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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이 꺼지지 않게
N번방 이후 6년, 추적단 불꽃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반양장
원은지
돌고래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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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1부 지금도 여전히, 추적단 불꽃입니다
또다시 찾아온 N번방의 비극-엘 사건 취재기
2. 나를 아는 사람 중 범인이 있다-서울대 딥페이크 사건 취재기
3. 딥페이크 성착취는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
4. 모두가 공범인, 아주 가깝고 거대한 가해-겹지방 취재기
5. 성착취물을 팝니다-불법 성착취물 사이트 R 추적기

2부 물방울은 바위를 뚫는다
벗어나기보다 멀어지기-노라의 이야기
손을 잡고 일어나 손을 내밀기-사라의 이야기
가해자를 대리하지 않습니다-법무법인 혜석 박수진 대표변호사 인터뷰
N번방 이후 우리는 어디까지 왔나요?-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과의 대화

3부 연대도 체력입니다
세 개의 전화번호, 한 사람의 이야기
단단한 선글라스와 마스크
나를 구원하는 루틴
우리는 서로를 붙잡아
유엔에 가다
풋살, 나의 안전지대

에필로그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기관

저자 소개 1

추적단 불꽃 대표. 반反성착취 활동가이자 프리랜서 기자다. 2019년 대학생 시절 팀을 꾸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최초로 취재해 디지털 성범죄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고, 수집한 자료를 경찰에 넘겨 수사에 협조했다. 이후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등을 추적하며 디지털 성범죄 피해 생존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이봄), 『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 페미니즘의 관점』(학이시습)가 있다. 인스타그램, X, 유튜브 @56flame 추적단 불꽃 수상 이력 2019년 9월 제1회 뉴스통신
추적단 불꽃 대표. 반反성착취 활동가이자 프리랜서 기자다. 2019년 대학생 시절 팀을 꾸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최초로 취재해 디지털 성범죄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고, 수집한 자료를 경찰에 넘겨 수사에 협조했다. 이후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등을 추적하며 디지털 성범죄 피해 생존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이봄), 『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 페미니즘의 관점』(학이시습)가 있다. 인스타그램, X, 유튜브 @56flame

추적단 불꽃 수상 이력
2019년 9월 제1회 뉴스통신진흥회 탐사심층르포 공모전 우수상
2019년 11월 강원지방경찰청 감사장
2020년 4월 제22회 국제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2020년 4월 제2회 뉴스통신진흥회 탐사심층르포 공모전 특별상
2020년 4월 제355회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특별상
2020년 6월 제3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민주상 특별상
2020년 6월 한국방송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 특별상
2020년 9월 여성가족부 장관 표창
2020년 9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올해의 보이스
2020년 10월 한국YWCA연합회 제18회 한국여성지도자상 특별상
2021년 1월 민주언론시민연합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
2022년 9월 KBS 우수프로그램상 특별상
2024년 2월 미국 국무부 국제지도자 프로그램(International Visitor Leadership Program) 선정
2025년 1월 프랑스 시몬 베유상(Simone Veil Award) 후보 선정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01일
판형
반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16쪽 | 348g | 128*188*20mm
ISBN13
9791124755044

책 속으로

‘네임드’는 생태계의 꼭대기에 있는 성착취범이다. 이들은 가장 유명하고 눈에 띄지만,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일 뿐이다. 갓갓과 박사는 사라져도 생태계의 뿌리와 몸통인 시청자와 소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 역시 성착취 생태계를 구동시키는 가해자다.
--- p.24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6개의 여성 및 시민 단체는 「형사소송법」 개정이 피해자에게 개악
이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보완수사권 축소와 폐지가 권력형 성범죄나 여성폭력 범죄에서 피해 입증을 어렵게 하고, 2차 피해와 구제 지연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수사 현장을 지켜본 단체들의 경고였다. 개혁의 속도가 아니라, 그 설계가 누구를 중심에 두었는지를 묻는 지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논의는 여전히 기관 간 권한 배분에 머물렀다.
이 둘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외부 통제는 수사관 개인의 역량과 의지에서 비롯된 편차를 사후에 교정하는, 사실상 유일한 안전망이었다. 그 장치가 요구권으로 축소되면 ‘운’의 비중이 커진 수사만이 남는다.
--- pp.47-48

