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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연디카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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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나를 찾아서
13 바람의 거실
14 발자국
16 곡해
18 그늘
20 백제의 이상향
22 훈훈한 남자
24 삶의 층계
26 빽빽한 파피루스
28 프레임의 재해석
30 길 위에 누가 있었다
32 세 살배기 말
34 궁금하다
36 떡잎
38 오늘 여기,
40 어떤 생
42 나비의 의자
44 운세


2부 흐린 날의 초상
49 소셜 네트워크
50 표상의 꿈
52 거부의 몸짓
54 모자이크
56 한글 찾기
58 전망 좋은 자리
60 만남의 순간
62 신종 무기
64 먹이 활동
66 흐린 날의 초상
68 귀머거리 선승
70 풀꽃
72 일상의 언어
74 방어벽

3부 흰 빨래
79 자루 창
80 여는 페이지
82 동굴의 귀
83 바람의 얼굴
84 오래된 미래
86 공감의 빛
88 전해 듣는 소리
90 흰 빨래
92 꿈 결
94 심장 소리
96 나의 언니
98 너튜브 시대
100 베니스의 용궁
102 두꺼비 집
104 워킹
106 비잔틴의 꽃

4부 신라의 꽃
111 신라의 꽃
112 불국사
113 지혜
114 운현궁의 사랑방
116 좁은 문
118 베란다 텃밭
120 바람의 집
122 산속 마을
124 욕망
126 폐허의 존엄
128 논개 문양
130 하루살이 비상
132 시인
134 압핀
136 논의 무게
137 톤백으로
138 그리스의 꽃
140 늘 날씨 맑음
142 문서 해독
144 아침

146 평론|홀론(Holon)의 존재론과 언어적 자장 _ 김 겸(시인·문학평론가)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168쪽 | 150*220*10mm
ISBN13
9791194987932

책 속으로

[시집 해설]

홀론holon의 존재론과 언어적 자장
―조향옥 디카시집 『걷는 사람』

김 겸(시인·문학평론가)

부분과 전체의 연기적 상상력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는 자연계의 계층적 구조, 즉 원자에서 분자로, 세포에서 생물체로, 생태계에서 지구와 태양계로 이어지는 무한한 유기적 연쇄를 떠올려 보면 부분은 전체 속에 이미 들어차 있고, 전체는 다시 부분의 세밀한 입자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러한 자기 유사성에 기초한 유기체적 사고가 현실의 모든 비선형적이거나 역동적인 현상을 온전히 설명해 내지는 못한다. 이는 불확실성을 표상하는 복잡계의 관점에서도, 다양성과 유연성을 극대화하는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도, 자율적 조직체인 홀라크라시Holacracy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진실은 전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분이 선행하거나 동시적으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태초라는 발생학적 기원 이후의 모든 존재는 사실상 어떤 거대한 것의 일부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지금 여기 내가 써 내려가는 평론의 문장들조차 아무런 의미를 얻지 못한 채 허공에 산란하는 기호의 파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는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에서 ‘홀론hol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연의 모든 사유와 존재가 독자적인 자율적 단위이면서 동시에 더 큰 전체의 일부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그렇다면 부분들의 단순한 기계적 결합에 의해 전체의 미학이 완성되는가. 혹은 전체의 윤곽이 부분의 세부적인 실재를 모두 드러내어 보여주는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적 개념이 바로 ‘유령Ghost’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보자. 시적 문장들이 단지 자모와 음소, 단어와 어절의 단순한 결합만으로 그 미학적 깊이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문법적 규칙과 사진의 시각적 구도를 넘어서는 비물질적인 요소, 즉 번뜩이는 시적 상상력의 유령이 결합할 때 비로소 텍스트는 생명력을 얻는다. 쾨슬러가 말한 유령이 인간 진화 과정에서의 모순과 이원적 갈등을 지칭하듯, 디카시의 언어적 진술 역시 피사체와의 느닷없는 마주침과 의외의 전복을 통해 팽팽한 존재론적 긴장을 형성한다.

조향옥 시인의 디카시 세계는 시적 상상력의 층위에서 이러한 홀론의 존재론에 깊이 부합한다. 이는 한 티끌 속에 우주 전체가 담겨 있고 모든 티끌 또한 그러하다는 『화엄경』의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는 구절과 통하며, 개별 존재가 전체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연기법緣起法의 세계를 소환한다. 사진이라는 찰나의 기표와 문학적 언술이라는 기의가 만나는 디카시의 접점에서, 조향옥 시인은 사물(부분)을 통해 세계(전체)를 읽어내고 세계의 거대한 경륜을 사물의 미세한 결 속에 담아낸다.

