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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각화를 읽다
황시언
창연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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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연디카시선

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1부

봄날 오후
동행
안부
생이란
단감나무 속 그녀를 읽다
연밥에게 묻는다
안부 2
이런 날에
내 남자의 봄
꽃자리
봄소식
석고대죄
사랑
따라 하기
이런 날에 2
밍겅 읽기
드릴 말 대신 2
믿는다는 것은
코로나19
분단의 상처
유언
봄의 온도


2부

상족암, 암각화를 읽다
고슴도치 사랑
부부란
생이란 2
세월호
봄바다에 가서 보니
네 속의 풍경
보이시나요
기다림
긍정적인 이유
위로
조문
생이란 3
멈춤
멈춤 2
햇빛만의 권리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요
양은냄비 사랑
러브레터
이혼설
이혼설 2
분향


3부

드릴 말 대신
그렁그렁
가을 캘린더
CCTV는 작동 중
납골당에서
진리의 소리
명작 갤러리
100년 전 *허재기 사장님의 안부를 여쭙다
가을 하늘 미용실
꽃밭에서
바다 무덤
해녀상회
달팽이관 소리를 듣다
추수
달님 수줍어요
너와 나
11월 30일
금연
오목렌즈
폭염은 진료 중
말씀을 보다
이유


4부

상강 무렵
하나님의 선물
박물관의 초대장
쉰 살 즈음에
우담바라
도항리 고분의 미학
필사를 하다
울상
노숙자
풍장
풍장 2
생이란 4
시련
생의 고비
그녀의 내부에 드는 법
겨울 아이
도항리 일기
고백
제왕절개 하다
첫눈 오시던 날
손금을 읽다
철학관 언저리에서


시집 해설

세상을 쓰다듬는 시인의 전언(傳言) / 차민기 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경남 함안 출생. 2007년 시전문 문예지 《시선》 여름호 등단. 시집으로 『난 봄이면 입덧을 한다』 『예쁜 예감』이 있으며, 디카시집 『암각화를 읽다』가 있다. 더 함안신문사 문예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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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7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30*210*8mm
ISBN13
9791186871782

출판사 리뷰

병원

살기
읽기
쓰기
짓기

2020년 7월 황시언


세상을 쓰다듬는 시인의 전언(傳言)
차민기(문학평론가)



1. 디카시를 증언하는 시인

디카시(dica-poem)가 세상에 처음 이름을 내보인 뒤로 꼬박 15년이 지났다. 우리나라 100년의 현대문학사를 되짚어 볼 때, 15년 넘게 지속적으로 내, 외연을 키워간 문학 운동이 있었던가 싶다. 그러나 디카시의 외연이 커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디카시는 기존의 문자시에 비해 그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 기존 시인들 중에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디카시를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 안팎으로 디카시의 환경이 넓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문단에서는 여전히 디카시를 동호회 수준이나 공모전 정도의 이벤트 식 콘텐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디카시에 대한 이러한 편견 속에서 수준 높은 작품성으로 디카시의 내실을 다지고 외연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는 몇몇 시인들의 역량은 놀랄 만하다. 그 덕택에, 앞으로 디카시가 하나의 갈래 양식으로 자리잡아 가는 데 희망을 가져볼 만하다. 특히, 이번에 디카시 첫 시집을 펴내는 황시언 시인은 디카시의 출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열성적이고 꾸준한 활동을 해 온 시인이고, 또 수준 높은 작품성으로 디카시의 내실을 다지는 데 누구보다 많은 기여를 한 시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디카시를 찬찬히 살피는 일은 디카시의 역사를 되짚는 일이며, 디카시의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될 것이다.


2. 꽃 진 날의 안부, ‘가족’

