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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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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1부 그날 밤 메리는 괴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의 이야기 | 메리를 위하여 | 홈그라운드 | 2020년 | 우리가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 물 좀 주세요 | 서울, 2049년 겨울 | 공항 가는 길이야 | 밤길 |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잠을 청할밖에 | 내일은

2부 한 개를 보고 아흔아홉 개를 못 보는 어둠에 감사하자

이야기의 유령 | 유령의 이야기 | 피노키오의 행방불명 | 새로운 천사들 | 벼룩의 유령 | 12월 3일 | 종의 우화 | 물웅덩이에 비치지 않는 세계 | 앎의 정체 | 그림자 기억법 | 김 선생의 얼굴 | 나쁜 생각

3부 거무스름한 현관은 나를 잠깐 동안 구부러지게 한다

남겨진 소녀 | 잠자는 숲속에 | 술래의 잠 | 누구의 집인지 알고 |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 어서 와, 엄마 | 玄關 | 어머니의 믿음 | 빈집 돌보기 |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 | 굿 플레이스 | 걸어도 걸어도 | 요양보호사가 모르는 일 | 나의 길

4부 날씨는 메시지다

안개의 시대 | 우리가 우리를 | 만약 두번째 지구라 해도 | 한 방울 | 3일의 휴가 | 거무스름하고 코믹한 세계 | 응급실 가는 길 | 안개 세이렌 | 안개와 씨름하기 | 양산 빌려드립니다 | 8월의 세이렌 |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 해변의 전화기
긴 이야기
시지프스의 판본들

저자 소개 1

시인.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춘기』,『이별의 능력』,『타인의 의미』,『에코의 초상』이 있으며 [노작문학상],[미당문학상],[전봉건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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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208g | 128*205*20mm
ISBN13
9788932045702

책 속으로

작가들은 유령과 함께 글을 쓰고 명예는 혼자 독차지했다네. 외로움을 톡톡히 견디며 비난의 화살도 홀로 맞았지. 과연 공평하게 나눌 수 있을까. 삶은 몫을 챙기려고 하지. 금가루와 모래를 나누려고 하지. 물과 소금을 나누려고 하지. 햇빛을 나누어 무지개 왕관을 쓰려고 하지. 그러나 나누고, 나누고, 일곱 번 나누어도 나누어지지 않는 것, 무한한 이야기란 그런 것이지. 무한한 사랑이란 당신과 나를 섞은 후 나누고, 나누고, 여덟 번 나누어도, 여든여덟 번 나누어도 나누어지지 않는 것, 무한한 나머지의 숫자들 같은 것.

끝없는 삶은 없고 이야기는 끝이 없지. 이야기는 유령처럼 허공을 미로로 만들며 돌아다니네. 유령의 발꿈치는 원수의 어깨를 꾹 밟아도 살을 떠난 먼지같이 가벼워라. 그러니까 너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TV를 보는 1인 가구의 일상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지. 그러니까 너 혼자 그 책을 썼다고 생각하지.

[……]

무한한 것은 늘 우리와 함께해. 보여줄까? 손거울 두 개만 가져도 무한은 즉각 모습을 드러내지. 그러나 거울 속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을 당신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네. 거울의 메아리는 끝이 없이 끝이 없이 울리고……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어. 무한에 관한 후일담은 이야기꾼들의 공동묘지를 별자리처럼 넓히고 있어. 그러므로 한 개를 보고 아흔아홉 개를 못 보는 어둠에 감사하도록 하자. 당신은 무엇을 보고 그토록 놀랐나? 그 꿈이 죽음을 깨운 것 같군. 침대에서 가슴을 쥐고 일어난 당신은 0.1을 보고 0.9를 보지 못하는 쪽창을 열었고, 밤바람이 살랑살랑 건너오고 있네. 바람과 나는 나뉠 수 없어 밤새 당신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놓기 좋다네.
---「이야기의 유령」중에서

나는 가방을 싸고 있습니다
엄마를 버려야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주머니에서 호두알을 굴리며
머리를 숙이고
강바닥에서 자갈 굴러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천장을 뚫고
깊은 밤하늘에서 지구가 굴러가는 굉장한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온통
호두알과 호두알이 굴러가는 소리에 깔려 있었습니다

[……]

토끼의 귀를 버려야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항상 짐을 싸고 있습니다

선인장처럼
낙타처럼 혹을 키웠습니다
혹처럼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먼 길을 떠났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무거울 수가!
무릎이 꺾였습니다
함부로 의심을 하고
길 위에서 무심코 가방을 열어 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엄마와
늙은 엄마와 죽은 엄마가 마구 구겨져 있었습니다

