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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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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사철 없이 봄뿐인 여인들의 섬이 있습니다.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쳐도 그 안에서는 진달래며 목련이 피는 섬이요.”
“시방 장난질혀? 그 전설의 고향에서 나온 섬 말하는감?” 박성우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김 노인의 눈을 들여다본다. 청명한 기운이 도는 두 눈과 마주치자 찬 것을 씹지 않고 삼킨 듯 명치끝 시린 느낌이 들어 김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움칠한다. “그곳을 간 사람들은 그 섬을 미인도(美人島)라고 부릅니다.” --- p.16 성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귀신에 홀린 것이리라. 석연치 않은 머릿속과 달리 몸은 이상하리만치 가볍고 상쾌했다. 그는 오늘 저녁에야말로 요사스러운 것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단단히 벼르고는 해가 저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밤을 새우고 다음 날이 되도록 집은 잠잠했다. 사흘이 지나자 필중이 돌아왔다. 성우는 약속된 사례비를 받고 어정뜬 심정으로 그곳을 떠났다. --- pp.24-25 성우는 가슴이 들레는 한편으로 속이 아뜩해졌다. 여인을 들쳐 업고 데려가 으스러질 때까지 손목을 움켜쥐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쳤다. 바락바락 화를 내는 그녀를 몸 아래 깔고 성내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여인이 종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방망이질한다면 피하거나 저지하지 않고 고스란히 그것을 다 맞고 싶었다. 성우는 이성을 뚫고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욕정에 당황했다. --- pp.46-47 “섬에 흘러드는 사내들을 후리며 제 미색을 뽐내기 바쁘지만 알고 보면 아주 불쌍한 것들이라고. 죽어라 정분질을 하지만 결국 사내들은 지들을 떠나거나 눈이 멀어버리거든. 백년해로라는 게 없지. 히히. 따지고 보면 내 팔자가 제일 기구하지만서도. 남들이 모르는 걸 혼자 안다는 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일인지 넌 모르지? 난 네가 찾아오리란 것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 넌 이곳에 와선 안 될 놈이었거든.” --- pp.83-84 매화들이로 돌아와 잠든 그는 꿈속에서 다시금 의문의 여인을 만났다. 여전히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그녀는 안타까운 손길로 성우의 벗은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성우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월화의 속내일 거라 확신했다. 원래 앙큼한 여자애들은 호감을 품을수록 남자에게 더 쌀쌀맞은 모습을 보이지 않던가. 이는 선뜻 종민을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을 힐끔거리고만 있는 월화에게 먼저 다가가라는 일종의 계시이다! --- p.99 귓가에 맴도는 낯선 목소리와 함께 성우는 소스라치듯 놀라 깨어났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하게 눈앞을 스쳐간 여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성우는 그 잔영이 지워지기 전에 황급히 붓을 집어 들고 숨도 쉴 새 없이 여인의 얼굴을 그려내기 시작하였다. 화선지 속에 담긴 여인의 얼굴은 분명 월화가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성우는 왜 심장이 세차게 떨려오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손끝으로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 p.128 노란색 치마가 허공에 펄럭였다. 입을 살짝 벌린 소향의 의아한 얼굴. 성우는 허공에 붕 뜬 소향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시간이 영원 같았다. 성우가 아뜩하게 내려앉은 가슴으로 몸을 벌떡 채 일으키기도 전에, 소향의 몸은 꽃떨기처럼 맥없이 벼랑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바다는 아귀의 입처럼 억센 파도로 소향의 몸을 흔적 없이 삼키었다. 야속하게도 바닷물 위로 옷자락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 p.149 “벼랑 아래 바다는 매일 똑같은 바다가 아니야. 이히히. 남자가 여자를 탐하고 섬을 떠나는 밤에는 바닷물 속에 문이 열리지. 그때가 유일한 기회야. 다른 사내가 벼랑에 몸을 던지는 순간, 너도 이곳 계집을 끌어안고 문이 닫히기 전에 뒤따라 뛰어내려야만 해. 조금이라도 때를 놓쳤다가는 둘 다 죽은 목숨이라는 건 너 같은 멍청이라도 알 만하겠지? 히히.” --- pp.172-173 “한바탕 비가 내린 뒤 개고 나면 이곳 여인들은 이 일에 대해 기억하지 못할 것이오. 비가 그치기 전에 저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지시오.”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대가 이곳의 기억을 간직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세월의 흔적을 품고 노인이 된 채로 제 세상에 가게 될 것이오. 그러니 첫 번째 왔던 때처럼 모든 것을 잊도록 하시오.” --- p.181 “하나만 물어봅시다.” 늙은이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그를 돌아보았다. “그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말이오. 정말 젊음의 세월을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기억이었소?” 늙은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기억은 가치가 아니라 죄의식입니다.” --- p.184 마지막이 어떠하였는가를 떠나, 추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랑이 있는 건 축복이다. ---「작가의 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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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간 사람들은 그 섬을 미인도(美人島)라 부른다
