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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 … 007
작가의 말 … 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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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배낭은 극한의 상황에서 우리의 끝을 지연시킨다. 한 사람이 구조를 기다리며 버틸 수 있을 만큼, 대략 칠십이 시간을 살게 하는 최소한의 물품으로 채워진다.
---p.9 과거의 어느 지점을 자꾸 맴돌다보면, 그 끊임없는 복기가 신비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 파동이 저 아래 잠들어 있던 심해어들을 깨우고 결국 수면 위로 솟구치게 한다. 뒤늦게 알게 됐다. 4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부터 내가 줄곧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그건 이미 지나쳐버린 한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p.15 “방금 떨어진 빗방울 하나를 만나려고 저 바닷가까지 가는 거나 마찬가지죠. 찰나에 불과하다고요. 금세 흘러가니까. 왜, 빛이 나뭇잎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보이잖아요. 살아 있는 건 늘 뒤척이는 거니까 그러다 아주 잠깐 같은 꼴로 겹치기도 하는 거고.” ---p.19 꿈은 아몬드 모양이구나. 나는 그 교집합을 오래 바라보았다. 태오는 꿈에 비밀을 넣어둔다고 말했다. 꿈은 얇지만 찢어지지 않아서 책갈피처럼 어디든 끼워넣을 수 있고, 그래서 좋은 보관소라고. ---p.38 “내가 보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오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럴 날도 오겠죠?” ---p.123 보통 우리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디를 향해 갈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닥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행선지를 확인하고 올라타도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니까. ---p.124 사랑은 바라봄과 풍덩 사이의 낙차, 그 힘으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나중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모든 것은 현재형의 파도뿐. ---p.155 고작 1킬로미터를 남기고 역주행을 했던 내 마음을. 이미 지나쳐서 잔상만 남은, 그러나 여전히 휘발되지 않은 순간에 다시 놓이길 바라는 사람을. 잠깐 스친 무언가를 잊지 못해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을. 지난밤 꿈속으로 되돌아가려는 사람을. ---p.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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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는 세상에서 기어이 역주행을 하는 한 여자
표정 없는 세계에서 끝내 얼굴로 남은 한 남자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목적지가 되어 달려나가는 애틋하고도 찬란한 계절의 러버스 하이(Lover’s High) 『테니스나무』는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서 한순간 스쳐지나간 얼굴 때문에 결승선을 고작 1킬로미터 앞두고 돌연 역주행한 전적이 있는 ‘미아’와, 인간 역무원이 거의 사라져버린 지하철 K선 역사에서 일하는 인턴 ‘태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둘은 지하철 역사를 달리는 하프코스 러닝 대회 ‘라인런’을 진행하기 위한 거래처 관계로 처음 만난다. 생존배낭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미아가 직접 기획한 생존배낭이 라인런의 기념품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분주히 대회를 준비하며 둘은 어느새 서로를 향한 마음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걷는 길,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전과 달리 새삼스럽게 다가든다. 열차의 선로는 오선지가 되고, 불 밝힌 창문과 가로등은 음표가 되고, 테니스코트에 자리한 나무 한 그루는 깨물면 상큼한 과즙이 흐르는 라임빛 열매가 열리는 ‘테니스나무’가 된다. 하루치의 움직임을 모두 소진한 테니스코트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라임색 테니스공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무척 율동적으로 느껴졌다. 그것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분명 정물은 아니었다.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싱그러운 열매들처럼 느껴졌달까. 나는 오른쪽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 입 베어 물면 여기까지 새콤한 맛이 쫙 뻗칠 것 같지 않아요? 저 열매요.” _44쪽 러닝 대회를 무사히 마무리한 뒤, 마침내 ‘거래처 관계’라는 데서 오는 심적 부담과 조심스러움에서 벗어나 서로를 마음껏 사랑할 일만 남아 있던 그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며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사건의 여파는 곧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되돌릴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는 휘몰아침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도 균열이 인다. 