황시언의 디카시집 「봄소식」은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22편씩 모두 88편의 작품이 담겼다. 기존의 디카시집들과 달리 지면 하나에 그림과 문자를 함께 담은 점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작품 수다. 그만큼 디카시에 대한 이 시인의 열정이 꾸준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 가운데 시집 전반에 두드러지는 것은 ‘가족’에 대한 눈길이다. 특히, 연로하신 어머니(또는 엄마)에 대한 서정은 시인 개인의 일상을 포착한 것이면서도,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데까지 확장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서정이 1부에 국한되지 않고, 시집 전체에 펼쳐져 있는 것도 ‘어머니’라는 이름이 우리 생의 어느 한때에 국한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시인은 “퇴색된 시멘트 창 너머”로 “아흔셋 어머니께 향기로” “문안 인사를 올리고”(「안부2」), “대중탕 가”시는 “아흔다섯 어머니”(「봄날 오후」)를 뒤따르기도 한다. 때론 “여든아홉 엄마 품”속에 들어 까끌까끌한 결속에서, “햇살 바른 가을 오후”(「이런 날에2」)를 쬐기도 한다. 어머니에 대한 이런 뭉클한 서정은 “나 시집 보내던 날”부터 “그렁그렁” 눈물로 생을 채우신 그 신산한 삶에 대한 위안이자 이해였을 것이다.

울 엄마
나 시집 보내던 날
아마 이러셨을 거다

- 「그렁그렁」

그 위로와 이해는 시인 스스로가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또 누군가의 아내라는 삶의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보면, 그건 자기 위로와 자기 연민으로 읽어도 좋다.
수백 년 우리네 삶 속에서 ‘어머니’, 혹은 ‘엄마’라는 이름은 늘 혀 안에서 아프게만 궁글리는 이름이다. 그만큼 희생하고 또 그만큼 많은 것을 품어야 하는 이름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혀끝에 올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뭉클하고 먹먹하기 짝이 없다.

여덟 살에 하늘나라로 소풍 가신 울 오라버니
아끼던 구슬이다
시린 세상 속에 담긴
울 엄마의 심장 하나

- 「오목렌즈」

투명하고 영롱한 저 궁극의 원형. “엄마”의 한이 얼마나 뭉그러지고 뭉그러졌기에 저리 궁극의 원형으로 투명할 수 있을까. “여덟 살에” 생을 끝낸 “오라버니”의 아득한 과거는, 여든이 되고 아흔이 되어서도 “엄마”에겐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 가슴 한쪽은 현 인류의 모든 어머니들의 가슴 한쪽으로 읽어도 좋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어머니의 표상을 ‘대문자 어머니(보통명사로서의 어머니)’로 표현한 바 있다(바르트는 자신의 어머니를 이러한 보편적 존재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는 ‘희생’과 ‘헌신’, 또는 그로 인한 ‘상처의 삶’으로 상징되는 어머니 상이 한국사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시인 또한 누군가의 어머니로서 궁극의 원형 구슬 하나를 가슴 한쪽에 품고 사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다음 시의 “엄마”는 그대로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치환되어도 무방하다.

머리를 감겨 드렸다
아흔다섯 백모白毛가 시리다
‘깨반타’는 엄마의 입가에서
바스락 바스락
낙엽소리 요란하다

*깨반타 : ‘개운하다’라는 경상도 사투리

- 「가을 하늘 미용실」

“머리를 감겨 드”리는 손끝에 듬성듬성한 두피의 결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까칠한 손끝 위에 “백모白毛가 시리”게 얹혀 온다. 그 시린 생은 다시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청각으로 전환되어 읽는 이의 전신으로 전이된다. 이러한 감각의 전이들은 우리의 감각이 기억하는 “엄마”에 대한 추억이자 엄마의 생 그 자체이다. 여기에 이미지가 주는 시각까지 보태지면서 우리는 비로소 온몸으로 “엄마”의 생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생이 아프게 읽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대상의 부재, 즉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아버지 이장하여
바다에 뿌려지던 날
움푹하게 비워진
가슴

- 「바다 무덤」


「바다 무덤」은 아버지의 이장을 다룬 작품이다.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보편적 ‘이장’ 문화를 생각할 때, 아버지의 죽음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의 경제활동은 주로 남성의 몫이었고, 여성은 양육이나 집안 관리 등의 내적 활동에 치우쳐 왔다. 물론, 농경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이 더해지기는 하나 그건 부수적 활동에 국한된다. 따라서 가장의 부재는 가족 전체의 경제적 위기와 직결된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노동을 담당해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부재는, 가족 전체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로 어머니를 내몰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의 한 끝자락에서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했을 그 신산한 삶의 이력을 어찌 다 가늠할 수 있으랴. 결국 둥글게 내려앉은 어미의 가슴 한쪽은, 끝내 다시 쓰지 못할 폐품마냥 폐기되고 말았다.