신성과 세속, 영원과 유한의 회통

디카시집 『걷는 사람』의 제1부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유산과 역사적 아우라를 거치며 부분과 전체가 어떻게 상호 교감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가장 강렬하면서도 결정적인 사례가 바로 콤 옴보Kom Ombo 신전의 다열주홀을 모티프로 한 디카시 「빽빽한 파피루스」이다.

기둥 속에서 잠시 쉰다
134개의 빽빽한 파피루스 기둥
무너진 천정으로 햇볕이 들어
늪에서 자라는 기둥 한 포기
우리 집 화분에 옮겨 심을까
―「빽빽한 파피루스」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조밀하게 서 있는 거대한 파피루스 돌기둥 사이에 서 있다. 무너진 천장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은 134개의 기둥에 선명한 명암을 새겨 넣는다. 나일강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파피루스 형상의 다열주는 하늘의 신 호루스Horus와 물의 신 소베크Sobek를 함께 모신 신성의 공간이다. 거대한 고대 문명의 유적(전체)을 바라보며 화자는 그것을 “늪에서 자라는 기둥 한 포기”라는 식물적 생명성(부분)으로 반전시킨다. 나아가 이 거대 신전의 기둥을 “우리 집 화분에 옮겨 심을까”라는 일상적 진술로 연결한다. 이는 거대한 우주적 질서Macro cosmos를 일상의 소우주Micro cosmos로 끌어들이는 홀론적 상상력의 본보기이다.

산은 사막
환영 하나 물 위에 떠 있다
방향감각을 잃으면 동쪽으로 해가 진다
―「프레임의 재해석」전문

이 시에서는 나일강을 운항하는 크루즈 선상 창문 너머의 풍경이 포착된다. 사막과 강물이 어우러진 원경 속에, 창문 유리에 반사된 실내의 사물 형상(침대)이 강물 위에 겹쳐 보인다. 사각의 프레임(부분)은 외부의 거대한 자연(전체)을 담아내는 동시에, 내부 사물의 반영이라는 환영을 창출한다. 이러한 시각적 되먹힘feedback은 방향감각의 혼란을 유발하며 “동쪽으로 해가 진다”는 역설적 진술을 낳는다. 이러한 상상력을 통해 시인은 프레임 안과 밖, 부분과 전체가 서로를 투영하며 존재의 스펙트럼을 넓혀간다.

욕망은
다단계의 꼭짓점
삶은 무거운 돌덩이
숨은 층계의 각을 찾아
밑변만 돌고 있다
―「삶의 층계」전문

피라미드를 밑에서 올려다본 앙각Low-angle의 사진을 바탕으로 한 이 시는 세속적 욕망의 구조를 홀론의 관점에서 해체한다. 무수한 거친 돌덩이들은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입체 구조물을 이루는 부분들이다. 시인은 이 개별 돌덩이들을 인간 개개인의 무거운 삶으로 읽어내고, 꼭짓점을 향해 솟아오른 구조를 “욕망은/ 다단계의 꼭짓점”으로 단정한다. 정점을 향해 치달으려 하지만 결국 “밑변만 돌고 있는” 욕망의 서글픈 굴레를 포착함으로써, 거대한 역사적 유적 속에 삶의 비극성을 투사해 낸다.

인공지능은 내세를 해석할까
남겨두자
다 알지 말자
그래도 사랑은 하고 살자
―「궁금하다」전문

세티 1세 무덤의 고대 벽화를 배경으로 한 이 시는 최첨단 기술 문명과 고대 신비의 대비를 다룬다. 영생을 꿈꾸며 벽화에 사후 세계를 정교하게 새겨넣은 고대인들의 내세관을 바라보며, 화자는 “인공지능은 내세를 해석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모든 것이 탈신비화되고 데이터로 환원되는 시대 속에서 오히려 “다 알지 말자”며 미지의 영역, 즉 아날로그적 사랑과 신비의 공간을 남겨둘 것을 제안한다. 유한한 인간의 현세(부분)와 영원한 내세(전체) 사이의 끈을 이성적 계산이 아닌 서정적 사랑으로 묶어두려는 시인의 문명 반성적 태도가 돋보인다.

