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Kyung-Ree,朴景利,박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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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로 내려온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떠한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남은 생애의 불길을 태워보겠다는 내 문학적 소망이었다.
빈 공간에 생각을 가득 채워놓고 흐르는 시간의 소리를 들으며 한땀 한땀 뜨면서 바느질하듯, 한 조각 한 조각 쪼아내며 조각하듯, 무릇 무엇이든 만드는 처지라면 그런 시간과 공 간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후좌우 힘겨운 노력이 따라야 하며 노력을 한다 하여도 창작하는 힘과 유실되는 힘의 비례가 같은 것이 또한 현실이며 삶의 단면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또 글을 쓰는 처지이고 보니 여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가 간혹 있다. 대개는 인권 문제로 밀어야 한다고 얘기를 잘라버리지만, 때론 점점 더 노예로 돼 간다 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상대는 어리둥절해한다. 어리둥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간층에서부터 외형이나마 여성들이 많이 자유로워지고 많이 해방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의식으론 해방되지 않았으면서 화폐로 인한 해방의 양상은 과연 어떠한가. 왜 내가 노예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했는가 하니 화폐란 의식을 말살하고 노예근성을 유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사리 언어를 통하여 그 치부를 볼 수 있다.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철저했던 한 세대 전을 훨씬 능가하는 언어 구사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라 할밖에 없겠다. 사랑은 그것이 어떤 형태나 성질이든 결코 존엄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소외하지 않는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소외라는 보루를 쌓으나 그것은 필경엔 고육지계에 불과한 것이요, 진실에의 절규는 한층 자심할 것이다. 존엄의 파괴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외되는 경우, 이것은 어쩌면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속성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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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결코 장식이 아니며, 문학도 장식이 아닙니다”
박경리 탄생 100주년, 강의·에세이·편지로 만나는 거장의 문학수업 * 이슬아 작가 추천 * 박경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산문집 중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Q씨에게』를 새로운 표지로 소개하는 〈박경리 문학수업 에디션〉이 출간되었다. 이 리커버에서는 강의·에세이·편지라는 세 가지 형식을 통해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50여 년의 창작 생활 동안 벼려온 문학관과 삶의 태도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거장에게 배우고, 꿈꾸고, 생각하는 문학수업’을 시리즈 콘셉트로 삼은 이번 에디션은 기존 전집이 주는 무거운 인상에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세련된 판형과 디자인으로 새 독자층을 겨냥한다. 문학을 지망하는 창작자부터 박경리의 문학 세계를 더 깊이 알고 싶은 독자까지 폭넓게 아우르는 문학 교양서이다.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외 수많은 장편소설과 단편, 시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문학 작품을 펴냈다. 〈박경리 문학수업 에디션〉은 이 거장이 소설이 아닌 강의, 에세이, 편지라는 세 가지 다른 형식을 통해 남긴 산문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소설을 쓰는 동시에 강단에 서고, 산문을 발표하고, 가상의 수신인에게 편지를 썼던 박경리에게 글쓰기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물었다. 창작을 특정한 기술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여겼으며, 인간과 자연, 노동과 생명에 대한 사유를 문학의 목적으로 삼았다. 정답이 아닌 태도를, 결과가 아닌 과정을 붙드는 이 오래된 물음들은 무엇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매 순간 판단해야 하는 오늘의 창작자와 독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세 권의 산문에는 진솔함과 냉철함을 오가는 문체 속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민과 태도, 문학과 노동, 자연과 생명에 대한 사유가 담겨 있다. 당대 사회와 세태를 향한 비판적 시선, 가족에 대한 개인적 서사도 솔직하게 드러난다. 박경리의 문학 세계를 형성한 주요 문인·이론가에 대한 평과 풍부한 독서 경험 및 일화를 바탕으로 문학의 목적과 의미를 집약하는 한편, 작가라는 직업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조언도 함께 전한다.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토지』를 탄생시킨 저력이 담긴 삶과 자연에 관한 희망의 찬가 “문학은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것, 불러들여서 하는 게 아니다” 1980년, 박경리는 서울을 떠나 원주로 향했다. 세간에서는 당시 『토지』 집필에 몰두하던 그가 아무 연고 없는 원주로 거처를 옮긴 것을 두고 오로지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짐작했다. 뜰에 서면 치악산 능선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남쪽으로는 백운산이 시계를 가로막는 그곳에서, 박경리는 정든 곳을 등지고 낯선 벌판에 홀로 섰다. “원시림에 내동댕이쳐진 한 마리 작은 짐승” 같았다고, 그는 고백한다. “파도를 타듯 굽이굽이 넘어와야 했던” 삶에서 가장 힘들고 처참했던 시기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연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마음을 풀어내듯, 풀잎 하나·조약돌 하나에도 정겨움을 표하고 철 따라 찾아오는 이름 모를 철새, 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는 청설모 한 마리에도 극진한 애정을 드러낸다. 이 책에 담긴 책에 짧고 응축된 언어들은 원주에서 보낸 13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생명을 있게 한 자연의 질서에 감격하는 한편 “인간들이 조성한 약육강식의 세상”이 끔찍스럽다고 고백하면서도, 그것을 끔찍스럽다고 느끼는 이들이야말로 “내 동기간”이라며 가슴 뜨겁게 사랑한다고 털어놓는다. 박경리의 자연과 생명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면서, 『토지』를 탄생시킨 작가의 문학관과 세계관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산문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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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이 책을 들고 지나가는 젊은이를 보면 그를 냅다 좋아할 것 같다. 서툴고 가난해서 고단했던 날에도 박경리 선생님 때문에 내 젊음이 귀해지곤 했다.
1992년 강의실 맨 앞줄에 앉은 학생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선생님은 너무 멀리 계시고 그분 말씀처럼 우리는 매 순간 유한과 싸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댁을 떠나 한참 어린 자들에게로 향할 때, 『토지』를 집필하며 땅속 뿌리처럼 지켜온 고독을 잠시 벗어나 입을 열 때, 간곡히 전승하고 싶으셨을 됨됨이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박경리 선생님은 내게 외로워질 용기를 주신다. 나는 박경리를 읽으며 입을 다물고 손을 바삐 움직인다. 노동이 곧 사유이며 생명의 신비는 영원한 화두란 걸 일러주는 작가. 그의 명작들을 읽기 전에 펼쳐도 좋고, 읽고 나서 펼쳐도 좋은 책이다. - 이슬아 (작가, 헤엄 출판사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