‘엘’은 내가 지은 가명이다. 취재를 시작하고 8개월 만에 보도를 하게 되면서 임의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
다. 엘이 텔레그램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은 전혀 다른 것이다.
N번방의 창시자 ‘갓갓’ 문형욱, 박사방의 우두머리 ‘박사’ 조주빈. 이들은 모두 텔레그램에서 실명이 아닌 닉네임을 썼다. 그들이 제작한 성착취물에는 갓갓, 박사의 수식어가 붙어 유포되었다. 그들의 후계 격인 엘 역시 비슷한 양상이었다. N번방 보도 이후 가해자 닉네임을 검색해 성착취물을 찾아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늘어나는 뼈아픈 경험을 한 터라, 본래 닉네임을 쓰지 않기로 했다.
--- pp.55-56

‘N번방 방지법’이라 불리는 법안 개정의 골자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촬영물 소지·구매·시청, 허위영상물 편집·반포 같은 새로운 유형의 범죄를 신설하고 처벌을 강화한 것. 다른 하나는 연매출 10억 원 이상, 일평균 이용자 10만 명 이상인 부가통신사업자에게 불법촬영물을 관리·감독할 책임을 지운 것이었다. 정작 온라인 그루밍을 처벌하는 조항은 이때 함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건 1년 반 가까이 지난 2021년 9월에야 「청소년성보호법」이 다시 개정되면서 뒤늦게 신설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촘촘해 보였지만, 엘 사건을 취재하면서 나는 이 법이 정확히 어디서, 그리고 언제 비껴가는지 몸으로 확인했다.
--- p.65

2019년 여름부터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를 추적해 오면서 나는 디지털 성범죄 세계의 ‘은어’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제법 비슷하게 구사할 수도 있었다. 범죄자에게 접근할 때 나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들어낸다. 사회 규범에 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고, 반쯤 나사가 풀린 상태의 남성이다. 연령대와 직업, 대인 관계, 성격, MBTI 등은 상황에 맞게 미리 준비한다. 정체를 속이고 상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거나 허를 찔리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미리 설정해 둔 페르소나에 집중해야 의심받지 않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 p.78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불법 성착취물 사이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운영자가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다 보니 관계 기관의 삭제 요청이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천디지털성범죄예방대응센터의 경우, 2024년 1월부터 9월 말까지 성인 사이트를 대상으로 565건의 삭제 요청을 했지만,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은 2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 pp.109-110

겹지방은 2025년 3월 기준,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국 시도별로 카테고리를 나눠 운영되고 있었다. 참여자들이 효율적으로 ‘겹치는 지인’을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라는 겹지방 대화방에 “부산 09 ···(이름)”라는 메시지가 올라오면, 누군가 “나도 아는 지인”이라고 호응한다. 그때부터 이들은 개인 텔레그램(약어 ‘ㄱㅌ’)으로 대화를 이어가며, 딥페이크 범행을 저지른다. 일종의 ‘공범’ 찾기 모임인 셈이다.
--- p.118

2024년 8월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가 프랑스에서 아동 음란물 유포와 범죄 방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때부터 변화가 이루어졌다. 11월 ‘자경단 사건’을 계기로 한국 경찰과의 공조 체제가 구축되었고, 2025년 6월 기준 텔레그램은 경찰의 수사 요청에 95퍼센트 이상 응하고 있다. 5년간 응하지 않던 협조가 현실화된 것이다. 반가운 변화다.
--- p.133