이처럼 거대한 거시세계의 역사적 아우라를 소우주적인 일상의 언어로 반전시키거나 시각적 프레임의 역설, 세속적 욕망의 구조적 해체, 그리고 문명 반성적 태도를 겹쳐 놓음으로써 사물과 세계, 현세와 내세가 맺고 있는 팽팽한 존재론적 연기 관계가 깊게 규명된다. 이를 통해 시인은 유한한 삶의 굴레 속에서도 영원의 부피를 직시하게 만드는 미학적 구원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문명의 공간과 상징적 기표들

시인의 시선은 이집트의 거대 유적을 지나 지중해 연안, 유럽의 도심 구조물, 그리고 서구적 문명의 상징물들로 확장된다. 제2부의 디카시들은 에펠탑의 철골, 밀로의 비너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가우디의 성당 구조물 속에서 부분과 전체가 빚어내는 문명적 기표를 정교하게 탐구한다.

줄을 잡고 줄이 되어
줄을 따라 줄을 잇는
줄의 끝에서 끝을 찾는 줄
인류문명의 숭고한 줄
―「소셜 네트워크」전문

파리 에펠탑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로우 앵글로 포착한 사진을 바탕으로 한 이 시는 현대 사회의 연결망을 홀론의 시선으로 파악한 작품이다. 에펠탑을 구성하는 교차된 수천 개의 철골(부분)들은 서로를 지탱하며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탑(전체)을 완성한다. 시인은 이를 언어적 언술을 통해 “줄을 잡고 줄이 되어/ 줄을 따라 줄을 잇는” 현대인의 디지털 연대이자 사회적 관계망으로 전환한다. 앙상한 철골 유닛 하나가 인류 문명 전체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표로 올라서는 순간이다.

희고 매끄러운 배
배꼽 젖가슴 목 꽁지머리 입술 콧등
닿으면 차갑게 거부하는
그녀의 팔
―「거부의 몸짓」전문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적 조각상인 밀로의 비너스를 포착한 이 시는 완결성과 결핍의 미학적 대립을 다룬다. 화자는 배꼽·젖가슴·목·입술 등 부위(부분)들을 세밀하게 열거하지만, 정작 작품이 상징하는 것은 “양팔의 부재”라는 완벽한 결핍(전체)이다.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팔이야말로 관람객의 상상력 속에서 차가운 거부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이처럼 이 시는 부분의 부재를 통해 오히려 완벽한 전체로서의 신성과 예술적 존엄을 빚어내는 디카시의 유령을 빼어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고개를 젖히면
아, 하고 입이 벌어지는 글의 보편성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아 외벽
〈세·우·ᅟᅥᆯ·강〉이라 읽는다
―「한글 찾기」전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외벽 음각 문자를 담은 이 시는 언어의 보편성과 문명적 연대를 포착한다. 세계 온갖 언어의 자음과 모음이 조각된 거대한 외벽(전체) 속에서, 시인은 낯선 이국땅의 벽면에 새겨진 한글의 형상(부분)을 찾아내어 “〈세·우·ᅟᅥᆯ·강〉이라 읽는다”고 진술한다. 수많은 문화권의 기호가 모인 공존의 외벽에서 시인이 발견한 한글 한 조각은 한국적 정체성이 세계 문명의 찬란한 맥락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감동적인 발견의 순간이다.

자연은 곡선
씨방 속 위대한 모성
풀꽃 피우는 꽃대의 힘
무당벌레 한 마리 힘을 보탠다
―「풀꽃」전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내부 천장 구성을 포착한 이 시는 가우디의 건축적 기하학과 자연 생명력의 홀론적 통섭을 보여준다. 대성당을 지탱하는 유기적 기둥들과 원형 천장 구조는 마치 거대한 꽃의 내부나 씨방을 연상시킨다. 시인은 건축물의 웅장한 기하학적 곡선을 “씨방 속 위대한 모성”이자 “풀꽃 피우는 꽃대의 힘”으로 환원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지은 가장 거대한 성당 건축물(전체)이 자연의 보잘것없는 풀꽃 한 송이, 무당벌레 한 마리의 생명력(부분)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이와 같이 시인은 현대 문명을 대표하는 건축물과 예술적 기표를 통해 부분과 전체가 형성하는 미학적·사회적 자장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인공의 견고한 형식 속에 잠재된 존재의 파동을 포착해 내는 이 시적 혜안은, 굳어 있던 문명의 풍경에 생기 있는 온기를 불어넣는다.

