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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_006
프롤로그_012 제1장 척박한 마을의 늦둥이 1946~1974년 봉하마을의 돌콩_023 우월감과 자부심 사이에 선 소년_046 농협 직원을 꿈꾸다_055 하얀 눈과 군대 생활_060 사법시험 사이에 핀 사랑_064 제2장 변호사 노무현, 세상에 맞서다 1975~1987년 유일한 고졸 합격자_073 짧았던 판사 생활_077 꿈꾸던 삶이 시작되다_079 부림 사건의 파고 속으로_085 뜨거운 6월_100 제3장 분노에서 설득으로, 9년의 시간 1988~1996년 나를 역사 발전의 도구로 써라_113 청문회 스타의 탄생_121 현대중공업 발언 파문_135 여의도의 이방인_137 분열된 야당의 한가운데서_143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 해야 합니다"_146 작은 민주당 창당 일지_148 최초의 낙선_157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다_164 다시 부산, 다시 패배_171 분당과 세 번째 낙선_178 제4장 질 때마다 더 큰 정치인이 되다 1997~2001년 김대중의 손을 잡다_183 서울로, 다시 시험대로_193 현대자동차 파업을 중재하다_197 1원에라도 팝시다_206 대우자동차 모델이 되다_211 또다시 부산으로_216 해양수산부장관과 지식보트_224 제5장 노무현의 시대 2002년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_237 금강캠프, 비주류의 도전_244 대통령 후보가 되다_272 YS와의 만남과 흔들리는 지지율_281 후보 교체 요구에 맞서다_286 두 번 생각하면 그가 보인다_299 행정수도 이전 공약_306 마지막 드라마_312 제6장 가장 원대한 꿈, 가장 혹독한 싸움 2003~2007년 권력의 무게를 넘겨받다_323 정부 출범과 동시에 시작된 시험_340 북핵이라는 기나긴 터널_360 파병, 고통스러운 결단의 순간_397 대한민국을 세계 무대로_414 경제과 국토를 재설계하다_442 사회적 갈등의 격랑 속에서_489 오래된 권력과의 정면 승부_527 국민에게 신뢰를 묻다_596 청와대의 마지막 날들_645 제7장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2008~2009년 다시, 자유인_659 기록물 반환 문제_674 글을 쓰기 시작하다_681 오지 않는 봄_686 검찰 앞에 서다_697 제8장 노무현이라는 사람 실용과 원칙 사이에서_705 사람과 일하는 법_718 반기문을 유엔으로 보내다_728 "인사청문회를 확대합시다"_730 가까운 듯 먼, 측근과의 거리_737 미래를 먼저 살다_750 대화와 설득, 그리고 토론_757 시스템 마니아_761 노무현의 작은 피난처들_767 금기를 넘는 호기심_776 미안한 가족, 고마운 가족_780 제9장 말과 글, 그 남다른 세계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다_791 거침없이, 그러나 계산된_796 적대적 언론을 상대하다_803 설득을 위한 연구_812 김대중파와 리영희파_816 특유의 비유와 유머_820 에필로그 _ 노무현과 함께한 시간들_837 참고 자료_891 주_893 노무현의 길_911 |
尹太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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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과 무기력함의 소산이었던 이 책을 이제 두려움으로 세상 밖에 내보낸다. “나를 본 대로 들은 대로 써라”고 이야기했던 노무현의 숙제를 부족하지만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이 책이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전환기에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한 정치인의 이름에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역정의 마디마디는 굴곡졌지만 지향은 언제나 곧았고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역사의 큰 흐름은 놓지 않았던 어느 정치인의 영혼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도 있다.