한 노인이 길에서 쓰러져 숨을 거둔다. 노인이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미인도’. 노인의 소지품에서 일주일 전 실종신고가 접수된 대학생 황종민의 학생증이 나오고, 지문 감식 결과 놀랍게도 노인과 황종민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멀쩡한 청년이 불과 며칠 사이에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으로 사망한 것도 미스터리인데 자신이 황종민의 고교 동창이라 밝힌 노인이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겠다고 나선다. 자동차 사고로 정신을 잃은 성우는 자신의 몸을 씻겨주는 여인의 손길에 아득한 황홀감을 느끼다 문득 깨어난다. 저승인 듯, 꿈인 듯 눈앞에 펼쳐진 낯선 세계는 아리따운 여인들이 모여 사는 섬. 그곳은 사시사철 없이 봄뿐이며 시간도 달리 흐른다. 성우는 화사하고 향기로운 섬의 유혹을 뒤로하고 제 세계로 돌아가려 하지만, 제 뜻대로 나갈 수 있는 단 하루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규정대로 섬의 한 여인과 합궁을 해야만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어느 여인과 연분을 맺어도 좋소. 하지만 합궁을 하게 되면 이곳 일은 전부 잊은 채로 돌아가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일을 치르면 좋든 싫든 더는 머물 수 없게 된다오.” (42쪽) 새로운 사내가 들어오자 섬의 여인들은 적극적으로 호기심을 보이거나 교태를 부리며 환심을 사려 한다. 더욱이 미술학도인 성우는 여인들의 요구에 그들의 정사 장면을 그려주며 큰 인기를 얻는다. 그럴수록 성우는 섬에 들어오던 날 자신의 몸을 씻어주었던 여인을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제는 꿈속에 나타나 자신의 몸을 쓰다듬는 여인이 성우는 월화일 것이라 짐작하고 점점 더 월화에게 끌리지만 월화에게는 이미 사내가 있었다. 천만 뜻밖에도 그는 고교 동창 황종민이었다. 아름다운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미인도는 천상의 무릉도원과는 거리가 멀다. 언뜻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롭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잘못 디디면 빠지는 허방처럼 곳곳에 위험과 비밀이 도사리고 있음을 곧 알게 된다. 숲에 살면서 맹수를 길들여 여인들을 겁주는 노파들, 묵묵히 궂은일을 하는 소수의 소경 사내들,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면서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떠벌리는 무녀 매영. 게다가 요염하면서도 앙칼진 가희는 섬의 대모 격인 수영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은밀히 세력을 모으며 섬을 제멋대로 파괴한다. 미인도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다. 남녀가 몸을 섞으면 사내는 섬에서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로 섬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인연은 쉽게 끊을 수 없는 법, 드물게는 지독한 열병에 빠져서 섬을 떠나지 못하는 사내들도 있다. 제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섬에 남기를 선택한 이들은 성기능을 상실한 소경이 되어 평생 잡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또한 제 세상으로 돌아갈 때 섬에서의 기억을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서도 안 된다. 만약 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섬에서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게 되어 백발노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섬의 여인들도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정을 통한 사내와는 백년해로는 고사하고 그날로 이별해야 하며, 혹여 아이라도 갖는 날에는 천벌을 받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꿈같은 나날을 보내도 영원히 함께할 수 없고, 망각하지 않으면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저주에 가깝다. “아무리 이곳이라 해도 마냥 좋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란 없다오. 때로는 꽃이 지기 전에 돌아서주는 게 꽃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소.” (115쪽) “애욕의 집착이라는 게 원래 그리 끔찍한 법 아니겠소? 그러니 또 재미가 있는 것이고.” (168쪽) 사랑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한 선택 성우는 애초에 섬에 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영은 그를 경계했고 매영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의 섬 생활은 순탄치 않아 원치 않는 일에 휘말리고, 제 사랑을 위해 섬의 질서를 깨뜨리고, 급기야 섬에서 일어난 두 번의 죽음의 당사자가 된다. 위기에 처한 그는 한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과 함께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고 왜 자신이 한 여인을 그토록 그리워했는지 알게 된다. 너무도 행복했기에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오고, 그도 기억과 망각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기억이란 한낱 꿈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소? 예전처럼 망각을 택하면 마음의 고통도 덜 수 있을뿐더러 그대의 젊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오.” (183쪽) 성우의 선택에 대해 독자가 품을 법한 질문이 소설 말미에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제시된다. “그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말이오. 정말 젊음의 세월을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기억이었소?” 그리고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미인도』는 눈에 착착 감기는 유려한 문장이 단연 돋보인다. 소리꾼의 사설이 북장단에 맞춰 흘러가듯 한껏 물이 오른 문장이 몽환적인 세계를 자유자재로 그린다. 남녀가 노골적으로 희롱하는 장면이든 서로 은근히 애를 태우며 곁눈질하는 대목이든 솜씨 좋게 요리하며 전아리표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미인도는 실재하는 섬이 된다. 어쩌면 당신도 그 섬에 다녀왔을지 모른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여자의 손끝은 그의 사타구니나 허벅지를 스칠 때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야무지게 살을 문질렀다.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침묵 속에 요염함이 느껴졌다. 여자가 무언가를 집으려 그의 위로 몸을 기울이자 탱탱하고 보드라운 젖이 가슴팍에 닿았다. 평소라면 심장이 요동치고 맥박이 빨라졌겠지만 그런 격정과는 또 달리 그는 날짝지근한 황홀에 취해 있었다. (28~2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