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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은 남겨두고 울타리 밖을 감각하다
'밟지 마시오' 경고를 넘어 잔디 밭으로 발을 딛는다. 잔디를 지나 잡초가 무성한 길을 걷다 보면 기분 좋은 흙냄새가 주변을 감싼다. 시인은 독자를 일상적인 범위에서 새로운 감각으로 이끈다. 시인에게 나를 맡겨 보자. 뜻밖의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다.
2026.06.23.
우솔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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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눈이 야생을 베끼는 동작 전망들 | 전망들 | 손에 잡히는 | 공간의 속도 | 사물의 속도 | 전망들 나의 꿈이 너의 몸을 스케치업(SketchUp) | 영영 | 녹는 눈 감는 | 전망들 | 전망들 잠을 태우는 불소리 감정과 형상 | 감정과 징후 | 감정의 자연스러운 상태 | 깊은 손 | 깨끗하게 씻은 추상 | 조명하지 않는 빛 | 전망들 | 전망들 모자를 뒤집으면 시작되는 숨과 올 | 새 숨 | 비유와 착각 | 돌보는 숨 | 돌보는 숨 | 가정 동물 | 착각 엎지르기 | 잠과 뼈 | 빈손 없이 사랑이 시간을 다루듯이 함께 떨어지며 열리는 | 전망들 | 전망들 | 손에 잡히지 않는 | 전망들 | 무른 무너지는 | 재료의 기계적 성질 | 부드러운 재료 즉흥 기억 우리의 여기의 이것의 | 겹겹 | 미미한 더미 | 미끄러운 복원 | 문턱에서 기다리기 | 언제나 신선한 프레임 | 물 만지기 | 손의 정면 | 새 문서 소음이 영원의 둘레를 감싼다 전망들 | 기억술 | 물질세계의 디테일 | 검은 돌 안에서 | 아늑해지는 | 두 사람의 새 창 | 가변 테두리의 사랑 발문 추위 길들이기·김예솔비 |
KIM LIYOUN,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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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른 마음으로 모두 다른 창문을 보고 있다 해도
시작되는 시간이 있어 녹은 눈과 서리가 뒤엉킨 땅이 서걱거렸어 쌓인 눈을 본 적은 없지만 다 녹은 다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 지면을 밟으면 튀어 오르는 기억이 없고 목적지에 대한 생각이 없고 궤적이 없는 시간 서로를 간섭하며 선을 그리는 배회가 시간이 부드럽게 우리 주위를 배치하고 있었지 ---「전망들-우연과 리듬」중에서 “소리는 이미지보다 쉽게 현실을 꿈의 면으로 뒤집는다. 그러니 잠에서 깨듯이 장면을 깨뜨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 담벼락을 뛰어넘으며 고양이가 깨진다. 담벼락 너머 감나무 잎사귀 흔들리며 깨진다. 전봇대 옆에 서 있는 사람의 손에 들린 담배 연기 깨진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허공의 어둠을 깨뜨린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손끝에서 넘어가는 책장이 깨진다. 오토바이가 골목 어귀로 사라지며 깨진다. 개와 걷는 저 사람, 개의 독특한 보법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깨진다. 개의 발에 챈 콜라 캔이 굴러가며 깨진다. 나는 계속 걷고 있고 모든 것이 시야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 나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이 모든 것이 깨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연속적으로 장면의 바깥으로 밀려나며 새로운 장면에 삽입된다. 깨지는 소리가 이전과 이후의 장면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나는 안심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세계를 견딜 수 있다. 비자연이 되기 위하여 장면의 모든 것은 깨지는 물질을 가진다. ---「감정의 자연스러운 상태」중에서 모자를 뒤집을 때 시작되는 집이 있다면 모자를 뒤집는 당신이 있다. 모자였다가 손 우물이었다가 집이 될 당신의 부분, 뒤집힌 모자가 되는 당신의 손이. 머리통의 입체를 기억하는 집이. 아주 어리고 연약한 것의 털은 집에서도 푹 젖어 있다. 몸이 속한 곳이 공중인지 지면인지, 집인지 물속인지 구름 안쪽인지 착각하게 하는 젖은 털. 안팎이 뒤집힐 때 내 안쪽이 온통 세계가 되듯이, 떨며 서로를 혼동하는 숨과 물. 우리의 숨과 뒤엉킨 허공. 돌아가려는 움직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있고, 거기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아니 집이라는 이름이 사건을 끌어당기고. 이제 그만 돌아가자, 돌아가는 길에 뒤집히는 모자가, 모자의 반영으로서 떨리는 주변이 집을 이루는 구조가 될 때. 