여러 불법 성착취물이 유포되는 사이트 R에, 본인의 피해 영상이 지난 두 달간 꾸준히 재업로드되었다고 했다. K씨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해 삭제 요청을 해도,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피해 영상에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일주일 중 절반의 시간을 사이트 R을 모니터링하는 데 썼다. 심지어 본인의 피해 영상이 올라오는지 확인하는 데 필요한 ‘포인트’를 적립하고자 하루도 빠짐없이 사이트에 출석 체크를 해야 했다.
--- p.137

이렇게 영상이 누군가에 의해 임의로 편집되면, 영상의 해시값이 달라진다. 이전 영상과 해시값이 달라질 경우, 해시값을 통해 영상을 찾아 삭제하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영상을 삭제하고자 하는 피해자의 마지막 노력까지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행위다. (1부 지금도 여전히, 추적단 불꽃입니다,
--- p.144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이 문장을 쓰면서 한 장면이 그려졌다. 누군가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모습. 목소리가 작아서가 아니었다. 듣지 않는 구조가 문제였다. 현실에서 피해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피해를 증명해야 하고, 수사 기관을 설득해야 하고,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스스로 싸워야 한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 피해자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그 싸움이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사회 구조와 문화가 피해자의 증언과 보호 요구를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무시할 때, 피해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피해자를 싸우게 만드는 건 피해 자체라기보다 그 구조다.
--- pp.161-162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는 잡기 힘들다고들 말한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물은 영구적으로 삭제할 길이 없다고들 말한다.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를 바라보는 태도는 짙은 패배감 그 자체다. 끈질기게 반복되는 사건 앞에서 체념한 듯 보인다. 나의 일이 아니라는 거리감? 반복되는 뉴스에 대한 피로감? 그것은 무관심일까, 아니면 무력감일까? 문제가 너무 크고, 변화는 너무 더디고, 개인의 노력은 너무 미미해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패배감은 비단 침묵하는 시민만의 것이 아니다. 피해 생존자를 돕는 조력자도, 이 문제를 계속 추적하는 활동가도, 정부도 우리 모두가 어떤 순간에는 이 거대한 구조 앞에서 무력함을 느껴보지 않았을까?
--- p.163

노라를 만나 그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줄곧 생각했다. 세상을 바꾼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천지개벽을 이룬다는 말이라면 나는 그럴 자신도, 힘도 없다. 그런데 그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아는 세상이 이렇게 나아갈 수 있구나 희망을 느낀다. 물론 개선되어야 할 일이 한참 많이 남았고, 아직 문제로 정의되지 못한 일도 많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피해 이후 노라가 다른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돕고, 함께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을 줄곧 고민하는 모습을 봤다. 노라는 미래를 그리는 사람이다.
--- p.166

피해 초기에 집중되어 있는 피해자 지원의 성격상, 심리상담을 지원받을 수 있는 기간이 한정적이다. 예컨대기본적으로 여러 기관에서는 심리상담을 기본 10회기만을 지원한다. 노라는 여성가족부(현 성평등가족부) 산하 기관, 지방자치단체 관련 기관 등 여러 곳에 연락해 본인을 소개하고, 지원 자격을 갖추었는지 물어가며 심리상담 회기를 연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 p.170

우리 사회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생존자에게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N번방 사건 이후 취재를 지속하면서 나는 피해자보다 가해자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해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과 태도, 슬픔에 대해 경청하는 법 등 모든 것에 미숙한 내게 기회를 준 사라에게 고맙다. 그때 다짐했다. 앞으로도 당신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듣겠다고.
--- p.192

가해자가 옥중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대중들이 퍼 나를 때, 피해자들은 잠잠해졌던 트라우마가 다시 올라와요. 그걸 수습하면서 생계도 유지해야 하고요. 반박하려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 그게 곧 2차 피해로 이어지거든요. ‘잊힐 권리’를 주장하려면 오히려 자신을 다시 노출해야 하는 모순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가해자의 표현의 자유는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들리는 반면, 피해자의 잊힐 권리나 2차 피해 문제는 대리인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얘기되거나 추상화될 수밖에 없어요.
--- pp.199-200

