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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영웅과 친구가 될 때 1. 실 공장 집 아들, 1908~1927 2. 결정적 순간들, 1927~1931 3. 도구를 찾아 나선 예술가, 1932~1935 4. 이전 세계의 종말, 1936~1939 5. 국적: 탈주자, 1939~1946 6. 뉴욕에서 뉴델리까지, 1946~1950 7. 세계가 그의 스튜디오이다, 1950~1970 8. 또 다른 삶을 향해서, 1970~ 후기―세기의 눈이 세기와 더불어 눈을 감다 출처와 참고자료 감사의 말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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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는 카르티에 브레송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신화적 존재가 된다. 그는 단 한 번도 라이카와 떨어져 지내는 적이 없게 되었다. 야외에서건 내밀한 공간에서건 마찬가지였다. 거리에서, 자택에서, 여느 가정집에서, 어떤 시간 어떤 장소, 혹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곳에서도 카메라는 카르티에 브레송을 따라다녔다. 사실 이런 태도는 예술가라기보다 현상금 사냥꾼들이나 취하는 태도였다. 언제라도 셔터를 누를 준비를 하고서 매복하거나 엿보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인간과 기계, 하나의 영혼과 장치 사이에 이처럼 혼연일체를 이루고 완벽한 상호침투를 보인 예는 없었다. 마치 한 쌍의 연인들을 놓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채워준다고 말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카메라와 사람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카메라는 사진 찍는 사람의 시각을 자연스레 연장시켜줌으로써 사람과 한 몸이 된다. 문카치의 사진을 보고서 받았던 충격의 여파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 p.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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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에 브레송은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카이유보트와 마네가 그토록 좋아했던 생라자르 역 뒤편 어느 울타리 판자 틈새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오랫동안 기다렸다. 물론 이 사진에 담긴 도형적 완벽성은 그의 탁월한 시선 덕택이고, 놀라운 리듬감과 디테일의 풍요로움, 멋진 반사광, 직선과 곡선이 이루는 절묘한 연금술은 그의 직관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치더라도, 뒤편으로 보이는 작은 광고그림 속의 여자 무용수가 마치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중년남자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광경에 대해서는 뭐라 말해야 한단 말인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설명하기 귀찮으면 둘러대는 말처럼,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인가?
--- p.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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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에 브레송은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비판의식을 눈에 금세 띄는 곳에 담지도 않을뿐더러, 뜻밖의 장면에 초점을 집중시키고, 기대했던 장면에서 기대하지 않은 의외성과 마주치게 만드는 사진작가이다. 예를 들면, 그가 1966년 르망의 자동차경주 24시간을 취재한 사진들에서 자동차는 거의 등장하질 않는다. 기껏해야 정비공이 한잔 걸치는 장면이나, 명사들이 칵테일파티에 열중하는 장면이나, 풀밭 위에 퍼질러 누운 관람객들이나 혹은 텐트를 친 연인들 사진 따위가 주를 이룬다. 간혹 자동차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뚜껑을 열어놓았거나 부속을 빼놓은 자동차 사진들이다. 다시 말해 달리지 않는 자동차뿐이다. 자동차 경주 르포에서 결정적으로 빠져 있는 부분은, 바로 속도였다…….
--- p.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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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의 유명한 실 공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앙리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돈’을 떳떳지 않게 여기는 집안 분위기의 영향으로 부에 대해 막연한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평생 동안 좌파적 사고를 가슴에 품고 살아갔다. 중·고등학교 시절 당시 학교에서 읽지 말도록 권고하는 책들, 이를테면 보들레르 등의 작품에 탐닉하며 반항적 기질을 키워나간 그는, 집안의 바람대로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어릴 적부터 데생을 배워온 카르티에 브레송은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앙드레 로트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때 배운 엄격한 구성과 기하학은 훗날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후 그는 파리의 초현실주의자 모임에 드나들게 되었고,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모든 것에 의문을 품는 태도를 견지하며, 상상력의 힘을 믿게 되었다. 그가 사진에서 우연의 일치를 추구하는 성향을 갖게 된 것은 초현실주의의 덕인 것이다. 그는 공군에 복무하던 시절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특히 마틴 문카치의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는데, 흑인 청소년 세 명이 탕가니카 호수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뒤에서 포착한 사진이었다. 공군 복무를 마치고 코트디부아르에서 1년을 보내던 카르티에 브레송은 혈뇨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가 젊은 시절 체험했던, 기하학적 시각으로 보는 세계, 초현실주의의 충격, 죽음의 고비, 이 세 가지는 그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성인이 된 카르티에 브레송은 물론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사진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32년 마르세유에서 라이카를 구입한 그는 평생 동안 라이카와 한 몸이 되어 세계 각지를 누볐다. 1933년 뉴욕의 화랑 경영인 줄리안 레비의 주선으로 뉴욕에서 카르티에 브레송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이듬해 그는 멕시코에 머물면서 멕시코 사진작가 마누엘 알바레스 브라보와 사진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미국에서 다시 워커 에반스, 알바레스 브라보와 3인 전시회를 가진 그는 느닷없이 사진을 그만두고 영화에 뛰어들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와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참여했으며, 스페인 내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독했으나, 결국 자신이 영화에 별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좌파 신문 <스 수아르Ce Soir>에 기자로 발탁되어 르포 사진을 촬영했다. 1937년 5월 런던에서 조지 6세의 대관식을 취재하는 등, 그는 점점 더 사진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종군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카르티에 브레송은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세 번이나 탈출을 시도한 끝에 겨우 포로수용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돕던 그는 1944년 6월 마침내 파리가 해방되는 순간을 맞이했고, 이 격변의 현장을 쉴새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1946년 미국에서 다시 사진전을 열게 된 카르티에 브레송은 비평가와 언론에게서 새로운 시각의 지평을 열게 된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1947년 맨해튼에서 다비드 스치민(데이비드 ‘침’ 세이무어), 로버트 카파, 조지 로저 등과 함께 일종의 사진작가 조합인 매그넘 에이전시를 설립했다. 그는 아시아를 누비며 인도에서 간디의 마지막 초상을 카메라에 담고 그의 장례식을 취재했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국민당의 패퇴와 공산당의 집권을 목도했다. 이제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들은 그를 최고의 사진작가의 위치에 오르게 했다. 마침내 1952년 사진집 '재빠른 이미지'가 출간되었고, 이후 그는 ‘결정적 순간’의 사진작가로 통하게 되었다. 언론뿐만 아니라 다른 사진작가들도 이 사진집에 엄청난 찬사를 쏟아냈다. 1954년 여름 카르티에 브레송은 스탈린이 죽은 후 소련을 방문한 최초의 서방 사진작가가 되어 소련인들의 삶을 서방세계에 소개했고, 끊임없이 세계를 누비며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과, 주요 인사들의 초상사진을 기록했다. 두 번째 사진집을 1955년에 출간한 후 그는 생전에 루브르 미술관에서 사진전을 갖게 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사진계에서 독보적 인물이 된 그는, 그러나 노년기에 들어 돌연 사진을 거부하고 데생에 몸담기로 결심했다. 최초의 정열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여전히 라이카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이후 그는 사진과 거리를 두며 데생에 몰두했다. 그는 몇 차례 데생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으나 사진으로 얻은 명성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사진작가로 기억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2004년 8월 3일 뤼베롱의 자택에서 죽었고, 오트 프로방스의 몽쥐스탱 마을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