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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안한 서곡
2. 여수의 창변 3. 금단의 사랑 4. 연정과 연정 5. 산장의 재회 6. 구심력 7. 사랑의 사자 8. 애가 작품 해설 |
Park, Kyung-Ree,朴景利,박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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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저녁때도 여인은 연구실 앞에 와서 바람을 쐬는 것이었다. 그다음 날도 역시 여인은 나타났다. 여인은 퇴원을 하는 날까지 하루의 일정처럼 해 질 시각이면 반드시 그곳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어느 날 창변에 서 있는 민호와 말을 나누게 될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들의 로맨스는 시작되었다.
--- 「1. ‘불안한 서곡’」 중에서 푸른 하늘과 푸른 산과 푸른 바다, 민호는 일본의 어느 시인의 오월의 노래를 생각한다. 귤꽃이 피고 소쩍새가 운다던 그 오월의 노래, 그러나 이 고장에도 은행나무의 가로수가 있고, 동백꽃이 피고, 유자가 무르익는 목가가 있다. 그리고 한없이 아름다운 남국의 바다, 꿈과 같이 흰 배가 가고. --- 「2. ‘여수의 창변’」 중에서 민호가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예 모르는 모양으로 지나가는 남녀는, 바로 조금 전 공원의 숲속에서 본 정규와 그의 연인이라 생각되는 여자였다. 그러나 민호가 놀란 것은 정규의 연인인 현회의 얼굴을 똑똑히 본 때문이다. 현회는 다른 사람 아닌 오 박사의 부인, 그 사람이었다. 며칠 전에 연구실로 오 박사를 찾아왔던 귀부인, 그리고 아까 바로 다방 앞을 지나가던 그 아름다운 여인. --- 「3. ‘금단의 사랑’」 중에서 상화는 자기를 죄의 구렁텅이에다 넣고 만 영옥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괴롭혔다. 그러나 상화는 진심으로 영옥을 불쌍히 여겼다. 아름답지도 못하고 총명하지도 못한 그 여자의 동물적인 애정이 자기에게 한결같이 쏟아질 때, 상화는 그를 한없이 미워하다가도 도리어 그를 미워한 자신이 더욱 미워지곤 했다. --- 「4. ‘연정과 연정’」 중에서 장차 일을 어떻게 처리해나갈 것인가? 그것은 막연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진수의 생명과 삶 전부가 민호라는 한 사나이에게 매여 있음은 물론이다. 3년 동안, 아니 사변이 나고부터 8년 동안 진수의 맑고 깨끗한 마음에는 언제나 음산하고 잔인한 운명의 그림자가 뒤따라 그를 학대하고 괴롭혔다. 이제부터라도 그는 좀 행복해져야 할 사람이 아닌가? --- 「5. ‘산장의 재회’」 중에서 현회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상화는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있는 강하고 끈질긴 마음들의 힘을 느꼈다. 어느 때고 그러한 마음들, 구심력은 다가설 것이고, 드디어 결합이 될 것이라고, 상화는 왜 그런지 믿어지는 것이었다. --- 「6. ‘구심력’」 중에서 저녁이 끝난 뒤 민호는 일찍이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이 올 리가 없다. 설희의 초췌한 모습, 눈이 슬픔과 절망에 타고 있던 얼굴, 그 단정한 여인이 치마로 땅을 쓸며 실신할 듯 걸어가던 모습, 도무지 눈앞에 어른거려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평생을 두고 이처럼 처참하고 깊은 죄의식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 「7. ‘사랑의 사자’」 중에서 그래, 진수는 누구의 죽음 같은 것을 바라는 여자는 아냐. 너가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과 선을 말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우리는 진실했다. 그러나 그 진실의 결과는 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의 죄랄 수는 없어. 우리는 그렇게 아슬아슬한 이별과 해후 속에 휘말려 들어갔을 뿐이니까. 아무튼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할 게고, 우리의 진실은 그냥 버려질 수는 없는 것이라 나는 생각해. --- 「8. ‘애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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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탄생 100주년 기념 큐레이션 리커버 출간