「스토킹 처벌법」은 원래 교제폭력 피해 여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법인데, 지금은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이 피해 여성을 스토킹으로 역고소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졌어요. 법조문만 보면 정당한 이유 없이, 의사에 반해,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면 성립하거든요. [……] 그걸 깨려면 두 사람 사이의 맥락을 전부 보여주어야 해요. 왜 이 여성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맥락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정당한 사유’로 인정되거든요. 그런데 그 관계성을 보여주는 게 굉장히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에요. 고용 관계, 경제적 위계, 심리적 압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고, 아무도 처음엔 그 관련성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요.
--- pp.200-201

취재하던 때 내 고통이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사건의 목격자일 뿐이었으니까.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갔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따른 심장 통증을 진단받았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고, 폭력의 현장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행위에 따르는 아픔이 있었다.
--- pp.245-246

추적단 불꽃은 내 삶을 바꾸었고, 내 일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었다. 이런 변화가 벅차게 느껴진다. 이 마음으로 일과 삶의 균형을 찾지 못해 아팠던 지난날을 사랑과 연민으로 품어본다. 이런 마음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다 보면 일과 삶의 균형점을 명의가 진맥을 짚어 만병을 통치하듯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날에는 일을, 다른 날에는 그 외의 삶을 조금씩 양보하면서. 내가 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일, 나에게도 도움이나 시간이 필요한 일을 설정하면서. 섣부르게 희망을 품거나 섣부르게 비관하지 않으면서.
--- p.249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 피해자와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며, 신체 구조는 물론 생김새나 옷차림이 겹칠 때가 있다. 가해자를 볼 때 주위에 있는 비슷한 외모의 남성이 연상되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뇌의 연상 작용을 멈출 수는 없다. 뇌는 끊임없이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모니터링을 하는 시간은 폭력이 벌어지는 공간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행위가 될 수 있다.
--- p.256

그 무렵 언론계 한 부장급 종사자가 나에게 “··대학교 정도를 나왔다면 고용했을 거”라고 말했다. “N번방과 같은 임팩트 있는 사건을 재차 보도한다면 그때 능력을 인정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이 말에서 그가 N번방 사건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였다. 상을 받으면 넘어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같은 잣대를 계속 들이댔다. 지방대를 졸업한 20대 여성에게 ‘너의 자리는 원래 없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말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끝없이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굴레에 갇힐 것 같았다. 상을 하나 더 받아도 다음 증명이 기다릴 뿐이었다.
--- pp.267-268

이 목소리를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안다. 6년 동안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다. 그런데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는지는 내가 정하지 못한다. 청탁이 끊기면, 지면이 사라지면, 나를 부르는 곳이 없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년 동안 쌓은 기록이 내가 속했던 미디어 플랫폼이 문을 닫으며 통째로 사라졌다. 중요한 일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중단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오래 나를 짓눌렀다.

--- p.270

출판사 리뷰

‘팬티’로 범인을 잡은 생생한 추적기부터
기자, 활동가의 눈으로 파헤친 디지털 성범죄의 현주소까지
디지털 성범죄 생태계의 최전선에서 쓴 투쟁의 기록

저자 원은지의 활동은 제보로 시작된다. 그간 쌓아온 정보력, 믿음직한 동료들, 가해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저자의 ‘무기’다. 책의 1부 「지금도 여전히, 추적단 불꽃입니다」에서는 ‘제2의 N번방’이라 불린,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1200여 개의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엘 사건’(2022년), 서울대학교 동문 수십 명의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해 파장을 일으킨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2024년), 전국 각 지역과 학교 단위로 개설된 ‘겹지방(겹치는 지인방)’과 학생· 교사를 대상으로 벌어진 ‘교내 딥페이크 성착취 사건’(2025년) 등 직접 추적하거나 취재·보도한 사건들의 전말을 생생하게 펼쳐낸다.