집에 가자, 말하는 사람의 뒤집어진 모자가 당신의 오목한 손을 닮을 때. ---「돌보는 숨」중에서 돌을 손에 쥔 사람은 오는 길에 양을 잡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과정이 완벽하다면 끔찍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고 다뤄지는 재료보다 재료의 물성보다 물성에 깃든 생명보다 생명에 서린 생활 생명에 밴 공간 생명에 깃든 시간 같은 것보다 다루는 손길 자체에만 그것의 정교함에만 눈길이 가기 때문이라고 정교하게 줄을 맞춰 선 들개들 앞에서 말했지 그런 정교함은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 ---「검은 돌 안에서」중에서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니다. 선은 시간 바깥에서 움직이며 자신의 경계를 수정한다. 사랑의 부스럭거림이 공간을 채운다. 당신은 손안의 시간을 만지작대며 이곳을 빠져나간다. 유동하며 지속되는 영원을 본다. 사랑 안에서 언제나 부스럭대는 움직임을 본다. 선은 둘이 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힘든 조건을 그린다. 다시, 당신은 언제나 사방으로 열려 있는 선을 본다. 선은 부드럽게 사랑의 표면을 흘러 다니며 테두리를 헝클어뜨린다. 사랑과 함께 미래의 사랑을 향한다. ---「가변 테두리의 사랑」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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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알아버린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개를 잃어버린 영원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일단 개라고 불러봐. 새 수첩의 첫 페이지에 적은 문장이다. 어디서 본 것인지, 꿈에서 들은 말인지, 누군가 일러줬던 이야기인지, 일러준 이가 있었다면 그이는 심리 상담사였는지, 꿈속의 마녀였는지, 스님이었는지, 점쟁이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일종의 주술이나 부적 같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개라고 불러봐. 개라고 부르면 눈 쌓인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듯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으로만 두려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은 어떤 공포와도 다른 방식으로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망들-한 마리 하나 한 개」 부분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상 망각의 동물”에 가깝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필수적이고도 능동적인 본능인 것이다. 반면 베르그송은 ‘기억’이야말로 하나의 생명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미래를 창조해나가는 원동력, 즉 생명과도 가깝다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다름 아닌 기억을 통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고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기억하고 행복을 좇아 망각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기억은 무엇일까. 김리윤은 인간이 기억하고자 하는 대상이 사랑하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순간의 감정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상대를 끊임없이 호명하는 것이다. 이렇듯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영원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언가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일 것이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마저 잃어가는 개를, “영원을 알아버린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걷는 법을 잃어버리며 걷는/기억이 몸의 내용인 것처럼 점차 작아지는”(「감정과 징후」) 개를 다시 불러본다. ‘쿵’이라 불리는 개는 “마치 기억으로 빚은 개인 것처럼, 기억이 살점을 덧붙이는 물질처럼, 기억이 이루는 부피처럼 작아지고 있”고 시의 화자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려도, 슬픔이라는 단어를 갖지 못해도 슬픔을 알게 되고야 말듯이”(「감정과 형상」) 끊임없는 감정의 이동을 경험한다. 시집에서 ‘개’는 정서적 교감의 대상이 아닌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는 세계의 구조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형상에 가깝다. 