적으로 살아 있고, 고통 속에서 지속적으로 죽어가는 존재다. 배용제는 이렇게 욕망이 끓어오르는 생의 한가운데에 죄의식이라는 고통을 삽입하고 욕망의 소용돌이에 조용히 닻을 내린다. 위에 인용된 시에서 시인은 “세상에 고통만큼 환한 게 있을까”라고 말머리를 열며 ‘엑스레이 필름’의 이미지로 고통을 형상화한다. 어두워야 할 부분이 하얗고, 환해야 할 부분이 검은 엑스레이 필름. 빛과 명암의 구도가 뒤바뀐 다음에서야 상처는 드러나고 환부는 고통을 열어젖힌다.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환부를 “캄캄한 몸을 뚫고 들어와 소리 지르는 수만의 별들, 수천의 꽃송이들”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날선 감각으로 어떠한 부조리와 불의에도 무감해져버린 이 세계의 엑스레이를 찍어내는 일. 상처 난 존재의 고통을 날것으로 드러내며 죽음에서 길어 올린 삶의 현장을 낱낱이 드러내는 시들. 긴 침묵의 시간을 뚫고 나온 배용제의 세번째 시집은 고통이 폭죽처럼 터져 나와 무겁게 눌어붙은 현실 세계를 각성시키는 강렬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 읽는 이에게 신산한 삶의 맛을 선사할 것이다.

■■ 시집 소개 글

그가 ‘다정’이라는 한 글자를 선뜻 건넨다. 저 식물들 소살거리는 꽃 이파리 이파리에 ‘다정’ 한 글자를 적어 보낸다. 그가 건넨 ‘다정’ 한 글자 속에서 고요와 성찰을 매개로 주어지는 식물성의 세계, 고통과 병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매개로 저항으로 탈바꿈하는 식물들의 사생활, 어쩔 수 없이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고통의 희열을 매개로 마침내 한 마리 환장한 짐승으로 돌변하여 약동하는 식물성의 세계를 읽는다.


■■ 뒤표지글

어둠은 모든 이미지들의 내면적 거처이다. 어떤 뜻밖의 이미지들도 어둠의 연금술일 뿐.
나와 당신은 한때라는 사건을 무수히 생산하고 있지만, 어둠은 그 순간의 이미지를 소멸시킴으로서 영원성이 된다. 불멸의 검은 눈동자처럼.
아무 날의 나와 당신을 상상해보면, 그것이 어떤 사건의 사실적 실체였다고 과연 명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실이라는 시간들은 얼마나 빈약한 것일까? 이것은 단지 야릇한 은유일 뿐,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어둠에 이르렀을 때, 세계와 동화된 거대한 근본적인 이미지를 가진다. 모든 존재들의 환상, 또는 소멸의 순간들에게 비로소 완성되는 연금술이다.
연금술사는 막대 황금보다는 마실 수 있는 황금을 원하며, 황금의 실체보다는 황금의 은유들에 대해 고민한다. 그들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위대한 은유들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확신하건대 어둠은 완전한 매혹의 연금술사다. 나와 당신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또 소멸시킴으로써 수많은 상상적 은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다시 나와 당신은, 수많은 길들과 수많은 문들과 수많은 집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굴절된 어둠에서 삐져나온 나와 당신이라는 이미지는 다시 어둠으로 환원되기 위해 고단하고 고독한 반짝거림을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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