이를 갈며
불편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길 위에 가방을 버려야 나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방이 내가 가진 전부이기에
---「나의 길」중에서

동쪽 하늘에서 서쪽 하늘로 이동하는 새까만 새 떼처럼 우리는 자주 같은 감상에 빠진다. 우리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느 날 쏟아지는 슈퍼우박처럼 우리는 자주 머리를 떨어뜨린다. 우리는 자주 같은 각도로 기울어진다. 우리는 자주 같은 종소리를 듣는다. 누가, 누가, 누가 외로운 경비탑처럼 불안이 고이는 턱에다 종을 매달았을까?

작년은 2020년, 올해는 2021년, 내년은 2022년일까? 우리는 2040년을 먼저 살다 온 사람, 그를 찾고 있다. 그는 살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같은 말은 같은 뜻일까? 우리는 자주 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저기 저 노을의 소용돌이 속을 파고 들어가는 새 떼를 보며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말이 화석 속의 새 발자국처럼 먼 과거에서 왔음을 깨닫고 갑자기 놀라서 혀가 길어진다. 붉은눈비둘기의 동그란 머리가 발의 스텝에 맞춰 메트로놈처럼 까딱까딱하였다. 시간을 쪼는 스톱워치 같았다. 우리는 우리를 자주 후회한다. 우리가 더 후회하고 더 후회하고 더 후회할 수 있을까? 우리의 후회가 우리의 후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마침내 우리가 모두 똑같은 것을 목격한다면 대체 누가 목격자란 말인가. 같은 것을 보았으니 같은 증언이 우르르 쏟아질까? 박제된 새처럼 우리는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아직도, 아직까지,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중에서

출판사 리뷰

“사람들이 공포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된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더 더 무서워져도 좋지 않을까요?”

재앙의 전조처럼 작열하는 계절을 통과하며
곤박한 사랑을 상상하는 마지막 지구의 우리

생경한 듯 익숙한 표정의 공포가 속삭이는 이야기
시인 김행숙의 일곱번째 시집

1999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행숙의 일곱번째 시집 『무서운 이야기』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40번으로 출간되었다. 직전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문학과지성사, 2020)에서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심부름꾼 k’의 바구니를 꺼내놓은 시인은 데뷔 27년 차에 접어드는 올해, 바구니 맨 밑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던 ‘무서운 이야기’를 우리 앞에 마침내 펼쳐낸다. “시를 쓸 수 없”도록 하는 “공포의 감정”과 외려 “그래서 스프링처럼 쓰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 “사랑의 감정”(뒤표지 글)으로 치열하게 써 모아온 50편의 시를 총 4부로 나누어 한데 묶었다.

하루하루 뚜렷하게 체감되는 이상기후, 대비도 예측도 불가한 전대미문의 감염증 그리고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정치적 파국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창밖의 이야기」)은 작금의 상황은 일상을 압도한다는 점에서 마치 재난 영화같이 느껴지지만, 이는 분명 “세상의 모든 불행을 쓸어 담는” “70인치 검은 액정” 바깥에 실재하는 현실이다. 2020년 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 당시 ‘내가 지금 보는 것들이 앞으로 시를 쓰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힌 시인에게, 세계가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감각을 수차례 맞닥뜨리고 감내해야 했던 지난 몇 해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강렬한 사명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하나의 세계처럼 무너지고 있”(「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는 이 지구상에 “다른 나라, 먼 나라는 없”다. “날씨와 햇빛과 전염병과 바닷물과 산불을 막을 수 있는 군대”가 국경에서 철수하였으므로 이제 “모든 것은 이어져 있”(「서울, 2049년 겨울」)다. ‘나누어지지 않음’, 이 불길한 연결감은 공동의 멸각을 예고하는 어떤 조짐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누어지지 않는 것 중에서 결코 종말의 이미지와 포개어지지 않는, 영원히 인류 곁에 남아줄 무언가는 없을까? 그것은 역시 이야기이리라.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나누고, 나누고, 일곱 번 나누어도 나누어지지 않”기에(indivisible) 영영 나눌 수 있고(sharable) 그래서 “끝이 없”다. 이 “무한한 이야기”는 “당신과 나를 섞은 후 나누고, 나누고, 여덟 번 나누어도, 여든여덟 번 나누어도 나누어지지 않는” 사랑과도 닮았으며, “무한한 것은 늘 우리와 함께”(「이야기의 유령」)이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 중, “우리 심장을 열었다”(「우리가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도 다시 “심장을 나사처럼 조여줄 “무서운 이야기가”(「메리를 위하여」) 가장 오래도록 우리와 더불어 지낼 것이다. 두려움은 “안개처럼 스며들어 내벽에 끈적하게 달라붙”(뒤표지 글)는 그악한 성질을 가졌으므로.

