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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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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늑골로 만들어진 새장

보트
한붓그리기 문제
새 시야
공동체
크로마키 앞의 초록
전생
멜로디 카드
스포일러
미러볼
분수 공원
매시드 포테이토
영혼과 나
강변북로

2부
먼 곳에 무언가 두고 왔다는 느낌이 들 때

바캉스
파타야
연안 호텔
외로움에 관한 연구
내음성
솜브레로
실내 운전
외로움에 관한 연구
익스트림 클로즈업
유창한 대화
어제들의 터미널
위탁 수하물
여독

3부
던져 다시 더 멀리

검은모래해변
천공
내장과의 대화
삿된 벗
기도 없는 밤
외로움에 관한 연구
계단은 열네 개
오이
청각의 탄생
고스트 노트
사유지
드레스 리허설
멀어지는 기분

4부
숲을 덧칠하는 손은 얼마나 솔직한가요

살구
실족
죽은 말을 타고 있다면 내려라 그러나
여중생
베타
소방대피훈련
폴터가이스트
지연
투시력
남산 방향
상영관
배를 타고 폭포 가까이


해설
무럭무럭 자두 맛 - 홍성희

저자 소개 1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140쪽 | 125*190*20mm
ISBN13
9791194324690

책 속으로

그의 보트는 곧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먼바다까지 갈 수 있는 건 그날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트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한 두려워할 것은 없었지만
모터 굉음과 바닷바람 때문에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너무 깊은 곳까지 갔던 것 같아요.

---「보트」 중에서

빛에 갇힌 주검을 바라봤다
떠나야 했다
앞서간 이들은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데

그가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늑골로 만들어진 새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비어 있었으며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기도 했다

나는 모자를 벗고
머리 위 작은 감옥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
내가 등을 둥글게 말고 죽어 있었다

---「공동체」 중에서

직원은 파편을 쓸어 담아 해변에 쏟아버렸다
깨끗해진 상점이 골목을 지킬 때

유리 조각은 밤새도록 파도에 닳았다
바다를 찾은 이들은 무뎌진 것을 주우며
함부로 윤곽을 짐작하기도 했다

---「매시드 포테이토」 중에서

잠에서 깬 뒤에는 호텔을 둘러보았다 정원에선 달콤한 계피 향이 났으나 모든 것이 햇빛 아래서 너무 선명했고 그로 인한 구토증이 계속되었다 나는 잔디밭에 손을 짚은 채 부드럽고 노란 것을 게워냈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벨보이가 달려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잘 쉬고 있느냐고 그가 물었다 바캉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바캉스」 중에서

해변에 앉아
고무 대야에 햇빛을 모았다

얘야, 그렇게 모아봤자 겨울에 쓸 수 없단다
피서객이 내게 충고했다
그들은 대야에 빈 페트병을 던져 넣었고

---「내음성」 중에서

너를 우림에 묻어두고
뿌리가 지상으로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우듬지를 올려다보면
차분하게 깃털을 고르는 새들
총성을 돌아보지 않기로 약속하며 끝에서 더 끝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저린 다리로 일어섰다
우림의 시간은 더디구나
나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는데

---「멀어지는 기분」 중에서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짓무른 과일이라면요

나의 슬픔은 어떻게 배열해도 무너지지 않고
필요하다면 중력을 무시할 수도 있다

한낮의 비명과 환호성

---「살구」 중에서

너는 손끝에 물을 묻혀 마른 흙벽에 답장을 적는다. 글자들은 탄생하자마자 증발한다. 햇빛만 남는다.

뒤집으면 폭포가 있다. 직원에게 동전을 건네고 기념품 가게를 나선다.

햇빛 아래서 노를 말리는 사람이 있다.

---「배를 타고 폭포 가까이」 중에서

출판사 리뷰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상실의 슬픔을 짊어지기 위해
끊임없이 기억과 공간을 왜곡하는 초록빛 목소리


존재를 상실한 슬픔을 홀로 짊어지며 반투명한 기억과 공간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는 시인 이영서의 첫 시집 『크로마키 앞의 초록』이 아침달 시집 58번째로 출간되었다. “나의 시는 반투명한 비명”(아침달 시 조각책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이라며 탄생한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신인이다. 이영서는 이번 첫 시집에서 51편의 시를 잔잔하고 균일한 호흡으로 담아내어 오직 단 한 사람만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기꺼이 “삿된 벗”(「삿된 벗」)이 되어 성실하게 추도문을 적는다.

