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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랑 치즈다.” 겔론이 말한다. “에우리피데스의 대사를 알고 있고 암송할 수 있는 자에게 준다! 『메데이아』나 『텔레포스』의 대사를 아는 자에겐 올리브도 주겠다.”
“소포클레스는요?” 이가 몽땅 빠진 조막만 한 놈이 묻는다. “『오이디푸스 왕』이라든지요.” “소포클레스는 엿이나 먹으라지! 겔론이 소포클레스를 찾았냐?” ---p.19 별이 쏟아지던 하늘 아래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하더니 기회가 오자마자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여자와 가버린 이아손. 웃음거리가 된 메데이아는 이제 버려진 채 아무것도 없이 헬라스 전역을 떠돌며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그 부당함에 가슴이 아파 파케스를 돌아보며 욕을 퍼붓는다. 개자식이라고. 메데이아 없이는 절대 로 양털을 못 얻었을 거면서. 내 목소리는 덜덜 떨린다. “그녀는 널 사랑한다고!” 내가 말한다. “네 자식들까지 낳아주고. 이 개자식아!” ---p.58~59 “그리고 『메데이아』만이 아니에요. 그들이 말해줬는데, 아테네를 떠나기 전에 에우리피데스가 새 연극을 썼대요. 트로이아에 대한 거요. 트로이아가 함락된 이후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래요. 시켈리아에서 그 연극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라고요. 우리는 둘 다 하려고요. 『메데이아』도 하고, 『트로이아의 여인들』도 하고. 정말로, 그 작품들이 사라지게 둘 순 없어요. 우리가 해야만……” ---p.94 굶주림이란 참 기묘한 것이다. 결핍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근원 아닐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바로 결핍이지 않을까? 뭔가 거기 있는 것 말고 뭔가 거기 없는 것 말이다. 나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누마와 파케스의 눈이 커지고 반짝이는 것을 보며, 그들이 손톱까지 바짝 세워 치즈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든다. ---p.166 금세 아이들 모두가 벽으로 달려가 땅바닥에 붙은 창백한 이들을 일으켜 세운다. 스트라보는 워낙 조그매서 포로가 손을 붙드니 몸을 휘청이지만 그래도 잘 버틴다. 곧 그 포로도 일어선다. 스트라보는 자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그를 손수레 쪽으로 데려간다. 슬쩍 보면 그냥 아버지와 아들을 보는 것 같다. 아테네인들이 소년들의 손을 붙잡고, 소년들의 표정은 변화한다. 어쩌면 저 가여운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 됨을, 아이다움을 수행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208 아이들도 얼어붙은 채 서 있다. 고개를 돌려 위쪽을 올려다보자 내리막길 전체가 마치 거대한 뱀이 기어 내려오듯 달달 떨리는 것 같다. 무수히 다채로운 색으로 이루어진 길목은 이제 더는 어둑하지 않다. 그제야 왜 다들 얼어붙어 있었는지 깨닫는다. 수백 명이다. 모두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 ---p.278 그가 몽둥이를 치켜들자 누마는 한 손을 들고 뭐라고 말하는데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둔중하게 내려치는 몽둥이 소리와 함께 누마의 얼굴이 사라진다. 다시 보았을 때는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다. 몽둥이질이 한 번 더 가해지자, 이제는 엉겨 붙은 머리카락과 누런 두개골 조각, 갈색 눈 하나가 달린 피부 한 점만 남는다. ---p.295 “전쟁이잖아요. 비슷한 일은 늘 벌어지죠.” 그는 슬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그렇죠. 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었어요. 먼지 날리는 일리온의 벌판도 아니고, 시라쿠사도 아니고, 비와 숲의 땅, 신록이 자라나는 세계였죠. 그런데 거의 똑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인간의 마음이란 어딜 가나 똑같더군요. 나머지는 배경일 뿐.” ---p.316 상식적으로 보면 2년 전 시라쿠사도 항복했어야 했다. 상식이란 흔해빠진 생각일 뿐, 상상력이라곤 없고 오직 선례만을 따르는 생각일 뿐이다. 상식을 따르면 주머니 속이, 그리고 내면까지도 가난해진다. 상식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p.323 그는 나를 자기 어머니라고 여기며 이야기를 쏟아낸다. 농장 이야기며, 농부가 되기가 얼마나 싫었는지. 그저 자기랑은 안 맞는 일 같았다고. 농사일에는 영 젬병이었다고. 하지만 제가 엄마를 데리러 꼭 갈게요. 저 성공했거든요, 피레우스에 바다가 보이는 집도 얻었어요. 엄마도 여길 좋아하실 거예요. 이 렇게까지 오래 떠나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저를 용서하시고 피레우스에 와주실래요? “그래, 갈게.” ---p.333 “몸 잘 챙겨.” 그가 내 양 볼에 입을 맞춘다. “아테네에선 친구와 작별할 때 이렇게 인사해요.” 그 말에 왜 이렇게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목이 메지만 그래도 씩 웃으며 그의 양 볼에 입을 맞춘다. 파케스는 뭔가 더 말하려 하지만, 선원들이 썩 꺼지든지 카르타고까지 같이 가든지 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파묻히고 만다. ---p.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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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의 죽음의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비극 속의 희극, 희극 속의 비극 이야기는 기원전 4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 시라쿠사에서 시작된다. 20년 가까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기세등등한 아테네가 시켈리아 땅 전체를 집어삼킬 목적으로 시라쿠사를 포위했으나 시라쿠사 해군은 아테네군을 격파했고 출구를 봉쇄하여 퇴각조차 가로막았다. 살아남은 약 7천 명의 아테네 침략자들은 포로가 되었지만, 당시는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는 시점으로부터 2,361년 전이었다. 포로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식이 없던 시라쿠사 당국은 ‘채석장’이라는 대책을 내놓았다. 석회암 가득한 도시 외곽 채석장에 7천의 포로를 가두고 굶어 죽을 때까지 방치하자는 것이었다. 누구도 이 상황을 두고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두 명의 실직한 도공, 겔론과 람포가 예외라면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아테네와의 전쟁 탓에 직업을 잃은 람포와 겔론은 가끔 물, 빵, 치즈 같은 먹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썩은 내 나는 채석장으로 향한다. 그들이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는 동기는 연민이 아니다. 그저 연극 애호가로서, 아테네의 위대한 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대사를 아는 만큼 좀 읊어달라는 것이다. 