“어딘가 꺼림직하고 불길한 소리를 내”는 인간의 사랑스러운 반려, 공포는 김행숙의 문장 곳곳에 들어앉아 “프랑켄슈타인의 독생자”를 기다리며 “사랑하는 친구들을 오싹하게 할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잠도 잊”은 “밤의 전기수”(「메리를 위하여」)처럼 우리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다. 유령과 세이렌과 옛이야기 주인공들이 밤새 들려주는 환담에 귀를 기울이고 몰입하다 보면 문득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누구의 집인지 알고」) 될 것이다. “공포, 사랑, 용기. 이 세 개의 단어”는 이 절박한 침범과 엄습을 통해 서로 무성하게 뒤엉키며 “초록빛 넝쿨”(뒤표지 글)처럼 당신의 심장을 휘감는다.

“여름을 좋아했던 이유로 여름의 여름의 여름에 살의를 느껴”
잠들 수 없는 침대 위로 드리우는 폭서(暴暑)의 그림자

올여름은 모든 게 다 체온과 비슷하게
35도, 36도, 37도쯤에 매달려 있어. 삐죽삐죽한 초록, 초록, 초록의 잎들도 38도쯤.
상갈파출소 사거리의 신호등도 39도쯤.
붉은 신호등처럼 피에 젖은 눈동자도 39.5도쯤.
축 늘어진 아이를 업고 세상은 응급실에서…… 응급실로 뺑뺑이를 돌고 있어.
만져지는 것들이 다 피 같고 피떡 같고…… 제기랄, 나는 내가 더러운 누비옷 같은데 벗겨지지 않아 질질 끌리네.
또 한숨도 못 잤어. 잠을 못 잔 사람들이 잠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아.
햇빛 속을 걸어가는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려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네. 당신이 당신인 줄도 모르겠네.
-「응급실 가는 길」 부분

2026년의 우리에게 계절은 규칙적인 날씨의 순환이나 시간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실존을 위협하는 생사의 마디에 가깝다. 이러한 실감이 가장 두드러지는 때는 단연 여름이다. “모든 게 다 체온과 비슷하게/35도, 36도, 37도쯤에 매달려 있”고 “만져지는 것들이 다 피 같고 피떡 같”은 “올여름은” 이내 체온과 혈액을 가진 어떤 “생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홈그라운드」)하고, “한숨 더 자서 이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잊고자 하지만 이미 뜨거운 피와 살을 얻은 여름은 폭군 같은 열기로 우리를 깨우므로 “잠들지 못해 실패, 실패, 실패”한다. 침실을 벗어난 우리는 이제 “냉장고 앞에 엎드려 생각”한다. 그동안은 “냉장고만 제대로 작동하면 뜨거운 여름의 다음 계절이 더 뜨거운 여름이래도” “그럭저럭 살아”(「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잠을 청할밖에」)갈 수 있었지만, 이듬해의 된더위는 정말이지 유례가 없으리라고. 미구하여 우리는 “그래도 살 만했”던 이번 여름을 추억하며 “햇빛 환란 속에서 천천히 죽어”(「우리가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리라고.

이불 위로는 여전히 “벌침을 쏘듯이 자외선이 쏟아지고”(「양산 빌려드립니다」), 차마 침대로 돌아가지 못한 채 “그늘을 찾아서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은 여름낮 뙤약볕 아래에서 “물끄러미 자기 그림자를 응시”(「응급실 가는 길」)한다. 여름은 “내 그림자를 밟고 내 미래를 또 잘라 가려고 긴 칼을 들고 거기 서 있”(「남겨진 소녀」)을까? 우리는 지금 “은신처를 떠나야 하는 도망자처럼 불안의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일까? “날씨가 메시지”(「3일의 휴가」)라면, 이 계절의 전언은 무엇일까? 그림자가 끄집어낸 “그 질문은 미래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고 있”(「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잠을 청할밖에」)다.
“우리의 후회가 우리의 후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제자리를 지키는 상상만이 가닿을 수 있는 최선의 미래

[……] 요즘 나는 최악을 상상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물웅덩이에 비치지 않는 미래의 얼굴이여, 내가 하는 상상이 나를 학대하는, 이 도착적인 사랑을 도무지 멈출 길이 없구나.