태고의 시간과 영적 기표들
제3부에 배치된 작품들은 암모나이트로 대표되는 까마득한 태고의 흔적을 비롯하여 셀리메 수도원, 아야 소피아 대성당 등의 역사적 유물과 성물들에 아로새겨진 신비와 영성의 세계로 깊이 걸어 들어간다. 시인은 억압과 시련의 역사를 견뎌낸 풍경의 잔해 속에서 영원의 소리를 청취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가 영적 전체성과 맺는 연기적 관계를 정밀하게 포착해 낸다.

백악기
스파이가 보내온 비밀문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괴이한 정보
―「문서 해독」전문

박물관에 전시된 암모나이트 화석을 포착한 이 시는 까마득한 지질학적 시간을 하나의 정보 텍스트로 읽어내는 독창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백악기라는 아득한 지구 역사의 지평(전체)이 단단한 돌 속에 나선형으로 굳어진 화석(부분)은 거대한 시간의 비밀을 품고 있다. 시인은 이 태고의 화석을 “스파이가 보내온 비밀문서”이자 버려진 “괴이한 정보”로 해석한다. 손가락 끝에서 쉽게 소비되고 휘발되는 현대의 디지털 정보와 달리, 신비로 가득 찬 이 태고의 정보는 자연사가 품은 거대한 시간의 무게와 존재의 깊이를 새삼 일깨워 준다.

셀리메 수도원의 달팽이관
고막을 두드리는 낮은 목소리
제 목소리 듣는 귓속에는
길을 찾는 제 귀가 있었다
―「동굴의 귀」전문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셀리메 수도원의 기암괴석 동굴 통로를 담아낸 이 시는 공간의 형상성과 인간 내면의 청각적 구도를 융합한다. 바위를 파내어 만든 동굴의 좁은 입구와 곡선(부분)은 사람의 귓속 달팽이관을 닮아 있다. 박해를 피해 박토의 동굴 속으로 들어온 고대 기독교인들의 기도 소리는 동굴 벽을 울리고, 시인은 그 소리를 들으며 타자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자기 내면의 귀를 발견한다. 이로써 거대한 암석 공간 전체가 진리를 갈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귀’(전체)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떠도는 이름 밖에 뭉개진 아픔
모른 척 해주기를
어깨 가만히 안아주기를
온통 따뜻하기를
―「공감의 빛」전문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성당의 거대한 돔 천장과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을 담은 이 시는 종교적·역사적 갈등을 치유하는 포용의 서정을 보여준다. 기독교 성당에서 이슬람 모스크로, 다시 박물관과 모스크로 변모해 온 아야 소피아의 거대한 역사(전체)는 수많은 상흔을 품고 있다. 그러나 돔의 틈새로 내리쬐는 따스한 빛 줄기(부분)를 바라보며 시인은 세월에 “뭉개진 아픔”들을 “어깨 가만히 안아주기를” 바라는 공감의 기도로 승화시킨다. 빛이라는 물질적 요소가 영적 구원과 치유의 기표로 화하는 지점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께만 도움을 구합니다
누구나 읽고 싶은 시집이 되게 하옵시고
시집의 길을 잃지 않게 하옵시고
―「여는 페이지」전문

정교한 아랍어 서체와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코란의 첫 장, 알 파티하Al-Fatihah를 담은 이 시는 경전의 신성함(전체)을 시집의 시적 여정(부분)으로 결합한다. 아랍어 구절의 정갈한 문양을 시인은 시집 전체가 지향해야 할 숭고한 시적 기도의 텍스트로 받아들인다. 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경전의 첫 페이지를 시집의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예술적 간구로 전환함으로써, 시 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신성한 기도이자 존재의 길을 찾아가는 거룩한 여정임을 선언한다.

태고의 화석, 종교적 유적지와 역사의 흔적 등에 새겨진 신비와 영성을 탐구하는 시인의 여정은 유한한 인간 존재가 영적 전체성과 맺는 깊은 연대감을 일깨운다. 바로 이 영적 서정은 물질문명의 그늘에 가려진 존재의 깊이를 회복하고 인간 정신의 근원적 안식처를 제시해 준다.

삶의 구체성과 사회적 은유

제4부에 수록된 시편들은 경주와 진주, 운현궁 등 이 땅의 역사적 공간과 농어촌의 노동 현장으로 돌아와 디카시의 홀론적 지평을 삶의 실재 속에 단단히 뿌리내린다. 역사적 공간에서부터 농협의 수매 현장, 해녀의 물질 장면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일상과 역사의 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서정의 빛을 발한다.