★ 김화진, 김희선, 위수정 소설가 추천 “좋은 소설은 시대를 살지 않는다.” _김희선(소설가) 『토지』 너머 박경리를 발견하는 또 다른 길 최산호 작가의 일러스트를 입은 박경리 장편소설 큐레이션 박경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산북스에서 한국문학사의 거대한 이정표, 박경리의 작품 세계를 오늘의 독자에게 다시 건넨다. ‘이 시대의 낭만성’이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작가의 작품 중 세 작품―대표작 『김약국의 딸들』, 첫 장편소설 『애가』, 대표 연애소설 『표류도』―을 선별, 새롭게 재해석해 소개한다. 이는 『토지』로 대표되는 거대한 서사 너머, 박경리 문학의 또 다른 얼굴을 조명하고 ‘현재진행형의 문학’으로서 박경리를 다시 읽기 위한 시도다. 이번 큐레이션 리커버는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를 통해 다시 읽는 박경리를 지향한다. 무선제본을 적용해 일상적으로 소장하기 좋은 형태로 기획했으며, 고전의 품격을 강조해온 기존 박경리 컬렉션과는 다른 감각을 제시한다. 서정성과 현대성을 아우르는 최산호 작가의 일러스트는 박경리 문학이 지닌 양가적 정서—아름다움과 비극, 생명력과 소멸—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화사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일러스트 속에서 인물들의 욕망과 고독, 그리고 끝내 삶을 선택하는 의지가 은유와 반어로 살아난다. 이 생동하는 이미지들은 ‘낭만성’을 중심에 두면서도, 그 이면에 공존하는 고독과 결핍을 함께 드러낸다. 그렇게 이 책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낭만의 나날을 지금 우리의 감각으로 다시 불러올 것이다. 한 남자와 두 여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어긋난 사랑이 불러온 파멸과 이별 『애가』는 박경리의 첫 장편소설이다. 1950년대 말부터 박경리는 신문과 잡지에 많은 양의 대중소설을 꾸준히 연재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그중 『애가』는 1958년 《민주신보》를 통해 연재된 작품으로, 박경리 문학의 변화를 보여주는 길목으로 평가받는다. 박경리의 초기 단편소설 속 여성 인물들은 성적 대상화를 거부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주체적인 자의식을 갖는 순간 공동체로부터 추방된다. 이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가부장적 질서를 인식하지만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할 수 없어 고통받는다. 이 시기를 거쳐 첫 장편으로 창작한 『애가』는 박경리의 초기 단편이 보여준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후 국가는 여성의 성(性)을 통제하며 여성을 ‘보호받을 수 있는 존재’와 ‘그렇지 못한 존재’로 구분했다. 이른바 ‘여성에 대한 이중 잣대’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시대였다. 이런 환경에서 여성 작가가 성과 욕망을 주체적으로 탐색하고, 자신의 해방을 글로 담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박경리는 달랐다. 그의 연애 서사는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미묘하게 어긋나며, 억압적 사회 질서에 균열을 내는 반항의 공간을 열어두었다. 당시 독자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연애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오되 반어적 어법을 사용해 그 안에 전혀 다른 메시지를 담았다. 더불어 서사를 통해 당대의 통념이 얼마나 여성을 억압하는지를 드러낸다. “한 사람의 죽음이나, 또는 이별로써 사랑의 독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결혼하지 않는 여자, 후회하지 않는 사랑 시대와 전형성을 뛰어넘은 멜로드라마 결혼을 약속했지만 사회적 편견으로 헤어진 남녀와, 이를 극복하고 새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여자. 전쟁 탓에 결혼하지 못하고, 그사이 스승에게 사랑하던 이를 빼앗긴 남자. 박경리는 당시 사회 풍경을 선명하게 그리면서도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변형하여 자기만의 개성 있는 인물과 서사 스타일을 통해 비극적 깨달음과 낭만성을 구축했다. 이는 『토지』로 이어지는 박경리 문학 여정의 시작점이자 박경리 문학작품 속 다양한 인물 군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우리는 진실했다. 그러나 그 진실의 결과는 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의 죄랄 수는 없어. 우리는 그렇게 아슬아슬한 이별과 해후 속에 휘말려 들어갔을 뿐이니까. 아무튼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할 게고, 우리의 진실은 그냥 버려질 수는 없는 것이라 나는 생각해.” (342쪽) “행복하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영옥은 되묻듯이 상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상화는 그 눈을 피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행복할 것까지는 없지만 이제 참고 살 수가 있어요. 아이도 크고 하니까…… 그리고 무식한 사람이긴 하지만 아주 성실한 편이니까 그것을 믿고 살죠. 이제 연애 같은 것, 마치 불에 덴 것 같은 그런 고통이 두려워요.” (263쪽) 더불어 기존 멜로드라마의 공식과 다르게 선인의 승리, 악인의 처벌을 공식화하지 않고 사랑의 결합에 장애가 되는 경쟁자를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나 행복한 결합의 형태로 제시하지 않고 사랑에 영원성을 결부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 이데올로기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했다. 