엄마 폐질환 진단받고 오던 날
하루에 담배를 두 갑 이상 피우셨다던 아들의 고자질에
담배 개비 꺼내 무는 순간
기호식품 확인하는 우리집 막내 해

- 「금연」

이처럼 시인의 디카시들에 담긴 가족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아프게 읽힌다. 그리고 이 아리는 통증을 통해 우리는 그의 시와 우리의 생이 동근원적(同根員的) 태생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이 이질감 없이 우리 가슴 안으로 스며드는 까닭이다.
아직은 가족공동체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이러한 가족 체험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직, 간접적으로 경험되거나 목격되는 현상들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이 시인만의 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으로 자연스레 치환된다. 가까이는 우리 누이들의 생이고, 멀리는 우리들 어머니, 우리들 할머니들의 생이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던 그 즈음의 여성들도 ‘헌신’과 ‘희생’의 다른 이름들이었을 것이다. 그 숱한 세월 동안, 가치관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그로 인해 무수한 유, 무형의 것들이 바뀌었어도 정작 ‘어머니’, 혹은 ‘엄마’들의 생은 여전히 ‘헌신’과 ‘희생’의 다른 이름들이다. 시인의 시들이 읽히는 자리도 이 즈음일 것이다.


3. 세상의 모든 말들을 전하는 시인

디카시는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풍경들을 시적 대상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관념의 세계에서 서정을 끌어오는 것보다 훨씬 즉각적이고 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디카시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대중적 갈래로 자리잡아 간 것은 이런 구체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즉각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미적 성취도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일찍이 콘라드 피드렐(19세기 독일 출신 미학자)은 감각적 형상과 가시적 형상을 근거로 들어 ‘미’와 ‘예술’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그는 미의 척도를, 형상화된 어떤 것에서 인간이 느끼는 쾌, 불쾌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형식적 예술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콘라드는 모든 고유한 사물은 자기 특유의 예술적 근원을 지니고 있고, 예술가는 그 근원을 가시적인 형태로 탈바꿈시키는 임무를 지닌 존재라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황시언 시인은 콘라드가 규정한 예술가의 임무에 가장 충실한 시인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그의 시안(詩眼)은 일상의 크고 작은 사물들을 가리지 않고 그 안에 감추어진 예술적 근원을 분명하게 포착해 내기 때문이다.

봄날 오후
누가 가두어 놓았을까
나이테가 따로 앉은 두 개의 방
그녀는 날고 있다

- 「단감나무 속 그녀를 읽다」

번듯한 가지를 드리운 나무도 아니고, 무성한 잎과 열매를 거느린 나무도 아니다. 이 볼품없는 그루터기의 형체에서 시인은 미세하게 나뉜 두 개의 나이테를 읽어낸다. 그리고 이 방도, 저 방도 아닌, 두 개의 나이테를 넘어서는 음각의 형상에서 생의 얽매임을 벗어나는 한 여자의 생을 포착해 내고 있다. 이미지가 없었다면, 혹은 이미지만 있었다면, 모호하기 짝이 없을 형체이며 문장이었을 것이다. 구체적 이미지와 관념의 문자가 어우러져 사물을 온전한 은유의 세계로 확장해 간다는 점에서 가히 디카시의 전형을 보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디카시가 일반 문자시와 다른 또 하나의 지점은 획일화된 읽기 방법의 파괴에 있다.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가로읽기 방법을 벗어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파생되는 데서 디카시는 감상의 새로운 재미를 전달해 준다.

가끔은 거꾸로 서서 세상을 보는 일
읽히지 않던 生들이 소복하게 보인다지
비린내 날리며 외줄 타던 5년 간의 사투
시인의 아내가 하늘길 가던 날
산바*만이 못다 한 그녀의 말들을 전하고 있다

*산바 : 제16호 태풍. 백혈병으로 5년의 투병 생활을 마치고 시인의 아내가 하늘나라로 거주지를 옮기던 날이었다.