이제 곧 아테네를 향한 스파르타의 침공을 앞두고 있고 스파르타는 도시 전체를 몽땅 불태워버릴 기세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앞으로 영영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겔론은 결심하고 람포를 설득한다. 채석장에서 죽어가는 아테네인 포로들을 모아 『메데이아』를 연극으로 올리자고. 가발이고 갑옷이고 소품도 제대로 갖출 거고, 악사도 부를 거고 관객도 부를 거다. 에우리피데스의 마지막 작품을 지켜내야 하니까. 에우리피데스를 세상에 남겨야 하니까. 주인공 겔론과 람포는 둘 다 노동 계급이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아웃사이더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둘은 자신들의 눈동자 색깔(얕은 바닷물 색깔과 똥빛 갈색)처럼이나 서로 매우 다른 인물이다. 겔론은 가수가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그것을 이루지 못했고 끝내 예술적 상상력을 발산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병마로 죽은 아들의 아버지이며 그 슬픔으로 떠나버린 아내의 남편이다. 아테네 포로들을 통해 에우리피데스를 무대에 올리려는 그의 집착은 자신의 좌절과 고통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반면 람포는 평범하고 천박하고 가벼운 청년이다. 연극에 대한 애호도 대단한 것은 아니다. 에우리피데스에 미쳐 있는 겔론과 달리 람포가 조금이나마 아테네 비극에 흥미를 가진 이유는 오직 친구인 겔론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연극보다 매일 밤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며 술집에서 일하는 노예 소녀 리라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오히려 훨씬 큰 즐거움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람포는 희극에서 나온 인물이고 겔론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영광 없는 영웅들』의 성공은 저자가 겔론이 아닌 람포를 화자로 삼은 결정 덕분이 크다. 이 결정으로 인해 겔론의 깊고 절박하고 진지한 감정이 람포의 경쾌한 어조를 통해 굴절되어 전달되고, 결과적으로 비극과 희극을 왔다 갔다 하는 효과를 작품 전반에서 자아내게 되었다. 죽이고 부수고 불태우는 잔혹한 세계에서 그럼에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무언가를 위하여 역사 속에서는 시라쿠사 당국이 아테네 포로들을 채석장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으나 만약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 시라쿠사가 패배했다면, 당연히 아테네가 도시를 불태우고 시라쿠사인들을 가차 없이 노예로 삼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실제로 도시가 멸망하고 문화가 통째로 지워져버리는 잔혹한 곳이었다. 레넌은 시라쿠사인 연출가와 아테네인 포로의 관계를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미화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포로들에게 먹거리를 가져다주는 겔론과 람포의 행동은 결코 자비와 연민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아테네는 굶어 죽어가는 벌을 받고 나아가 멸망하는 것이 마땅한 적국(敵國)이다. 이는 포로이자 배우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두 주인공의 바람에 따라 연기를 시작한 것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살아남게 하려는 숭고한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치즈와 올리브를 얻어 먹으며 며칠, 몇 주라도 더 살고자 하는 단순한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메데이아』와 『트로이아의 여인들』을 연습하며 연극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조명하기 위해 적국의 인간과 협력하는 경험은 양쪽 모두에게 스스로도 몰랐던 이타적인 충동을 일깨워준다. 아테네의 연극을 향한 겔론의 사랑과 집착을 보며 포로들은 아테네 문화를 향한 잃어버린 자긍심을 느끼고 이야기를 함께 만들며 적국의 인간이 하나로 녹아들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겔론과 람포는 포로들의 너덜너덜한 옷 아래로 그들의 앙상한 다리와 쇠사슬에 묶인 발목을 드디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레넌의 작품에 등장하는 연극이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상상을 할 수 있는 매개’인 셈이다. 『영광 없는 영웅들』은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예술과 문화가 인간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책으로 평가받는데, 이는 전 세계가 전쟁에 시달리는 시대이기에 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스』는 이 작품에서 엿보이는 예술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예술이란 반복되는 반증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다.” 『영광 없는 영웅들』은 순진하거나 위선적이지 않은 태도로 이러한 예술의 가치를 옹호하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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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특별하고, 매우 영리하며, 매우 재미있는 작품. - 로디 도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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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야심 차면서도 모든 위대한 비극이 그러듯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유쾌하다. 놀랄 만큼 독창적인 데뷔작으로,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 엠마 도노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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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독자를 몽둥이로 때린 뒤 귀에 시를 속삭여주는 것 같다. 다른 책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거칠면서도 재미있는 매력이 있다. 이런 책이 진작에 나왔어야 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 로리 글리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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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가장 독창적이고 놀라운 데뷔. - 아이리시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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