시집 『크로마키 앞의 초록』은 상실한 대상을 향한 근원적 슬픔을 노래하기에 앞서 구체적으로 상실한 대상을 반복하여 부르는 이야기다. 표제작인 「크로마키 앞의 초록」을 살펴보면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기억과 공간에 대해 핵심적으로 표현하는 ‘왜곡’의 형상에 대해 알 수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될 수 없는/ 크로마키 앞의 초록처럼”이라는 의미심장한 비유 뒤에 시 속 화자는 “나는 인간이 된다”라고 단언한다. 이영서의 시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본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힘을 작동시켜 적극적으로 취해야 하는 ‘상태’다. 상태란 본질적으로 대상을 일시적인 현상이나 모습으로 억압하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다른 모습과 형질을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대상을 해방하기도 한다. “목이버섯, 시금치, 혼자선 다 못 먹을 당면” 같은 것들을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시인은 인간이라는 속성에 대해 사유하고 “차라리” “딱따구리가” 되기로 한다. 시는 딱따구리의 생물학적 본능을 빌려 “네게 힘껏 구멍을 내어 쓰러뜨리고 싶”은 욕망을 품고 “긴 혀로” “자신의 뇌를 보호”한다. “우거진 숲”은 시인이 시집 속에서 지속적으로 욕망하는 ‘초록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곳은 “수목장을 빠져나오”(「상영관」)는 곳이면서, “눈 쌓인 나무를 흔들어서/ 다시 눈이 내리게 할”(「기도 없는 밤」) 의지를 품게 하는 곳이다. “죽은 친구는 날 찾아올 수 없”으므로 시인은 이 고통과 슬픔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초록인 ‘크로마키’라는 세계를 데려온다.

크로마키는 두 개의 영상물을 합성하기 위한 특정 색깔의 배경이자 디지털 합성 기술을 뜻한다. 인간에서 벗어나 다양한 존재들을 호명하며 자기 자신을 두르는 배경을 탐색하고 사유하는 이영서의 화자는 크로마키라는 일종의 왜곡 기법을 시집 전반의 태동으로 삼아 기억과 공간을 전유한다. 새로운 배경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의 윤곽만을 온전히 남겨두어야 한다. “태양을 등지고 걸을 때 나는 잠깐/ 노란색 가장자리를 가질 수 있”(「내음성」)듯 대상에 대한 외면을 통해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는 절단면을 가지려는 시도는 이영서가 시에서 반복하는 또 다른 접촉이다. “함부로 윤곽을 짐작하”며 “의자에 묶어두었던 너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은 그에게 “아름답지 않”으나 “모서리 없이도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치 식당에서 먹는 “으깨진 감자”(「매시드 포테이토」)처럼 대상의 부재로 인해 뭉개져버린 한 사람의 현실이 시의 목소리를 빌리는 순간 또 다른 창조의 장이 된다는 역설을 밝힌다. 해설을 쓴 홍성희 문학평론가는 이러한 이영서의 시적 태도를 두고 “그의 시는 사라지는 것과 남아 있는 것, 새겨진 말들과 들리지 않는 적막, 무릎의 열기와 매일의 한기 사이”라고 말한다.