- 「드릴 말 대신 2」

수만 년에 걸쳐 획득한 인류의 직립 보행 습성은 우리 시선을 늘 한쪽으로만 고착화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시선을 평범함, 또는 보편성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합리화해 왔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그 평범함을 전복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시가 빚어내는 시적 긴장 또한 그러한 시선의 전복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횡으로 엮인 생선의 대열을 이렇게 기울여 놓고 보니 뒷배경에 놓인 상가의 활자들 하나하나가 새로운 이미지로 꿈틀댄다. 생선의 시선을 따라 횡으로 종으로 이미지를 돌려보면 다른 글자로 변하는 것도 있고, 글자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도 있다. 그 아래 생선의 주둥이 아래쪽에 배열된 파라솔들은 이미지를 이리저리 기울임에 따라, 주둥이 끝에서 뿜어지는 무지개가 되기도 하고, 아가미로 뱉어내는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꼬리를 꽉 깨문 빨래집게는 허공으로 날아오른 생선들이 저마다 새로 길러낸 또 하나의 지느러미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시인의 남다른 시선이 의미를 길러내는 작품들은 이 시집 전체에 산재해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은 한 작품, 한 작품을 다채롭게 보아 넘기는 재미가 있다. 일상의 사물들에 덧붙은 시인의 상상은 4~5행의 짧은 문장과 연결되면서 종으로, 횡으로, 수많은 의미들을 길어 올린다. 어떤 시들은 훌쩍, 우리를 들어올려 수억만 년 전의 자리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쥬라기 전설을 새긴 발톱의 흔적들
켜켜이 쌓여
해변의 도서관이 되었다

비 오는 날이면 파도는 책장 청소로 분주하다

*고성 상족암. 제1회 세계공룡디카시 공모전 입상 작품

- *「상족암, 암각화를 읽다」

이 작품은 ‘제1회 세계공룡디카시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이다. 고성은 전국에서 최초로 공룡테마 축제(세계공룡엑스포)를 벌인 곳이기도 하고, 디카시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이다. 이런 점에서 제1회 공룡디카시 공모전이 갖는 의미는 남다른 것이었다. 이 공모전의 기획은 2억만 년 전, 고성 땅에 존재했을 수많은 공룡들의 흔적을 21세기 최첨단 통신기기로 형상화해보자는 것이었다. 아득한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자리에서 되살려, 그로부터 시의 미래지향적인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자 한 의도였다. 세계공룡엑스포를 다녀간 전국의 관람객들이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한 작품이 수백 편에 이르렀고, 그 편수만큼이나 일정 작품의 수준은 기대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작품이 입상 정도에 머물렀던 것만 봐도 그 당시 수상작들의 작품 수준을 가늠해 볼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때 상위권에 입상한 사람들 가운데 디카시를 여전한 시작 활동으로 삼아가는 사람은 두셋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입상자들의 창작 역량이 모자란 까닭고 있겠지만, 그보다 기존 문자시에 비해 디카시에 대해 갖는 일반적 인식이 가볍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위 우리 문단이 강박증처럼 추구해 오는 시의 권위에 디카시가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편협된 인식, 또는 이렇게 고착화된 시선은 결국 시를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수십 년 째 시단은 시의 위기만을 되뇌는 식물인간들의 집단이 되고 만 것이다.
보라! 이 시인이 보여주는 광활하고도 역동적인 경계의 넘나듦을. 이것이 기존의 문자시가 추구하는 미학에 뒤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황시언 시인은 디카시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디카시를 창작해 오고 있고, 그 작품들의 수준 또한 으뜸의 영역에 고르게 편재돼 있다. 이러한 1차 텍스트들의 존재는 앞으로 디카시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큰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글쓴이는 ‘황시언’이라는 이름 석 자가 미래 한국문학사 100년에 분명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4. ‘서사’를 담아내는 방식

1920년대 시들이 과도한 감정노출로 인해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할 때, 임화는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그 서정의 외피 속에 갈무리해 시의 새로운 전형을 일구어내었다. 한국문학사 100년에 뚜렷한 의미점으로 자리잡게 된 ‘단편서사시’의 출현이었다.