자기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개, 목줄이 헐거워질 정도로 작아지는 개, 반복되는 부름을 듣지 못하는 개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불능 속에서 서로를 소유하는 게 아닌 돌봄으로써 나아갈 수 있는 미래를, 눈앞의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닌 끊임없이 주어지는 상황을 재설정함으로써 ‘개’는 하나의 상징이 아닌 사건으로 작용한다. 부름이 실패한 후에도 몇 번이고 다시 ‘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까닭은 지금 눈앞의 물질이 한순간에 사라져 영영 볼 수 없을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혼돈 속에 놓여 있을지라도 바라보고, 부르고, 돌보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 예기치 못한 망각에 휩싸이더라도 자신을 붙들고 있는 기억들을 헤집어 다시 한번 불러보겠단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그것은 사라짐을 향해 움직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자연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향해 움직인다. 더욱 움직인다”(「감정의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시구는 인간의 운명이 소멸이라면 이를 향해 손을 뻗고 움직이는 것은 사랑의 실천임을 보여준다. “기억은 표면을 사랑하기 때문에 얼굴은 추상이 되지 못한다” 추상은 꿈꿀 공간을 준다지만 너는 구체적인 창문을 필요로 했다 꿈꿀 공간 말고 손에 잡히는 눈에 보이는 설명할 필요 없이 보여주면 그만인 그런 것 그런 창문을 원했다 시간을 잘게 부수어 눈을 위해 사용하기를 -「깨끗하게 씻은 추상」 부분 “잠에서 깨듯이 장면을 깨뜨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감정의 자연스러운 상태」). 김리윤의 「전망들」 연작은 단어의 뜻 그대로 펼 전(展)과 바랄 망(望),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이를 염원하는 마음이 맞닿는다는 점에서 이는 눈앞에 놓인 현실인 동시에 아직 가닿지 않은 미래를 의미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풍경은 물리적인 조건에 기반한 보기의 양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각과 감정, 언어와 형상, 인식과 이미지가 뒤얽혀 발생하는 하나의 관계적 형식이며, 불확실성과의 공존을 감각하고 감당하려는 실천에 가깝다. 전망은 눈앞에 실제로 놓인 장면이면서 동시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감각의 방향을 포함한다”(시인이 쓴 시집 소개 글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풍경을 그림으로써 현실의 이면을 포착하는 김리윤의 시는 영원히 불가해한 사건으로 남을 사랑의 본질은 기다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의 가변적인 속성에 관해 속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이번 시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의 마지막 구절, “사랑과 함께 미래의 사랑을 향한다”(「가변 테두리의 사랑」)라는 다짐이 지금의 시대에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허물어지는 세계를 해명하기보단 살아 움직이는 물질을 곁에 두고 바라보는 일. 시인에게 시는 세계를 만지고, 말하고, 변형되어 영영 길들일 수 없는 야생의 자연을 자신의 눈 안쪽에 남겨두는 일이다. 시인의 ‘보기’는 결코 깨끗하고 무결한 원시적인 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시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보기와 믿기가 불확실하게 뒤섞여 있는 지대에서 본다. 이때 시인의 제안은 보기와 상상을 대척점에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 상상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다. [······] 적나라한 것, 과도한 가시성으로 스스로 취약함을 갖는 것. 그런 모양새로 세계에 투신하는 일이다. 세계가 희망을 녹여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 텅 빈 상태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지 의식함으로써 거꾸로 희망을 더듬어 보는 일이다.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추상이다. 세계의 지저분한 이미지들을 날려버리는 표백으로서의 추상이 아니라, 사유를 위한 보기 방식으로서의 추상이다. -김예솔비 발문, 「추위 길들이기」에서 시인의 말 우리가 보는 것들에게도 우리의 눈이 돌이킬 수 없는 마주침일까? 2026년 6월 김리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