--- p.15 주임 선생이 언급한 ‘우월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단 그 뜻만 보면 콤플렉스, 즉 열등감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절 노무현을 지배한 정서는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이었다. 그런데 이유야 어쨌든 ‘우월감이 대단히 강하다’고 느낄 정도면 적어도 노무현에게는 열등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또 다른 정서가 분명히 존재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점이 정치인 노무현, 나아가 대통령 노무현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싶다. 물론 주임 선생의 ‘우월감’이라는 표현에는 사고를 친 학생에 대한 편견이 반영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이 ‘우월감’의 더욱 정확한 표현은 바로 ‘자부심’이다. 어린 노무현은 분명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공부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큰형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와 지식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다. 또 모든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환경의 산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정들이 어우러져 노무현은 남들의 눈에 ‘우쭐한 모습’으로 비칠 만큼 ‘우월감’의 소유자가 되었을 것이다. --- pp.48-49 ‘저 친구들이 내 아들이었다면, 나는 뭐라고 했을까?’ 당시 노무현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갈등과 번민의 핵심이었다. 그때 노무현에게는 초등학교 5학년 된 아들이 있었다. 손을 꼽아 계산해 보았다. 정확히 8년이었다. 8년이 지나면 아들이 대학교에 들어갈 터였다. 그때까지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아들도 이 청년들, 아니 자신이 지금 부닥친 상황을 마주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다지 머지않은 장래의 일이었다. 그때 아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런 선택을 앞둔 아들에게 자신은 무엇을 조언할 것인가? 깊은 고민과 성찰이었다. 자신처럼 유신헌법을 달달 외워가며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옳은 길인가? 아니면 양심 있는 젊은이가 되어 불의와 부정에 과감하게 저항하는 것이 옳은 길인가? --- p.95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 해야 합니다.” 한 장의 흑백사진이 있다. 이를 앙다문 초선 의원 노무현이 발언권을 달라며 힘차게 손을 든 모습이다. 1990년 1월 30일. 민주자유당으로의 합당을 가결하는 통일민주당 임시전당대회의 한 장면이다. 이 사진 한 장은 노무현 정치의 알파와 오메가를 말해 준다. 거기에는 원칙이 있었고 상식이 있었다. 반민주적인 폭거에 끝까지 반대하겠다는 각오와 다짐이 있었다. 호남을 고립시키는 지역구도 정치와 당당히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가 있었다. 이것이 그날 이후 노무현의 정치를 규정하는 키워드들이다. --- pp.147-148 당시 노무현의 결단을 놓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라고 칭찬 일색이다. ‘무모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모두 적절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인 노무현은 결코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무렵 실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부산의 어느 지역에서도 노무현은 한나라당 의원과 엇비슷한 지지율을 기록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도전해서 승리할 만한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 p.219 어디를 가나 미안함이 앞섰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노무현의 눈에는 노란 풍선의 물결이 먼저 들어왔다. 귀로는 ‘국민통합’ 함성과 함께 ‘짜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한여름 내리쬐는 땡볕 아래서 노무현을 맞았다. 한겨울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노무현을 만나러 왔다. 때로는 아이들의 손목을 이끌고 행사장에 나타났다. 누가 오라고 한 적도 없었다. 누가 차비를 보태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노무현이 좋아서, 기꺼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래서 노무현은 항상 미안해했다. 그들을 위해 해준 것도 없는데…… 사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자신도 없는데……. 행사를 치를 때면 정치인들은 으레 사람이 적게 올까 봐 걱정부터 앞선다. 노무현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사람이 많이 올 것을 우려했다. 예상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행사장은 늘 비좁았고 자리는 부족했다. 그들은 중간에 자리를 뜨는 일도 없었다. 행사가 끝나면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해놓고 나서야 돌아갔다. 열정은 뜨거웠고 매너는 쿨했다. 그들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었다. --- pp.237-238 이 장면이야말로 노무현의 캐릭터를 말해 주는 한 컷이다. 노무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였다. 그 이면에는 뜻밖의 낙관이 있었고, 태평함까지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2002년 대통령선거의 모든 과정을 관통하면서 노무현을 승리로 이끈 견인차였다. 그것은 굳은 결의와 낙관, 그리고 원칙과 소신이었다. 