이미지로부터 촉발되는 감흥을 위주로 하는 디카시가, 과연 이러한 서사적 면모를 담아낼 수 있을까? 디카시의 초기부터 글쓴이는 이런 물음을 품어 왔지만 본격적인 담론으로까지 확장해 가지 못했다. 디카시론과 관련한 여러 담론들을 논의할 만한 이론가들이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 이론적 토대의 근간이 될 만한 수준 높은 1차 텍스트들이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시언의 디카시들은 앞으로 디카시 담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특히 그의 시들이 보여주는 ‘단편서사시’로서의 실현 가능성은 ‘극서정’을 지향해 온 지금까지의 디카시론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지금까지 디카시론에서 통용되어 온 형식은 이미지를 기준으로, 그에 매달리는 시행을 5행 이내로 제한한다. 시적 대상으로부터 ‘찰나적’이고 ‘즉흥적’으로 전달받는 감흥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디카시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많은 디카시들은 서사적이기보다는 서정적이다. 그런데 이 시인이 보여주는 디카시들 가운데 몇몇 작품은, 디카시가 서사를 지향할 때 미학적 성취가 더 커질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명문대 휴학생 조카의 장례식 다녀오던 날
교통사고, 119, 종합병원 응급실
AM 04:27
그가 주고 간 마지막 문장들

- 「유언」

벽체에 드리운 이 나무 그림자의 형상은 아까운 청춘의 운명을 결정짓는 손금으로 읽어도 좋다. “명문대 휴학생 조카”의 짧은 생이 저 손금의 어디쯤에 기록되어 있을까. 독자들은 저 그림자 형상을 따라 조카의 짧았던 생을 재구성하며 이 4행에 함축된 서사들을 저마다 완성해 갈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현실로 눈을 떼서는 자신의 손금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각자의 지나온 생들과 앞으로 닥쳐올 생들을 그 손금들 위에서 읽어낼 것이다.

아흔일곱 소녀의 간절한 기도문에
하나님 두레박 줄 내려 주시고
소녀는 노안으로 보지 못하시고
햇살만 빛바랜 슬레이트 지붕 가득
소녀의 생애를 적고 있다

- 「멈춤 2」

“슬레이트 지붕” 골골이 “아흔일곱 소녀의 간절한 기도문”이 새겨졌다. 궁벽진 시골 마을에서 호롱불 받쳐 들고 써 내려갔을 “소녀의 간절한 기도문”엔 어떤 것들이 새겨졌을까. 그것은 ‘나’이기도 하고, 또 ‘너’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두레박 줄” 하나를 바라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인이 보여주는 서사시로서의 미적 성취는 이런 개인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의 모순을 포착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이끄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만남의 광장 메타세쿼이아 나무
배 한 척 뒤집어 놓고 시치미 뚝,
그 아래 비둘기들 모여 나와 수중 속 안부를 전하고 있다

- 「세월호」

2014년 4월은 이제 우리에게 ‘부끄러움의 계절’이 돼버렸다. 무책임한 어른들과, 진실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속살을 나라 안팎에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 계절이었다. 시 “세월호”는 그런 부끄러움의 시간을 포착해 낸 작품이다. 잎을 다 떨군 저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다급한 구조요청을 묵살한 그날의 고장난 안테나의 은유로 읽어도 좋다. 신이 내린 홍수의 징벌 때 노아의 방주에서 날려 보냈던 비둘기들은, 멀지 않은 곳에 육지가 있음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저 고장난 듯한 안테나 앞에서 뒤집힌 배를 딛고 앉은 비둘기떼의 형상은 그날 그 바다 어디에도 구원의 손길을 뻗을 곳이 없었음을 아프게 환기시킨다. 앙상한 “나무”, “배” 형상의 천막, “비둘기”라는 세 개의 키워드만으로 봄마다 아프게 기억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움을 시인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시들은 민족공동체적 서사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거시적인 안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선독립 만세”
배둔장 목재소 톱날도 멈춰 선 그날
평상을 지키고 선 밍크 담요 한 장
씻고 말리고 접어두신 어머니 손길같은 시간들
붉다

*1919년 3월 1일 고성군 배둔면 장날을 맞아 독립만세를 외치러 나갔던 허재기 사장님은 귀가하지 못했다.

- 「100년 전 *허재기 사장님의 안부를 여쭙다」

바람은 언제까지
그들의 살점을 도려내어야 하는가
시간이 상처를 만들고 있다

- 「분단의 상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민족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아프게 기록되는 사건들이다. 그 길고도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한 환기는 이 두 편, 합해서 8행의 시행으로도 거뜬하다. 이미지가 주는 선명함과 사물들이 얽히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행간의 의미 때문이리라.