수화기 너머로 한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열차를 갈아타는 중인데요, 어제 이 시간대에도 봤던 사람이 똑같은 벤치에 누워 있어서요. 그 러닝 대회 가방 메고 있거든요? 어제랑 옷도 똑같고 자세도 똑같아서 혹시 긴급한 상황인 게 아닌가 해서 전화를 걸었어요……” _72~73쪽 아닌 걸 알면서도 기꺼이 사로잡히고 싶은 마음 인간이기에 가능한 서성임과 바라봄, 되돌아봄에 관하여 몸을 쭉 늘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너머의 풍경을 슬몃 엿보고, 그렇게 목격한 세계에 기발한 상상력을 더하는 것. 윤고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 유연한 “까치발의 감각”은 그의 소설세계를 이끌어나가는 핵심 키다. 『테니스나무』의 태오와 미아가 마주하는 세상 역시 그가 그렇게 까치발로 먼저 넘겨다본 풍경. 아마 우리가 곧 맞닥뜨리게 될, 아니 어쩌면 이미 코앞에 닥쳐 도무지 피할 방도가 없는 미래다. 뒤돌아볼 틈을 주지 않고 앞으로 쾌속 질주하는 세상에서, 태오와 미아 두 사람은 현재진행의 방향과 속도를 (비)의지적으로 무화시키고 그 흐름에서 비껴 선다. 서성이고, 멈추고, 부러 되돌아본다. 사람들이 떨어뜨린 유실물을 찾고, 설명되지 않는 비밀이 녹아든 꿈을 꾸고, 살아본 적 없는 시대를 동경하고, 스스로도 해명하지 못할 이유로 별안간 멈춰 서는 존재들. 그러다 마주앉은 서로를 저도 모르게 한참 바라보다 기어코 풍덩, 어찌할 도리 없이 마음을 쏟고야 마는 순간, 우리는 본다. 두 사람의 세계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매끄럽게 설계된 알고리즘의 세계에 포섭되지 않는 인간다움을. 결코 침범당하지 않는 오롯한 우리의 얼굴과 마음을. 확실한 것은 내 삶으로 누군가 쿵쿵거리며 들어왔다는 것이고, 그게 실낱같은 스침에 불과하더라도 이제 나는 그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_18쪽 승객들에게 “여기 사람이 있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26쪽)는 안심을 주는 사람, 태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버틸 수 있게 하는 생존 용품을 고민하는 사람, 미아. 이 한 쌍의 연인에게서 윤고은이 오래도록 소설을 통해 건네온 마음이 겹쳐 보인다. 곁에 있는 이들의 불안을 살피고 더 나은 생존법을 궁리하는 일. 『테니스나무』가 끝내 우리에게 전하는 것도 그 다정한 서성임으로부터 번져나가는 찬란한 파동이다. 이상한 사로잡힘이 시작되었다가 사그라드는 지점, 테니스나무는 한 시절의 지표종처럼 서 있다. 그 모든 여름날을 기억한 채로. _201~20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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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연인들은 창의적인 발명가다. 오직 둘만의 질서 속에서 밤의 빈 테니스코트에 점점이 흩어진 라임빛 공들은 ‘열매’가 되고, 그 옆에 선 나무는 자연스레 ‘테니스나무’가 된다. 그런데 이 사적이고 은밀한 언어가 제도의 언어와 충돌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윤고은 작가는 특유의 경쾌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내밀한 ‘테니스나무’의 세계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훼손되어 차츰 소멸해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사랑’이란 밀실 속의 사적인 감정만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 맥락에 의해 규정되고 재편되는 것임을 증명해낸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윤고은만의 ‘사회파 연애소설’이다. 작가는 이렇게 또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간다. -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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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가는 탁월한 기획자다. 영감과 직관의 재료들을 설계와 배치라는 구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전체로 작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화 업무와 안전 공백, 인간을 대체하는 AI, 온라인 마녀사냥, 개인화된 재난, 책임 소재의 핑퐁게임…… 세상이 똑똑해질수록 위험도 커져가는 잔혹한 아이러니가 윤고은의 손끝에서 생존배낭, 홍해파리, 음악비누 같은 비유와 함께 통통 튀는 무게감으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윤고은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은 윤고은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장담컨대 우주에서도 그럴 것이다. 데이터 사회의 소외와 폭력, 그리고 리스크가 된 사랑을 기발한 상상력과 독창적 비유로 빚어낸 『테니스나무』는 정교하게 설계된 알고리즘 시대의 로맨스이자 그 설계를 배반하는 오작동의 기록이다. 탁월한 기획자인 윤고은은 마침내 유일한 예술가이다. -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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