불안을 벽돌처럼 단단하게 굽고
나는 붉은 벽돌을 집어 들고 서 있는 것이다. 물웅덩이에 비친 음침한 세계를 또 부서뜨리려고.
-「물웅덩이에 비치지 않는 세계」 부분

숨 막히는 날씨와 스러져가는 세상을 견디고자 하는 인간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상상력이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인간”(「벼룩의 유령」)이므로 눈앞의 처참을 벗어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이곳과 다른 시공간, “머지않아 지구를 완전히 대체할” 또 다른 “제2의 지구를” 상상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2의 지구를 또 발견”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희망은 지구 밖으로 점점 더 멀어지는 중이다”(「물 좀 주세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지구가 두번째 지구라는 것을”, 즉 여기가 이미 “우리의 마지막 지구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 한다면//두 번을 두 번 살아도/똑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2의 지구에서 “슬픔도 걱정도/죽음도 모두 잊고” “똑같은 실수를 정확히 반복”(「만약 두번째 지구라 해도」)한다면 결국 “오늘 밤 지구에서 한 문명이 지워질 것이”(「피노키오의 행방불명」)고, 시지프스의 바위 같은 ‘제2의 재앙’이 또다시 굴러떨어져 내려올 것이다.

시집 끝머리에 붙은 긴 이야기 「시지프스의 판본들」에서 신화의 여러 후일담 속 각각의 시지프스는 신을 당황시키기도 지쳐 떠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어떤 판본에서도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에 올려두어야 한다’는 과업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시지프스의 팔과 다리를 자유롭게 할 가장 간단한 상상은 바위를 굴릴 필요가 없는 세계에 그를 데려다 놓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에서일지언정 자신의 숙명을 가뿐하게 방기할 수 있는, “신이 그린 궤도를 벗어나 다른 행성에 속하게” 된 두번째 지구의 시지프스가 과연 진정한 해방을 맛볼 수 있을까? 어렵고 괴롭더라도 오직 주어진 설정값 안에서만 상상할 때 “진짜 시지프스의 시간이 시작”되고, “영겁회귀하는 징벌” 같은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찢어서 상처를 열어젖혀야”만 “그 자리에 피가 흐르듯, 다른 시간이 몇 갈래로 갈라져 흐르”며 비로소 앞날이 열린다.

낙관하듯 가정하지 않고 후회하듯 가정하기. “우리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장밋빛 목적을 적실”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성분”의 물이 아니라 “지구 밖으로 쏟아지지 않”는 “바닷물”과 “강물”과 “한 방울 눈물”(「물 좀 주세요」)임을 이해하기. 이 지난한 상상은 꼭 “제자리걸음” 같지만 “생각보다 멀리 걸어”(「걸어도 걸어도」)갈 수 있고, 이것이 최후의 지구에서 우리가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 아이에게/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아이에게/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서울, 2049년 겨울」) 보여줄 수 있는 어렴풋한 희망이다. “어떤 사랑은 함께 망하고 싶은 마음 같은”(「공항 가는 길」) 법이다.

· 시인의 말

오늘은 내가 나무문이 되어 서 있을게.
긴 겨울과 긴 여름과 긴 장마를 겪고
끼익, 끼익, 어딘가 꺼림직하고 불길한 소리를 내는……

2026년 8월
김행숙

· 뒤표지 글(시인의 산문)

공포, 연민, 카타르시스. 이 세 개의 단어를 배분하고 배합하여 비극의 신비한 작용을 설파한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한 문장을 떠올린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안개처럼 스며들어 내벽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감정, 수시로 나를 초과하는 거대한 파도로 일어서서 난폭하게 달려드는 감정이 공포였다. 공포는 나의 허약한 실루엣을 폭풍 속의 촛불처럼 쓸어버리곤 했다. 그런 공포의 감정이 시를 쓸 수 없는 불능의 상태로 나를 내내 짓눌렀으나…… 그래서 스프링처럼 쓰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절박한 사랑의 감정을 솟구치게도 했다. 더 길고 더 가혹한 여름을 상상하고, 더 이상 거주 불가능해진 지구를 상상하고 상상하면, 내 사랑이 절박해졌다. 공포, 사랑, 용기. 이 세 개의 단어가 물리고 엉켜서 여름 담장의 초록빛 넝쿨이 되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갖고 싶었다.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 아이에게
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아이에게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언젠가 당신이
공포와 사랑의 네발로 기어 그곳에 도착하면
거기 가까스로 서서 흰 깃발처럼 나부끼는 아이에게

쓰게 될 편지를
지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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