이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미 후단협 파동 때 노무현은 낙마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패배하여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단일화 파기 과정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해 결국 표심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 p.315 노무현은 먼저 그동안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음을 토로했다. “우리의 판단은 ‘공은 북한으로 갔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제와 예측이 깨진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제 압력은 북으로 가야 합니다”라며 한국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상황을 ‘벌교 기찻길’에 비유했다. 끝까지 버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판이 깨지면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 예측하게 해줘야 합니다. 벌교 기찻길에서 누가 버티느냐의 문제입니다. 한국 정부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노무현은 심중의 우려를 그대로 드러냈다. “당신들이 핵무기를 가져도 남북관계는 그대로 간다고 할 것인가? 국민들 앞에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나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노무현은 자칫 침묵이 핵 보유를 용인하는 신호로 비칠 수 있음을 경계했다.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핵무기는 당신들의 안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큰 위협은 미국이 아니라 경제다. 이제 더 이상 길은 내지 않는다. 사실상 중단이라고 이야기해야…….” 노무현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배신감이 호흡을 거칠게 했다. 배신감은 결국 스스로를 자책하는 표현으로 바뀌어 좌중에 흩어졌다. “LA 발언, 결국 바보가 되었습니다.” --- pp.371-372 결정문에 ‘관습헌법’이라는 전대미문의 논리가 등장하자 파란이 일었다. ‘관습헌법’은 한동안 텔레비전 시사 토론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했다. 이날 오후 노무현은 집무실에서 차별시정기구 효율화 방안 관련 회의를 마친 후 문재인 민정수석에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문재인 민정수석이 재판관들의 “머리가 참 좋다”고 답하자 노무현은 “나도 처음 든 생각이 ‘머리 참 좋구나’였어요”라고 동감을 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 결정을 “헌재에 의한 쿠데타”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할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노무현은 예정에 없었던 조찬을 김우식 비서실장, 그리고 정무관계 수석들과 함께했다. 노무현은 “일을 크게 그르쳤다”며 낭패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행정도시 건설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번 판결에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자조 섞인 농담도 이어졌다. “국가보안법을 잘못 건드려 수호 신령들을 노하게 한 것이 실수였다. 중대한 국사가 걸려 있는데, 수호 신령들을 놀라게 해서 벼락을 맞았다.” --- pp.451-452 노무현은 왜 그렇게 혼자만의 세계에서 대연정을 고심하고 준비했던 것일까? 워낙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의 캐릭터로 미루어 보아도, 또 지나온 정치 역정으로 보아도 이는 노무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중차대하고 엄중한 일이라 해도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감추는 법이 없었다. 시시각각 있는 그대로의 속내와 의중을 투명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참모와 공유해 온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대연정 주제만큼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절차를 따르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결론을 내리다시피 했던 것일까? 그때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짚어볼 수가 없었다. 대연정 제안 자체가 몰고 온 파장이 워낙 큰 데다 그 과정에서 혼자 고심했던 이유를 분석하는 일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대연정 제안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는 상처와 타격이 너무 컸기에 더더욱 그것을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되짚어보면, 대연정 제안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그렇게 혼자 몰두하고 집착하면서 구상했던 시간이었던 듯싶다. 그때 노무현은 왜 그렇게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것일까. --- p.558 11월 24일 참모들과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책임 있는 권력이 책임 없는 권력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책임 있는 권력은 갈수록 미약해지고 책임 없는 권력은 갈수록 강성이 되고 있다.” 임기 단축 의사에 대해 참모들이 강력한 반기를 들었다. 이호철 국정상황실장은 “역사의 패배가 되기 때문에 참모들은 더 이상 한국에서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이병완 실장은 “우리에게 몇 개월이라도 더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이 무렵 노무현은 이런 이야기를 종종 했다. “연정이든, 동거정부든 한번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 피곤한 정치, 이렇게 대결적인 정치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 p.626 3월 말, 노무현은 오랜만에 외출했다. 봉하의 참모들이 사저 옆산에 있는 장군차 나무를 타운하우스촌(강금원 기념 봉하연수원) 뒤편의 산으로 옮겨 심는 날이었다. 5년 전 탄핵소추 기간에 관저에 갇혀 있을 때도 대통령 내외가 외부 언론에 노출된 것은 식목일 행사였다. 그때만 해도 노무현은 간접적인 표현으로나마 유폐된 사람의 답답함을 표현할 수 있었다. 2009년 봄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노무현은 장군차 나무를 옮겨 심은 타운하우스 뒤편으로 찾아와 일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대화를 나눈 뒤, 서둘러 사저로 돌아갔다. 