저자는 피해 발생 이후 유포·재유포부터 수사와 재판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피해자를 조력해 왔다. 유포 신고 및 피해물 삭제 지원, 재판 증언 등 사후 조력은 물론, 텔레그램 방에서 가해자와 직접 소통해 추가 피해를 막고 확보한 자료를 제공해 수사를 도왔다. 특히 텔레그램 방에서 사용되는 은어와 디지털 성범죄 가해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해자와 라포를 쌓고 ‘팬티’를 미끼 삼아 범인 검거에 성공한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 추적기에는 그 긴박함과 간절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듯 생생한 추적기 사이로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서 법과 수사가 왜 자꾸만 실패하는지 날카로운 진단이 이어진다. 책에 따르면 그간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다. 2024년 9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되어 딥페이크 성착취물 제작은 물론 소지 및 시청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같은 해 텔레그램이 5년 만에 수사 협조에 응해 관련 자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협박과 성착취, 유포와 재유포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대면형 성폭력처럼 가해자 한 명을 특정하여 수사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또 불법촬영물과 성착취물이 유통되는 상당수 사이트는 해외 서버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미등록 사이트여서 국내법상의 행정 제재를 가하기 어렵다. ‘N번방 사건’ 이후 관련 법이 대폭 정비되었음에도 ‘엘 사건’과 같은 범죄가 다시 발생할 수 있었던 제도적·수사적 허점을 짚어내는 대목은, 6년간 피해 지원과 취재 현장을 오가며 쌓아온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분석이다.

『불꽃이 꺼지지 않게』는 한발 더 나아가 현장에 남은 주요 쟁점까지 짚어낸다. X나 텔레그램 같은 해외 플랫폼과 불법 사이트의 사회적 책무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 최근 논쟁이 된 ‘보완수사권 폐지’가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을 다룬다. 법망과 현장 사이에 어떤 간극이 남아 있는지, 지금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누가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피해 이후의 삶을 써 내려가는 생존자들
피해자 곁에서 법과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들
각자의 자리에서 변화를 만드는 목소리

디지털 성범죄가 형태만 바뀐 채 되풀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우리 사회가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언론은 범죄의 자극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사건이 공론화되면 수사에 속도가 붙어 가해자가 검거된다. 그러나 관심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임시방편에 가까운 대책만 반복된다. 진화하는 가해 양상과 피해 생존자들의 요구가 제도와 정책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한, 협박-제작-유포-재유포로 이어지는 디지털 성범죄의 생태계를 뿌리 뽑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이 책이 피해 생존자들과 연대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의 2부 「물방울은 바위를 뚫는다」에는 피해 생존자들과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이들의 이야기는 디지털 성범죄 예방과 피해 지원이 나아갈 방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재유포되는 불법 성착취물을 직접 모니터링해 온 피해 생존자 ‘노라’는 초기 대응에 집중된 피해 지원의 한계, 피해자에게 친절하지 않은 수사·사법 시스템, 현행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삭제 지원 시스템의 미비점을 이야기한다.

젠더 기반 폭력 전문 법무법인 혜석을 설립한 박수진 대표변호사와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과의 인터뷰는, 피해 지원과 제도 개선을 위해 현장에서 어떤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고 처벌 수위가 올라가면서, 역설적으로 가해자 변호 시장 역시 폭발적으로 커졌다.(202쪽) 박수진 변호사는 성인지 감수성 법리를 바탕으로 가해자 측 주장에 맞서고,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법적 장치를 만들어온 여정을 들려준다. 원민경 장관은 신속한 유통 차단과 제재, 수사 연계 등 총괄 대응을 강화하는 ‘디지털성범죄 피해통합지원단’,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사전에 차단하는 ‘AI 기반 아동·청소년 온라인 성착취 선제적 대응시스템’, 피해 접수부터 대응 요령과 지원 절차까지 한곳에서 확인 가능한 디지털성범죄피해지원통합홈페이지(d4u.stop.or.kr) 등 새롭게 도입된 정책과 제도를 소개한다.