오히려 이들의 삶에 중요한 것은 사랑에 따른 고통마저 홀로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이르지 못해도 이상적 가치로서 사랑을 성취할 가능성을 갖는다. 결국, 박경리의 연애소설이 목적했던 것은 사랑을 통해 존재론적 고독을 온전히 홀로 감당하는 개인의 낭만성을 그려내는 것이지 않을까. 시간을 견뎌온 작품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으로 돌아온다 세 편의 소설로 읽는 새로운 낭만에 대하여 여성 독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연애소설이 범람하던 1950년대, 박경리는 기존 연애 서사가 보여주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작품을 씀으로써 자신만의 위치를 확립한다.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사랑을 선택하지만 사랑에 종속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끝까지 묻는 과정이었다. 사회적 부조리에 타협할 수 없는 의지와, 가정이나 결혼으로 타협하지 않는 사랑에 관한 깊은 탐구가 이 시기 박경리의 연애 서사에 이미 꿈틀대고 있었다. 사랑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을 바라고, 삶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살아가려 하는 것. 결국 모든 선택이 자신의 몫임을 받아들이는 이 낯선 낭만의 세계는 박경리 문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 되었다. 이러한 박경리의 낭만성은 불확실성과 선택의 책임 속에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를 비춘다.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강렬한 여성 인물들은 사랑과 삶, 선택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에게 질문해온다. 박경리의 문장은 오래되었지만, 그 질문은 한 번도 낡은 적이 없다. 사랑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끝내 살아가려 하는가. 박경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 질문을 시작했다. 이제 그 질문을 다시 이어갈 차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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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연애소설이 사랑을 결혼으로 귀결시키고, 여성의 욕망을 남성의 선택에 가두던 시절, 박경리 선생님은 이미 그 흔한 문법의 바깥을 탐구했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며, 이별은 사랑의 소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을 증명해야만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래된 소설이 살아남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시대를 잘 기록해서 박물관에 보존되거나,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가슴에 가닿거나. 『애가』는 후자에 속합니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이 소설이 전혀 낡지 않은 이유는, 아니, 더 나아가서 새롭게까지 읽히는 이유는, 이 모든 서사가 아직도―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어딘가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을 현재진행형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소설은 시대를 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결국 인간을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소설 역시 죽지 않을 것이며, 그 안에서 작가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애가』를 읽으며, 선생님의 가장 이른 목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듯 말입니다. 끝으로, 몇 년 전 원주 매지리에 있는 선생님의 옛집을 방문했을 때,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만들어둔 작은 문을 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 조그만 문들, 여기저기 놓인 밥그릇들 덕분에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그 집에서 여전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지요.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그 따뜻함이 자꾸만 떠올랐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 김희선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