봄을 느낄 자유가 노무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그럴 자유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일상적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본격적으로 절절한 힘겨움과 외로움이 묻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든다. 힘이 드니까. 벌려놓고 마음이 붙들려 있으니까. 진도는 나가지 않고…….” --- p.688 의도한 설화도 있지만, 의도하지 않은 설화는 재임 중 훨씬 더 많았다. 많은 설화가 말해 주듯, 노무현은 재임 시절 가장 많은 말을 남긴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말이 많은 대통령, 그 의미는 상당히 크다. 노무현은 왜 말이 많았던 것일까?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으로서 그 본분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처럼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권력기관에 눈치를 주는 등 법 위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이 가진 유일한 권력은 인사권뿐이었다. 그밖에 대통령으로서 풀어 나가야 할 모든 사안을 실행하는 수단은 오로지 ‘말과 글’뿐이었다. 말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것의 방증이다. 설화라는 부작용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 힘으로 통치하는 대통령보다는 백번 훌륭한 것이 아닐까. --- pp.811-812 1988년, 나는 만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었다. 그해 8월, 나는 의원회관에 별정직 4급 보좌관으로 취직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 2년 반 만에 비로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해 가을 정기국회에서는 18년 만에 국정감사가 진행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결과가 국회의 일상을 구석구석 바꿔 놓았다. 5공비리와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에 온 국민의 이목이 쏠렸다. 계절이 다시 가을에서 겨울로 바뀔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국회의원 노무현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만났다기보다는 우연히 인사를 나눈 정도였다. 만남의 장소는 그의 의원회관 사무실이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의원은 만 마흔둘의 나이였다. 그때로부터 20여 년 동안 이어진, 이승에서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p.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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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기억 속에 분절되어 있던 ‘노무현의 삶과 말’을
생애 전체의 흐름으로, 시대 속 한 인간으로 탄생시키다 노무현만큼 사람들이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하는 정치인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불의에 항거하는 부림사건의 변호인, 누군가에겐 5공비리 청문회장에서 예리한 질문과 감동적인 호소를 던진 국회의원, 또 누군가에겐 지역주의의 벽에 끝없이 도전한 ‘바보 노무현’이며,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결단으로 희망과 실망을 끝없이 선사해 준 대통령이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400여 권의 책과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노무현은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우리는 강렬한 장면으로 그를 기억할 뿐, 장면들이 모여 어떻게 그의 삶으로 이어졌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저자는 그렇게 각자의 기억 속에 분절되어 있던 노무현을 다시 하나의 생애로 연결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그가 했던 말과 결단을 한순간의 돌출된 행동으로 해석하는 대신,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 당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이유와 맥락을 추적하는 것이다. 한 인간을 역사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설명하려면 밖에서 보는 객관적 시선과 안에서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동시에 필요하다. 저자는 공식 기록 속 노무현의 행적을 시대적 배경 안으로 배치시킨다. 거기에 노무현이 했던 말과 글의 제자리를 찾아줌으로써 재임 중 언론이 전하지 않았던 진심을, 국민이 이해하지 못했던 결단을 비로소 온전한 맥락 속에서 드러낸다. 이 과정에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모색한 대한민국 진보의 미래에 대한 구상부터, 자신의 성공과 좌절에 대한 회고까지 겹쳐 넣어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삶 전체를 어떻게 관통했는지 보여준다. 맥락을 되찾은 노무현의 말과 결단은 더 이상 ‘돈키호테식 발상’도, ‘뜬금없는 승부수’도, ‘정치적 도박’도 아니다. 재임 중 지지층의 이탈을 불러온 이라크 파병과 대연정 제안, 한미FTA 추진 역시 당장의 정치적 유불리를 넘어 대한민국의 지정학적·정치적·경제적 미래를 내다본 선택, 시대적 소명임이 드러난다. 임기 초 국민에게 재신임을 제안했을 때 “나도 살고 싶죠. 그러나 이것을 기회로 한국 정치를 개혁할 수 있으면 거기에 의의가 있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노무현. 한미FTA 추진으로 고립무원 상태가 될 거라는 참모들의 충고에 “어쩌겠나? 불리해도 할 일은 해야지”라고 답변하는 노무현. 국민에게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임기를 단축하면서, 즉 내 살을 깎아서라도 국가의 중요한 제도의 변경을 성사시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역설하는 노무현. 정치인 시절 “나를 역사 발전의 도구로 써라”고 참모들에게 당부했던 것처럼, 그에게 정치란 자신의 승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일이었다. 