난초잎에 강약을 친다
팔 폭 평풍에 자라던 대원군의 난
짙고 옅은 그날이
난초 잎에 번져있다
―「운현궁의 사랑방」전문

운현궁의 전통 문살과 그 앞에 내걸린 난초 그림을 포착한 이 시는 한 개인의 예술과 격동의 역사적 서사를 매개한다. 병풍 속에서 자라난 난초의 강약과 먹의 짙고 옅음(부분)은 당대 권력의 중심이었던 흥선대원군이 겪어야 했던 격랑의 세월(전체)을 담고 있다. 문살을 통해 스며드는 아늑한 햇살 아래 번져 있는 난초 잎의 먹선은, 지난했던 조선 말기의 역사가 한 폭의 정갈한 예술적 사유 속에 스며 있음을 보여준다.

입 닫고 귀를 여는 그녀의 성전
무심결에 쓰는 시
호흡을 멈추고 온몸으로 쓰는 시
그냥, 써지는 시
―「시인」전문

주황색 테왁(제주에서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부력浮力 도구)을 띄우고 거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해녀의 모습을 포착한 이 시는 시적 창작 행위의 고뇌를 제주 해녀의 삶에 비유한 수작이다. 주황색 테왁 하나에 의지한 채 짙푸른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는 해녀의 물질은, 침묵 속에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온몸으로 시를 써 내려가는 시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해녀가 호흡을 멈추고 생사의 경계에서 해산물을 끌어 올리듯, 시인이 발화하는 언어는 척박한 삶의 바다에서 존재의 실재를 건져 올린다.

하나둘 모이는 마을의 하늘
병충해를 이겨낸 하늘
공공비축미가 되어
로컬 디스크에 저장하기
―「톤백으로」전문

지게차가 거대한 톤백Ton-bag을 들어 올려 트럭에 적재하는 현장을 포착한 이 시는 현대 농촌의 풍경을 디지털 기표로 재해석한다. 마을 전체의 들녘을 채웠던 여름의 햇살과 태풍, 병충해를 이겨낸 하늘의 시간(전체)이 이제 커다란 톤백 자루(부분) 속에 압축되어 수매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 거대한 곡식 포대를 “공공비축미가 되어/ 로컬 디스크에 저장하기”라는 디지털 용어로 은유한다. 이를 통해 땀과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시간을 수치화된 데이터로 환원해 버리는 현대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적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고를 쏟아내면
빨려 들어가는 낱알의 기억
물을 빨아올리던 뿌리를 두고 온
기억을 털어낸다
논의 무게는 빈 포대의 무게
―「논의 무게」전문

같은 맥락에서, 진주서부농협 수매 현장에서 트럭에 벼 포대를 적재하는 모습을 담은 이 시는 자본주의적 계량화 이면에 숨겨진 농민의 노고를 포착한다. 한 해 동안 흙을 짓이기며 낱알을 키워낸 땅과 땀방울의 총체(전체)는 정형화된 벼 포대(부분) 속에 담겨 트럭에 올라탄다. 시인은 쌀 포대가 비워지고 무게가 달리는 과정에서, 벼가 빨아올렸던 수분과 땅의 기억, 농부의 노고를 읽어낸다. 이를 바탕으로 “논의 무게는 빈 포대의 무게”라는 마지막 명징한 시구는 생명의 가치가 단순한 수치로 환원될 수 없음을 뼈아프게 환기하고 있다.

이처럼 이 땅의 역사적 공간과 노동의 현장 위에 디카시의 홀론적 지평이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지극히 평범한 삶의 한 장면조차 사회적 승화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인의 예각적 시선은 개인의 서사를 사회와 역사라는 공적 영역에 감응케 하는 강력한 시적 윤리의 자장을 형성한다.

홀론의 상상력을 위하여

조향옥 디카시의 동력은 거대한 세계를 일상의 소우주로, 그리고 심원한 시간을 지금-여기로 소환하는 홀론적 상상력에 있다. 이집트의 아득한 고대 신전에서부터 튀르키예의 셀리메 수도원, 유럽의 고풍스러운 거리와 스페인의 유적지, 그리고 경주의 월정교와 진주의 농협 수매 현장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세계와 자아가 부딪치며 빚어내는 서정적 찰나의 기록이다. 셔터가 포착한 정적 위에 포개어지는 시적 언술은 잊힌 유적의 빈 터와 고단한 삶의 현장에 다시 사유의 혈맥을 흐르게 한다.