책의 부제 속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되풀이되는 범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연대 또한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는 무력감과 냉소 대신, 희망과 용기, 단단한 인내로 독자들을 이끈다.

영웅도 초인도 아닌,
한 여성 청년의 성장과 연대의 기록

3부 「연대도 체력입니다」는 저자의 이야기다. 피해 생존자를 조력해 오면서 언제나 기쁨과 보람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피해물을 모니터링하고 가해자와 대화하는 건 스스로를 폭력에 노출하는 일이기도 했다. N번방 사건 보도 이후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고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사건의 자극성만 소비하는 일부 언론에 상처받고 자신의 배경을 둘러싼 평가에 휘둘리기도 했다. 독립 활동가로 별도의 지원 없이 활동하다 보니, 피해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할까 봐 책임감과 두려움에 짓눌리기도 했다. 가해자의 협박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그 시간을 딛고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배워온 과정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스스로 안정감을 되찾는 일상의 루틴을 만들기까지, 그 흔들림과 나아감의 시간은 저자가 비범한 용기와 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흔들리는 여느 30대 여성임을 보여준다.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수사 실태를 증언하고, 유엔의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검토’에 참석해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현실을 알려 유의미한 권고를 받기까지의 여정은 한 편의 성장담처럼 읽힌다.

뉴스를 보며 분노했던 사람, 청원에 이름을 보탰던 사람, 곁의 누군가에게 이런 사건들을 설명해 본 적 있는 사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몫을 했다. 나는 기록했고, 당신은 읽고 움직였다. 그 사실을 나는 6년 동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19쪽)

이 책에서 저자가 거듭 되새기는 말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디지털 성폭력 앞에서 무력해질 때, 자신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질 때 그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시 움직였다. 저자는 그 힘이 피해 이후에도 자기 삶의 주체로 서서 가해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또 다른 피해자를 향해 손 내밀었던 생존자들에게서 왔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르며 어쩌면 희미해졌을지 모를 ‘연대’의 불씨를 이 책은 다시 지피고자 한다.

추천평

범죄 피해자가 되어보면 안다. 누군가 기나긴 투쟁의 여정을 함께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원은지 추적단 불꽃 대표는 언제나 피해자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다. 내가 2021년 6월 온라인 스토킹과 디지털 성범죄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초기 증거 수집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존재가 추적단 불꽃이었다. 불꽃이 증거를 모아주지 않았다면, 가해자를 고소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6년째, 원은지는 여전히 ‘불꽃’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 곁에 있다.
활동가의 삶은 고단하다. 피해자와 고통을 나누느라 휘청이고, 가해자의 표적이 될까 불안해 공적인 자리에선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다. 그렇지만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그에게 이 모든 일을 감당하게 했다. 이 책은 그간 그가 희망을 발판으로 쌓아온 연대의 기록이다. 피해자와 함께 싸웠고, 피해자와 함께 싸우는 중이며, 피해자와 함께 싸울 저자에게 이 책이 또 다른 연대와 응원의 고리가 되길 바란다. - 곽아람 (기자)
어떻게 계속할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원은지는 해맑은 얼굴로 답했다. “피해자가 포기하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포기해요.” 원은지는 피해자가 용기를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래서 피해자가 손을 내밀었을 때 전력을 다해 그 손을 잡는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폭력 속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구원서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얘기를 책으로 써줘서 고맙다. 정말 큰 용기가 되었다. - 권김현영 (여성학자)
작은 불씨들은 꺼지지 않는 온기로 끝내 사람을 살릴 것이기 때문이다. ‘N번방 이후’라는 표현은 충분치 않다. 그러니 바라건대, 지면에 차마 다 적을 수 없었을 피해와 연대의 시간까지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그리고 저마다의 불씨를 가지고 모여들어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길 빈다. 잔혹한 폭력에 저항하는 불의 결기만큼이나 산 자를 둘러앉히는 다정한 불길이 여기에 있다. - 천희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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