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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문화정책은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가 Ⅰ. 문화정책은 문화를 비워두고 작동한다 - 개념의 판정 거부 : 향유는 어떻게 실패하지 않는가 1. 문화향유에서 문화는 왜 비어있는가 2. 문화를 비워도 향유는 작동하는가 3. 무엇이 말하지 않고 움직이는가 Ⅱ. 문화정책은 경험을 구분하지 않는다 - 정당성의 판정 거부 : 경험은 어떻게 면책이 되는가 1. 경험은 왜 언제나 부족한가 2. 경험의 공급은 자생을 약속하는가 3. 경험은 무엇에 관한 면책 장치인가 Ⅲ. 문화정책은 능력을 발명한다 - 구조의 판정 거부 : 능력은 어떻게 역량이 되는가 1. 능력은 길러질 수 있는가 2. 역량은 왜 확인되지 않는가 3. 역량 있는 시민은 누구인가 Ⅳ. 문화정책은 예술을 보호하지 않는다 - 권력의 판정 거부 : 예술은 어떻게 중립화되는가 1. 예술적 순수함은 왜 보호되는가 2. 예술은 어떻게 중립적 자원이 되는가 3. 판정 없이 유지되는 ‘진짜 같음’은 무엇인가 Ⅴ. 문화정책의 가치는 증명되지 않아도 존속한다 - 가치의 판정 거부 : 성과는 어떻게 남는가 1. 성과는 왜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가 2. 계산된 성과는 어떤 이미지로 남는가 3. 이미지 이후의 성과는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가 문화정책은 어떻게 판정하지 않는 권력이 되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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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이 문화정책 안으로 편입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이 예술적으로 순수해서도, 전통문화이기 때문도, 민족 정체성을 대표해서도 아니다. 앞서서 경험 수요를 조직했고, 차이를 생산했으며, 세계 시장에서 검증된 경험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 '춤을 춘다'는 행위를 정책은 참여 지표로 읽고, 시장은 소비로 환원될 경험으로 계산하며, 담론은 자기 서사의 실천으로 명명한다. 그러나 번역 이전에 존재한 것은 해석되지 않는 몸의 움직임이다. 무엇이 예술인지, 누가 예술인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떤 작품과 사람은 반복적으로 예술로 호명된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