노무현은 어떻게 노무현이 되었을까? 우월감과 자신감 사이에 선 소년이, 시대를 바꾼 인물이 되기까지 2008년 5월의 어느 봄날, 노무현은 자신의 모교인 대창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다. 연설의 첫마디는 “내가 7번 선거를 해서 4번을 졌거든요. 그런데 대통령도 했어요”였다.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하고 쉬운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돼 있지만, 이 한 문장에 노무현의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도전하고, 수없이 실패한 사람. 때로는 흔들리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서 시대와 부딪혔던 사람. 평전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완성된 노무현도, 좋은 장면만으로 다시 빚어낸 노무현도 아니다. 저자는 대통령 재임 시절 그가 당부했던 것처럼 “본 대로 들은 대로” 담백하게 한 인간의 좌절과 도전을 기록한다. 1963년 농협 입사를 목표로 부산상고에 입학한 노무현은 호기롭게 입사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1966년 고졸 출신으로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것은 무려 9년 뒤인 1975년이었다. 변호사로 개업한 뒤 편안한 현실에 젖어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치부했다. 1988년 부산 동구 국회의원 첫 도전에 곧바로 당선되었으나 1년 뒤 의원 사퇴서를 던졌다. 그로부터 10년 뒤,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고 6개월 만에 사퇴한다. 2000년 그는 지역구도 정치 타파를 외치며 제16대 국회의원선거 부산 북구·강서구 을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청소년 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그의 삶에는 성공만큼이나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실패의 기록이야말로 노무현의 삶을 우리 가까이로 데려온다. 2001년 제16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며 발표한 책 『노무현이 만난 링컨』에서 노무현은 “위인의 약점은 범인의 위안이다”라고 썼다. 석가모니가 설법 도중에 제자에게 허리가 아파서 눕고 싶다고 한 대목과 결혼식을 앞두고 노심초사했던 청년 링컨의 모습을 보며 그는 “보통 사람들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도 끝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은 것이다. 어쩌면 이 평전을 읽는 우리가 노무현의 삶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도 같은 가능성일 것이다. 노무현이 석가모니와 링컨의 약점에서 위안을 얻었듯, 우리는 수없이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선 노무현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 앞에 놓인 금기와 불가능에 다시 도전할 용기를 얻는다. 한 사람의 기억을 넘어, 한 시대의 기록으로 10년의 집필, 600개의 포켓수첩, 1000개의 파일 그리고 저자의 기억으로 복원한 노무현의 시대 역사는 대개 모든 일이 끝난 뒤 기록된다. 또 평전이란 한 인물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다. 그러나 노무현이 사회의 기존 관행에 끊임없이 도전했듯, 이 책 역시 평전의 익숙한 문법에서 조금 비껴 서 있다. 이는 윤태영이란 저자와 노무현의 관계에서 오는 특수성 때문이다. 저자는 1988년 노무현과 조우해 1994년에는 그의 첫 번째 자서전을 만들었고, 2001년부터 그가 서거하기 며칠 전까지 노무현의 말과 글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혔듯 “지근거리에 있던 사람이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며 서술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바로 이 점이 독자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준다. 지나간 삶을 멀찍이 떨어져 해석하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 삶이 펼쳐지던 순간의 한가운데로 데려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 독자는 1988년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의욕 넘치는 노무현이 보좌관들과 동지적 관계로 일하는 공간에 서 있다. 첫 번째 자서전인 『여보, 나 좀 도와줘』를 집필할 당시 한 호텔 방에 앉아, 자신의 치부도 거침없이 말하는 노무현을 본다. 청와대 회의실에서 국무위원들에게 “비상을 걸려고 국무회의를 소집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노무현을, 봉하마을에서 검찰 수사가 계속되고 있을 때 “내가 인간적으로 사람이 좀 모자라는 것일까”라고 절절한 힘겨움과 외로움을 토로하는 노무현을 바라본다. 공식 기록에서는 소거된 그 자리의 분위기, 노무현의 표정과 혼잣말, 주변 사람들의 반응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디테일이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려 했기 때문이다. 재임 중 그는 저자에게 “체력이 허락하는 한 모든 자리에 배석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독대를 막고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한편, 대통령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조치였다. 덕분에 윤태영은 거의 모든 자리에 배석하며 노무현이 보고 듣고 말한 순간들을 600개의 포켓수첩과 1,000개의 파일에 기록할 수 있었다. 그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노무현의 생애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선택이 시대와 부딪히는 순간을 함께 목격한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가 꿈꾸었던 노무현의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가까워졌는가. 여전히 남아 있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무현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남긴 질문 앞에 오늘의 우리를 세우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