이렇듯 차가운 유리의 렌즈와 뜨거운 인간의 숨결이 서로를 물고 물리며 빚어내는 의미의 자장 속에서, 대상은 비로소 오랜 침묵의 껍질을 깨고 존재의 이름을 회복한다. 부분 속에 거대한 전체의 경륜을 들여놓고, 부서진 파편 하나 속에서 우주의 온전한 생명을 회복해 내는 조향옥 시인의 디카시편들은, 현대 사회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시들지 않을 서늘하고도 따스한 감각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해설」중에서

출판사 리뷰

창연출판사가 선보이는 조향옥 디카시집 『걷는 사람』은 한 장의 사진과 짧은 시어를 통해 삶의 깊은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집이다. 시인은 “길을 걷습니다. 살아있어 걷습니다.”라고 말하며 걷기를 단순한 이동이 아닌 자신과 원시적 본질을 찾아가는 성찰의 과정으로 풀어낸다.

『걷는 사람』은 「나를 찾아서」, 「흐린 날의 초상」, 「흰 빨래」, 「신라의 꽃」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의 기억과 내면에서 출발한 시선은 역사와 문명, 자연과 인간,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확장되며 다양한 풍경 속에 깃든 존재의 의미를 담아낸다.

조향옥 시인의 디카시는 눈앞의 장면을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사진 속 사물과 풍경에 새로운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고, 짧은 언어로 그 안에 숨겨진 시간과 감정을 길어 올린다. 「빽빽한 파피루스」에서는 고대 유적의 기둥을 생명의 이미지로 바라보고, 「삶의 층계」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삶의 무게를 사유하며, 「궁금하다」에서는 과학으로도 닿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또한 『걷는 사람』은 거대한 역사와 문명뿐 아니라 가족과 일상의 순간에도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부모의 흔적을 담은 「발자국」, 청춘의 현실을 바라보는 「나비의 의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공감의 빛」 등은 평범한 삶의 장면 속에서 깊은 울림을 전한다.

디카시는 순간의 포착과 시적 사유가 만나는 장르이다. 『걷는 사람』은 사진과 언어가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풍경을 넘어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는 디카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짧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조향옥의 시편들은 독자에게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는 경험을 선사한다.

걷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기억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일이다. 『걷는 사람』은 오늘도 길 위에 선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며 걷고 있는가.” 이 시집은 풍경 속에서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한 권의 사유 여행이 될 것이다.

추천평

조향옥 시인의 디카시 세계는 시적 상상력의 층위에서 이러한 홀론의 존재론에 깊이 부합한다. 이는 한 티끌 속에 우주 전체가 담겨 있고 모든 티끌 또한 그러하다는 『화엄경』의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는 구절과 통하며, 개별 존재가 전체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연기법緣起法의 세계를 소환한다. 사진이라는 찰나의 기표와 문학적 언술이라는 기의가 만나는 디카시의 접점에서, 조향옥 시인은 사물(부분)을 통해 세계(전체)를 읽어내고 세계의 거대한 경륜을 사물의 미세한 결 속에 담아낸다.

조향옥 디카시의 동력은 거대한 세계를 일상의 소우주로, 그리고 심원한 시간을 지금-여기로 소환하는 홀론적 상상력에 있다. 이집트의 아득한 고대 신전에서부터 튀르키예의 셀리메 수도원, 유럽의 고풍스러운 거리와 스페인의 유적지, 그리고 경주의 월정교와 진주의 농협 수매 현장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세계와 자아가 부딪치며 빚어내는 서정적 찰나의 기록이다. 셔터가 포착한 정적 위에 포개어지는 시적 언술은 잊힌 유적의 빈 터와 고단한 삶의 현장에 다시 사유의 혈맥을 흐르게 한다.

이렇듯 차가운 유리의 렌즈와 뜨거운 인간의 숨결이 서로를 물고 물리며 빚어내는 의미의 자장 속에서, 대상은 비로소 오랜 침묵의 껍질을 깨고 존재의 이름을 회복한다. 부분 속에 거대한 전체의 경륜을 들여놓고, 부서진 파편 하나 속에서 우주의 온전한 생명을 회복해 내는 조향옥 시인의 디카시편들은, 현대 사회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시들지 않을 서늘하고도 따스한 감각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겸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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