“나는 네 이야기를 조금씩 믿을 수 있게 된다”
이름이 남긴 파편들을 그러모으는 공동체의 미래


시인 이영서가 이토록 기억과 공간에 새로운 골격을 입히려고 배경을 갈아 끼우려는 이유는 특정 대상의 거대한 부재에 있다. “너와 구급차를 탔던 날/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들것 밖으로 떨어지던 손”(「삿된 벗」)을 보며 구체적인 공포와 슬픔을 느낀 화자는 죽음 혹은 부재가 남긴 파편들을 강박적으로 정리한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어두운/ 이차선 국도에 죽은 새가 가득”(「공동체」)한 풍경을 보다가 맞은편에서 만난 한 사람과 “빛에 갇힌 주검”을 바라보고는 서로가 가진 “새장”과 “감옥”을 보여준다. ‘그’가 보여준 새장은 “늑골로 만들어진” 것이나 그 속에 아무것도 없다. ‘나’는 벗은 모자에 있던 “작은 감옥”을 보여주는데 그 속에는 “등을 둥글게 말고 죽”은 내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새장과 죽은 내가 담긴 작은 감옥을 서로 보여주는 이 독특한 관계는 시인이 시집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에 관한 인식과 호명을 유비하면서 떠난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우리가 서로의 창살을 서름하게 들여다보는 사이” 도착한 인부들은 순식간에 죽은 새들을 깨끗하게 치운다. 그렇게 서로는 각자의 길로 떠난다. 배경이 이차선 왕복 국도인 이유도 바로 산 자와 죽은 자 앞에 놓인 미래의 방향이 어긋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면, 오직 기억 속에서만 어렴풋이 호출할 수 있는 이름은 어긋나는 향방 속에서만 잠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영서가 생각하는 공동체로서의 기본 형태다. 우리 삶은 “덕지덕지 붙은 파편뿐이어서” “전봇대가 구부러지고 골목이 휘어지고” “나의 얼굴이 아둔한 물고기처럼 보”(「미러볼」)이는 왜곡된 현상들이 현실 속 슬픔을 강화한다.

이영서에게 이름이란 대상을 구체적으로 불러내어 존재의 의미를 선명히 드러내는 방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시집 속에서 존재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지 ‘이름’이라고만 말하면서 익명의 베일을 덧씌운다. 이름은 그저 이름 그 자체다. 부름이 필요할 땐 이인칭(너, 당신, 언니 등) 혹은 삼인칭(죽은 개, 우체부, 그녀 등) 정도로만 밝힌다. 그 이름들 자체가 시집 전반에 놓인 파편들이다. 파편들은 형상을 이탈해 조직을 벗어난 순간부터 고유한 이름을 잃고 개별의 조각으로만 남는다. 이영서가 이처럼 기억을 벗어난 파편을 그러모아 정리하려는 강박 내지는 결벽을 반복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 익명성을 활용해 “기억의 주인”(「연안 호텔」)을 찾아주려는 애도의 윤리가 기저에 깔렸기 때문이다. “이름에 대한 보답”(「보트」)은 “먼바다”에 가는 것이다. “다시 백사장으로 돌아와서야 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까닭은 오로지 겪고 난 뒤에만 알 수 있는 슬픔과 기억이 있어서다. “주인 없는 오믈렛”(「오믈렛」)을 받는 호텔에서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화자는 여행을 끝내고 여독을 느끼면서 점점 “사라진 것들은 사라진 지 오래”(「베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가방에 “편지와 전단지”(「한붓그리기 문제」)가 한껏 뒤섞여도 “우편함을 열면/ 전단지뿐”인 세계는 시가 펼치는 슬픔을 이상하게 더 아프게 한다. 더 이상 수신조차 기대할 수 없이 증발해버린 말들. “손에 쥔 것은 볼트와 너트뿐”(「강변북로」)이라서 어떤 결합은 탈락되어야만 한다면. 시인은 앞으로도 남겨진 사람으로서 “멀어지는 기분”(「멀어지는 기분」)만 응시해야 하는 존재다. 이영서가 밝히는 눈빛은 부재하는 이를 함부로 들추지 않는다. 다만 “네 이야기를 조금씩 믿을 수 있게” “흩어졌던 불꽃이 폭죽 속으로 다시 모일 때까지”(「죽은 말을 타고 있다면 내려라 그려나」) 가장자리만을 짐작하고 더듬으며 “외로움에 관한 연구”를 이어나간다. 떠난 이들의 이름이 쏟아지는 슬픔의 지대에 이영서의 시집 『크로마키 앞의 초록』을 놓아본다. 손에 쥔 이름들을 놓친 기억이 있는 독자에게 이 시집은 분명 먹먹한 삶의 가능성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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