「100년 전, 허재기~」에서는 평상 위에 선명한 붉은 색 담요가, 컴컴한 창고의 배경 위에서 선명하게 부각되어 인물의 부재 상황을 감각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 다시 “씻고 말리고 접어두신 어머니 손길같은 시간들 붉다”라는 시행 하나가 이 모든 의미체들을 하나로 융합시켜 버린다.

「분단의 상처」는 ‘철조망’과 ‘시간’이 어우러져 기록하는 현재의 역사 기록물이다. 바람결 따라 출렁거리며 나무의 속살을 파고들고 있는 철조망 가시는, 이 땅을 70년이나 두 동강으로 갈라버린 통한의 역사로 파고든다. 애초에 ‘철조망’은 19세기 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이었다. 신무기를 앞세운 제국주의는, 토착민들을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철조망을 고안해 냈다.(앨런 크렐, ??악마의 끈-철조망의 문화사??, 사계절, 2005). 이때부터 철조망은 영역을 구별 짓는 공간적 기호로 기능하였다. 철조망을 기준으로 안과 밖이 생겨났고, ‘나’의 무리와 ‘너’의 무리가 대립하게 되었다. 철조망이 ‘단절’과 ‘격리’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 연유이다. 이 땅의 역사는 아직도 이러한 단절의 시간 위에서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걷힐 듯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더 팽팽하게 당겨져 역사의 속살을 아프게 파고든다. 그렇게 출렁거리는 고통의 역사 속에 수많은 서사들이 뭉쳐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땅의 그 숱한 서사들은 다음의 시에서처럼 “대지의 손금”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오후 햇살

대지의 손금을 보고 있다

- 「철학관 언저리에서」


5. ‘시인’으로 산다는 것.

예로부터 ‘시인’은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먹물의 지식인에도, 속물의 시정잡배에도 섞이지 못하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들이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무능하다 하여도 여전히 ‘시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일은, 외롭고 쓸쓸할지언정 높은 곳에 우뚝 올라 세상의 모든 것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일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자본의 자리에서 멀리 물러나 마음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마음을 내주고, 그들과 온전히 대화하는 존재. 그리하여 그것들이 품은 감흥과 서사를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옮겨주는 메신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생존을 이유로 내세워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하는 자들이 유독 많아진 세상이다. 자본이 절대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그러한 시류도 읽어야 한다고 세상은 가르친다. 그러나 시인은 밀려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는 존재이다. 턱없이 모자라는 문장들임에도 자본을 앞세우고 시류에 얹혀, 스스로 ‘시인 되기’를 욕망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본다. 또 그들을 내세워 ‘참시인’들이 힘들게 버텨왔던 자리를 야금야금 밀고 들어오는 세력들도 있다. ‘시인’의 존엄이 상실되고, ‘시’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결정적 원인이 그들에게 있다.

글쓴이는 오래도록 황시언 시인의 독자였다. 디카시의 현장에 있을 때도, 그 현장에서 물러나 있을 때도, 여전히 그의 안부가 궁금했고 그의 시들이 궁금했다. 그리하여 수년 만에 불쑥 걸려온 전화가 반갑고 고마웠다. 그가 여전히 시인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과, 오랜만에 본 그의 시편들이, 자본을 내세우고 시류를 내세우는 세간의 것들과는 비교되지 않으리만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시집에 해설을 쓰는 일이 내 분에 넘치는 일임을 잘 안다. 그렇기에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행간을 채웠다. 그의 넓고 깊은 시안(詩眼)이 앞으로 더 많은 세상의 결들을 곰살맞게 쓰다듬어 주길 바랄 따름이다.

추천평

미림, 황시언의 아름다운 말의 숲을 나는 거닐기를 좋아한다. 내가 만난 미림의 디카시 속엔 채색된 은유의 비늘들이 파닥이고 있었다. 시편마다 번뜩이는 직관의 서정 앞에 전율하기도 했다. 「봄소식」, 「밍겅 읽기」, 「세월호」, 「기다림」, 「햇빛만의 권리」, 「그렁그렁」, 「추수」, 「생의 고비」 등에서 피워낸 사랑과 그리움을, 허무와 눈물과 애증, 그리고 조화로운 언어의 고귀함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미림의 사랑은 애틋하여 눈물겹다. 명쾌한 촌철살인, 디카시의 진수를 여기서 만난다. - 공영해 (시인, 전 창원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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