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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진주조개입니다.
고난 속에 피어난 나비의 꿈 옥중에서 쓴 오페라 상처 입은 용 풍금을 발견하다 금지된 책과 비밀 모임 가출 그리고 일본 유학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해방의 감격 전쟁과 평화 드디어 유럽으로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 강서고분 벽화 사신도를 보다 베를린의 빛과 어둠 전 세계 문화예술인들의 윤이상 석방 운동 뮌헨 올림픽을 빛낸 오페라 <심청> 민족의 아픔을 넘어 통일의 길로 분단을 뛰어넘은 위대한 평화의 노래 만화가 이희재의 ‘윤이상을 찾아서’ 윤이상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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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곁으로 돌아온 윤이상
지난해 11월 3일, 조계사 대웅전에서는 윤이상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낯선 땅에서 눈감은 고인의 넋을 기리는 제가 끝나고, 평양과 베이징을 거쳐 서울에 온 베를린 윤이상 앙상블의 공연이 곁들어졌습니다. 행사장 입구에는 ‘윤이상의 귀환’이라고 적힌 커다란 걸게 그림이 바람을 맞으며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윤이상의 귀환’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우리 음악사와 현대사를 통과하는 핵심어입니다. 그는 고전과 현대,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음악기법을 한데 아우르면서 우리 시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곡가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북으로 갈린 조국의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극복하려 노력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 시련을 딛고 위대한 예술가로 윤이상은 서른아홉의 늦은 나이에 유럽으로 작곡 공부를 하러 갑니다. 그러나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 등을 통해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작곡가로 이름을 얻어갈 무렵, ‘동베를린 사건’이라는 뜻하지 않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가 1963년에 평양을 방문했던 것은 청년 시절에 같이 공부했던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음악에 깊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던 강서고분 벽화 ‘사신도’를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분단 조국에서 그 결과는 참혹하여, 윤이상은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그의 예술혼은 더욱 불타올라,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공연작인 <심청>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세계 음악계에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 윤이상이 소망하던 세계 베를린 외곽 가토우 지역묘지에 있는 윤이상의 묘비에는 ‘처염상정(어느 곳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늘 깨끗하다.)’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윤이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예술가가 아니었습니다. 윤이상의 삶은 “언제나 분단의 경계 위에 선 것”이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소망하던 것은 분열을 넘어서서 펼쳐지는 화해와 평화의 세계였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와 고향의 앞바다에서 낚시를 즐기고, 고향의 노래인 남도창을 세계화시키고 싶다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음악의 나래를 타고 날아와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닌지요. * 참으로 어린이들을 사랑하던 사람 조계사에서 열린 추모 음악회에서는 소품 위주로 청아하고 깊이 있는 곡들이 연주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외손녀를 위해 작곡한 바이올린 독주곡 <작은 새>가 연주되는 동안, 때마침 대웅전 안으로 날아 들어온 참새들이 맑고 고운 노래를 보탰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윤이상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도 많이 작곡했습니다. 20대 초반 무렵, 윤이상은 통영의 화양학원이라는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책 한 권 분량의 동요집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모아 고아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열악한 살림 속에서도 윤이상은 아이들을 정성껏 씻기고, 먹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노래들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어린이책에 담아내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그가 어린이들에게 기울였던 이런 관심과 사랑을 눈여겨보고자 합니다. |